사단의 전령, 경쟁심 (잠 24:17,18)
본문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잠언24:17,18)
『한 초등학교 4학년 반장 아이가 감기 몸살로 며칠간 학교에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몇몇 가깝게 지내던 아이들이 주머니에 있는 동전을 모아 과자를 한 봉지 사서는 병문안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반의 부 반장 아이는 함께 가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가려는 거예요. 친구들이 왜 함께 가지 않으려는지 물었을 때 아이가 대답 합니다. ‘난 안 갈꺼야! 걔가 아파 못 나오면 내가 반장이 될 텐데 뭣 하러 내가 가니!"』
속 좁은 아이의 철없는 모습으로 흘러 버리기엔 왠지 마음이 개운치 않습니다. 웬만해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노련함이 세월과 함께 쌓였고, 오랜 신앙생활을 통한 표정관리 기술이 수준급에 올라 있다는 것이 다를 뿐 입니다. 경쟁심과 시기심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 좁은 마음 속 어디에 웅크리고 있다가는, 부르기도 전에 언제나 먼저 와서는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럴 땐 스스로도 참 속상합니다.
그 상대가 불분명하지만 얄밉다가는 괘씸해집니다. 속상하고 부럽다가도 막 화가 납니다. 억울하고 서러워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세상이 끝날 것 같습니다. 모든 게 귀찮고, 밥맛도 나질 않습니다. 세상에 날 알아주는 내 편은 하나도 없어 외로워집니다. 열정과 의욕이 사라져 버립니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느냐 구요? 제가 참 많이도 이것 때문에 아파했고 속상했거든요. 물론 지금은 온전히 자유 하냐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여전히 때때로 여러분과 똑같이 통증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같이 약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신다.”
어떤 하나님의 마음입니까? 다른 사람이 넘어지고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라 할지라도 그가 엎드러져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서 너는 마음으로라도 기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그 누구든지 그의 아픔과 고통과 실패를 보고 즐거워하거나 그것으로 나의 기쁨으로 삼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묘한 안도감
이 말씀 앞에 저는 제 속에 섬뜩한 죄악 된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원수가 넘어지거나 엎드러지는 것을 보면서가 아니라, 서글프게도 함께 사역하는 동료들의 실패와 잘못, 실수를 보면서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를 위로하고 공감하면서도 마음 어디에선가 묘한 안도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이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한 교회를 섬기며 함께 주의 일을 한다면서도 언제부터인가 동역자가 아닌 경쟁자로서 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료의 연약함과 부족 한 것을 보고 안도감을 느꼈다면 틀림없이 그의 성공과 뛰어남을 시기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받는 칭찬과 인정, 형통함을 질투 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누구에게나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과 기준으로 볼 때 나보다 못하다 싶은 상대에겐 그 정도가 덜합니다. 반면 나에게 위협이 되고, 앞서 나가고, 더 인정을 받고 능력이 있다 싶을 때 어김없이 경쟁자의 목록에 이름을 올려놓고는 팽팽한 경쟁 구도로 대하였습니다.
이 마음이 상대방이 어떤 모양으로든 넘어지고 엎드러지는 것을 보고는 안도감을 느끼게 한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반장의 병문안을 가기를 거부하는 아이의 마음과 다를 게 뭐 있겠습니까? 꼭 같습니다. 그가 내 앞에서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는 사악한 경쟁 심리입니다.
주를 사랑하며 섬기는 성도 여러분! 우리 중 누가 이런 것에서 온전히 자유 한 자가 있을까요? 알지만 나도 모르게 이미 시작되어져 버린 경쟁심, 이것으로 인해 종종 우린 질투와 시기심으로 스스로 힘들어 하게 됩니다. 끝없이 자신을 비하하며, 다른 사람을 향하여 이상하게도 공격적인 태도로 대합니다. 이상하리 만큼 사람의 비난과 칭찬의 앞에서 크게 요동합니다. 그래서 섬김에도 자유함과 기쁨이 없고 팽팽한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비뚤어진 경쟁심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신앙의 열정을 식게 만듭니다. 주를 향한 순전한 섬김과 헌신의 재물에 대적 마귀가 휘파람을 불며 재를 뿌리게 합니다.
경쟁심의 불안한 긴장 속에 있을 때에 마음을 밝혀 주는 짧은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손뼉을 쳤습니다. 왜곡된 경쟁심에서 조금이나마 헤어 나 올 수 있는 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금간 물동이
『인도의 한 물지게꾼에게 커다란 물동이 둘이 있었습니다. 물동이는 그의 목에 걸린 지게 양 끝에 하나씩 달려 있었습니다. 한 물동이는 성했으나 다른 물동이는 금이 가 있었습니다. 우물가에서 주인의 집까지 먼 길을 걸어오면 성한 물동이에는 언제나 물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금간 물동이에는 물이 반밖에 없었습니다. 꼬박 2년 동안 물지게꾼은 날마다 한 동이 반밖에 물을 나르지 못했습니다.
성한 물동이는 소기의 목적을 훌륭히 완수했기에 자기 실적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금간 물동이는 소임을 절반밖에 다할 수 없어 슬펐고 자기 흠이 부끄러웠습니다. 쓰라린 실패처럼 느껴진 2년을 보낸 어느 날, 불행한 물동이가 우물가에서 물지게꾼에게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내가 부끄러워요, 당신께 사죄하고 싶어요.” “왜?” “무엇이 부끄러운데?” 지게꾼이 물었습니다. “주인님의 집까지 가는 동안 금간 옆구리로 물이 새는 바람에 지난 2년간 나는 물을 절반밖에 나르지 못했어요. 내 흠 때문에 당신은 고되게 일하고도 수고의 덕을 다 보지 못하고 있어요.” 물동이가 말했습니다.
물지게꾼은 금간 낡은 물동이가 딱하고 가여워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 있다 주인님 집으로 돌아갈 때 길가의 예쁜 꽃들을 잘 보거라”
언덕을 오를 때 금간 물동이는 정말 길가의 아름다운 들꽃들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햇빛에 빛나는 꽃들을 보며 물동이는 약간 기운이 났습니다. 그러나 집에 와서는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절반의 물이 새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동이는 지게꾼에게 다시 자신의 실패를 사죄했습니다.
지게꾼은 물동이에게 말했습니다. “꽃이 반대편 물동이 쪽에는 없고 네 쪽에만 있는 것을 보았니? 내가 늘 네 흠을 알고 잘 활용했기 때문이란다. 나는 네 쪽 길가에 꽃씨를 심었고 우리가 우물가에서 돌아올 때마다 네가 꽃씨에 물을 주었지. 2년 동안 나는 예쁜 꽃을 꺾어 주인님 식탁을 꾸밀 수 있었단다. 네가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주인님은 이렇게 아름답게 집을 꾸밀 수 없었겠지.”』
팽팽한 경쟁심으로 평안이 없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1.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제대로 보게 되면 경쟁심을 벗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쟁심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듭니다. 경쟁 대상을 넘어서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 이상의 다른 것을 못 보게 합니다. 내가 알기도 전에 경쟁하는 그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 되고, 내 운명을 결정지어버립니다. 그것에만 나의 만족과 기쁨이 있고, 삶의 의미가 거기에만 있게 됩니다. 또 그것이 내 삶의 실패와 성공의 기준이 되어버립니다.
물동이는 자기의 존재 목적이 오직 우물에서 집까지 물을 길어 오는 데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이 목적을 훌륭하게 감당하는 다른 쪽의 물동이에 비해 자기는 실패자인것을 보았습니다. 남처럼 훌륭하게 해내지 못하니 스스로가 부끄럽고 죄송한 것입니다. 금간 물동이는 자기가 만들어 낸 좁은 운명에 갇혀 자신을 향한 지게꾼의 큰 뜻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을 통해 길가의 잠자는 꽃씨들에게 생명을 키우는 멋진 목적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좁아진 시야는 곧 우리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들 모두는 스스로가 정해놓은 인생목표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달려갑니다. 그러다가 계획이 실패하고, 바램대로 되지 않을 때 스스로 낙오자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들이 세운 목적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거의 모두가 남들에 비해 더 우월해 지려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주위의 경쟁자들이 목적삼아 달려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그 경쟁대열에 휘말려 뛰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쟁이 삶의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남보다 앞서가면 행복했다가는 조금이라도 못하다 싶을 땐 금세 불행해지고 못난 자신을 책합니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 그렇게 수고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이들을 그렇게 공부로, 학원으로 몰아세우는 것도 결국은 무슨 목적 때문입니까? 우선 남보다 앞서가야 마음이 놓이고, 남보다 안정적인 경제생활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삶의 환경도 남들보다 나아야 만족이 되고, 집과 자동차도 그렇고,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경쟁에서 한발이라도 앞서 나가야 마음이 놓입니다. 뒤처지면 스스로 실패자란 낙인을 자신에게 가차 없이 찍어 버립니다.
주를 향한 섬김에 있어서 여러분들의 목적과 기준은 무엇입니까? 단지 저 집사님보다 더 많은 섬김, 그 보다 뛰어난 신앙적 열매를 보는 것입니까? 다른 지체들에 비해 능력이 떨어지고, 열매가 부족하고, 듣는 칭찬이 적을 때 낙심이 됩니까? 보다 우월하진 않지만 적어도 비슷한 수준까지는 가야 만족이 되십니까? 신앙의 경주에서 조차 누구에게 뒤처지지 않는 것이 목적의 전부라면 그것은 참으로 피곤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목적삼아 애쓰고 있는 것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앞서 갈려는 생각으로 너무나도 제한된 좁아진 시야에서 세워진 것들입니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으니깐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보이는 게 이것이니 이것이 전부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란 걸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우리는 금간 물동이만큼이나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우리 자신을 맡길 때 자기비하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경쟁을 넘어서는 깊고 넓은 삶의 목적을 볼 수 있고, 담대히 앞으로 전진 할 수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예레미야 29:11]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33:3]
경쟁에 떠밀린 좁아진 시각으론 볼 수 없었던 평안과 장래의 소망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지금 내가 목적삼고 있는 것 그 이상의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내 주위를 둘러싸서 경쟁적으로 나를 떠 밀치는 것들에 시선을 차단당하지 마십시오!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십시오. 거친 숨을 내쉬며 정신없이 달려가는 치열한 삶의 경쟁 속에서 가만히 빠져 나오십시오. 그리곤 위를 보십시오. 숨차서 보지 못 했던 하늘을 보십시오. 하늘의 아버지가 날 향해 가지고 계신 보다 깊고 넓은 아름다운 목적을 보여 달라고 그분께 말씀드리십시오. 거친 경쟁의 하루에서 멈추어 서서 가만히 그 앞에 나아가 말씀을 펼치시고 물으십시오.
“오! 하나님 제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제 삶에 허락한 하나님의 목적의 전부인가요? 전 알고 싶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목적 보고 싶습니다. 이 제한된 숨 가쁜 삶의 경쟁에서 저를 자유케 해주십시오.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소리에 귀를 닫게 해 주십시오. 내 눈을 열어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의도와 계획을 보게 해 주옵소서!”
장애가 있는 나의 아이에게도 있을까요? 있고말고요. 힘든 질병으로 내일에 대한 소망이 거의 없는 나의 삶에도 남아있을까요?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엉도요? 이것밖에 안 되는 내 모습 인데도요? 온 세상이 다 없다고 말해도 하나님은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아름다운 의도를 반드시 가지고 계십니다.
비로소 물을 긷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꽃들에게 생명을 주는 멋진 목적이 금간 물동이에게 있었다는 것을 나도 보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실 때 무능력감과 실패자란 자기비하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됩니다. 나의 눈이 열려 전혀 새로운 의미의 목적을 보며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금간 물동이가 다음날 우물가에서 돌아올때의 그 기쁨과 환희가 상상이 되십니까? 부끄러움이 자랑으로, 죄책감이 감사의 제목으로 바뀌었습니다.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알게 될 때에 우리의 삶에도 하늘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2. 경쟁심을 인한 비교의식을 벗어 버려야만 하나님이 의도하신 ‘나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금간 물동이가 부끄럽고 슬펐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을 성한 물동이에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비교하지 않았다면 자기가 본연의 모습 그대로임을 알고 행복했을 것이다. 이 금간 물동이처럼 슬프게도 우리 대부분은 비교를 통한 경쟁 속에서 줄곧 자라왔습니다.
걷고 뛰는 것, 말문을 트고 글을 깨치는 것에서부터 남과 비교됩니다. 집안과 밖을 가리지 않습니다. 비교의 칼날 앞에 쓰라린 상처를 안고 소리 없는 신음을 토해냅니다. 고학년이 될수록 비교는 더욱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삶을 멍들게 합니다. “너에게 남 보다 못 해 준 게 뭐가 있니, 왜 남들보다 못하니? 어디 말해봐!” “제발 그만 좀 하세요. 난 나란 말이예요! 그냥 있는 대로 봐 주시면 안 돼요? 성적이 다는 아니잖아요!”
아이들은 차라리 소리치고 항변할 부모라도 있지요. 다 말하지 않을 뿐이지 이 땅의 수많은 아버지들은 더욱더 날카로운 경쟁과 비교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절망하고 괴로워하며 자신을 자책합니다.
우리의 거의 모든 가치가 이처럼 비교라는 기준을 통해 매겨 집니다. 삶의 의미와 행복도, 자신의 존재가치도 그렇습니다. 이 같은 모든 비교의 기준은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들의 연약함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하나님의 마음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기준으로 자신의 가치를 측정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특별히 신앙의 여정에서 비교의식이 가져오는 악영향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영적인 빈곤함을 초래하고, 성도를 향해서는 친밀한 관계의 상실성을 가져옵니다. 무엇보다도 악한 것은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영적으로 아주 뛰어난 사람이 먼 곳에 있으면 편한 맘으로 찬사를 보낼 수 있습니다. 비교대상이 되질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게 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즉각 비교시스템이 작동 됩니다. 이 기준에 따라서 자신의 가치를 매깁니다. 대게는 자신이 보잘것없다는 비참한 느낌에 빠져서는 “왜 나는 이 사람처럼 되지 못하고 저 사람처럼 하지 못할까?”라며 자기비하를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향해 왜 너는 이 사람처럼 되지 못하니? 왜 넌 저 사람처럼 하지 못하니? 묻지도 추궁하지도 않으십니다.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민들레꽃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태양의 밝은 빛을 기준으로 달과 별의 가치를 판단하시지 않으십니다. 독수리의 용맹함을 기준으로 비둘기의 가치를 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왜요? 자신을 장미꽃으로, 민들레꽃으로, 독수리와 비둘기로 각각 완벽하고도 아릅답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들판의 이름 없는 꽃들 그 어느것 하나도 정원의 장미꽃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그 모습 그대로 애쓰며 감사하며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들판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타락한 아담의 자손인 사람만이 비교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창3:5)는 사단의 유혹으로 죄가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비교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비교는 인생을 타락으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그 능력을 변함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처럼 되지 못해서 슬퍼하게 하고 이 사람처럼 하지 못해서 낙심에 빠지게 합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각각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다른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십니다. 이름 없는 들꽃이 저마다의 꽃을 피워내듯이 우리들 모두는 저마다 애쓰고 꽃 피워야 할 열매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원래 목적하신 나 자신이 되어라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참 가치와 행복, 만족과 자유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나 자신이 되는데서 시작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고백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나의 달렬 갈 길을 달렸습니다. 바울은 바울의 길을 달렸고, 우린 저마다 다른 각자의 길을 달려가야 합니다. 바울에게 달려갈 길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각자가 달려갈 길을 저마다에게 주십니다. 그 길을 가면 됩니다. 내가 바울의 길을 갈려면 안 됩니다. 내가 저 집사님의 길을 갈려해도 안됩니다. 그러면 경쟁하게 되고, 비교하게 되고, 교만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는 악순환을 계속하게 될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한 이름 없는 전도자는 길모퉁이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답니다. 네 자신이 되어라! 네 자신이 아니면 너는 너 아닌 존재가 된다.
왜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바울을 기준으로 나의 믿음의 길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엘리야의 능력을 기준 삼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나를 나로서만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처럼 능력이 없다고 자신을 책하지 마십시오. 저 사람처럼 잘 하지 못한다고 슬퍼하지도 마십시오. 내 삶이 화려하지 않다고, 내 세울게 없다고 고개 떨구지도 마십시오. 더 이상 자기 연민과 자기 비하에 빠져 자신을 혐오하며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조용히 여러분의 뒤를 돌아보십시오. 나의 금가고 부족한 것 때문에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에겐 없는 나의 눈물이 있었기에 지금 하나님 앞에 와 있는 것 아닙니까? 저 사람에겐 없는 약한 게 많았기 때문에 마음이 낮아진 것 아닙니까? 깨지고 금간 이 모습이 내 모습이었기에 지금 은혜의 빛 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가장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길을 밝혀 보여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이 너를 향한 너만의 길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길 바랍니다. 남과 비교하지 않는 나 자신이 되어 힘 있게 달려가십시오. 그 길에 기쁨이 있고, 하늘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 길가에도 아름다운 꽃들이 수도 없이 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길을 달려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충만하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목사님 저를 좀 보세요. 저에겐 치명적인 신체적 흠이 있습니다. 도무지 극복되지 않는 지적인 한계도 있습니다. 정서적 아픔과 환경적 약점이 있구요. 더군다나 영적인 상처가 아직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온갖 상처와 아픔으로 금가 있는데 어떻게 잘 달려갈 수 있을까요? 나도 최소한 남들처럼은 기본적인 뭔가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중엔 인생의 상처를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아픔이 많고 인생의 금간 분들이 많이들 있습니다. 어느 한사람도 온전한 분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바울의 지적대로 우리 중엔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고, 능력 있는 자도, 문벌 좋은 자도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적인 기준으로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고 없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참 오묘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십니다.”(고전1:26-28)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의 은혜로 부르심에 있어서 세상적인 기준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원리는 구원의 부르심 뿐아니라 성도의 삶의 원리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신앙의 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은 약한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미련한 우리를 더 지혜롭게 만들어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천한 자들과 멸시 받는 자들을 더 존귀하게 만들어서 있는 자들을 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지금 약한 나를 통해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가난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부하심을 나타내십니다. 여전히 미련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증거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나의 지혜와 힘과 부가 되어주시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약하고, 흠이 많고, 부족한 게 많지만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얼마든지 그 모습 그대로, 약한 그대로 너의 달려갈 길을 충성스럽게 성공적으로 달려갈 수 있다 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충만이 되어 버리셨습니다. 약해 넘어지면 친히 나를 안고서라도 충만케 하십니다. 우리가 약하면 약할수록 더욱 하나님은 강하게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 이니라” [고후 12:10]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약할 때 강해지는 자들입니다.(고후12:9)
금간 물동이는 약점이 곧 강점이 되었습니다. 생명의 꽃을 피우고 주인의 기쁨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는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우리의 죄까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고백하게 했습니다.
금간 곳이 많으면 많을수록, 부족한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은 가까이서 도우십니다. 나의 약점과 가난함에 놀라지 않으십니다. 다함없는 사랑으로 다가와 모든 모자람에 충만이 되어 주십니다. 이 사랑은 결코 변질되지 않습니다. 나의 약점과 나의 실패로 스스로조차 내가 미울 때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내가 너의 강함이 되어주마, 내가 너의 부함이 되어주마, 내가 너의 지혜가 되어 주겠다’ 하십니다. 이 사랑을 신뢰하며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를 성령으로 부르시고 자녀 삼으셨을 하나님은 친히 부족한 우리의 충만이 되어 주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제대로 보는 성도,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나 자신이 되기를 힘쓰는 성도, 하나님이 친히 나의 충만이 되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단의 전령인 경쟁심을 몰아낼 수 있는 하늘의 비밀 병기입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신다.”
원수가 넘어지고, 대적이 엎드러질 때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단지, 즐거워하지 말고, 마음으로라도 기뻐하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은 흡족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축복의 기도는 원수를 친구로 만들고, 핍박하는 자를 선한 이웃으로 변화시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축복의 기도는 어느새 경쟁자와 비교의 대상이 되어버린 나의 동료와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는 통로가 되지 않을까요? 되고말고요! 축복의 기도는 온갖 시기심을 가져오는 사단의 전령인 경쟁심을 몰아내는 하늘의 비밀 병기입니다.
마이어 목사의 기도
영국 런던에 아주 유명한 목사님 세 분이 계셨습니다. 한 분은 그리스도 교회의 목사님인 F.B 마이어라는 분이며, 또 한 분은 기독교 역사상 제일 설교를 잘 하시는 침례교회 스펄젼 목사님이며,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캠벨 몰간 목사님이십니다.
몰간 목사님이 잠시 미국에서 사역하다가 영국으로 돌아와서 웨스트민스터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이어 목사님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몰간 목사님이 미국에 있을 때는 그를 위해 기도하기 좋았는데 같은 도시에서 일하게 되니깐 그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이어 목사님은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 속에서 이 시기와 질투를 없애 주옵소서" 아무리 기도해도 그 시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마이어 목사님께 이런 음성을 들려 주셨습니다. "네 기도를 바꾸어라. 질투를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라"는 음성이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스펄전 목사님과 캠벨 몰간 목사님과 그 교회들을 축복해 주시옵소서"
마음속에 평안과 기쁨과 자유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자기 교회의 공개기도 석상에서 마이어 목사님이 이런 유명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몰간 목사님의 교회를 축복해 주셔서, 사람들이 메워지도록 해주시고, 들어갈 자리가 없거든 우리 교회로 보내 주시옵소서."
아! 정말 멋진 기도입니다. 네가 넘어져야만 내가 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너를 축복하며 그 축복이 나에게 흘러오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 하십니다”
상대방을 축복하는 것은 사단의 전령인 경쟁심을 막아내는 진리의 방패입니다. 경쟁자가 아닌 사랑하는 지체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서로의 모습과 사역 속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경쟁심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사단의 전령입니다. 경쟁심의 유혹에 마음을 내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비교의식을 넘어서 하나님이 만드신 참 아름다운 나 자신이 됩니다. 그리고 이미 내속에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성령과 말씀 안에서 하나님 자신으로 주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단의 전령이 경쟁심을 넘어 저마다의 달려갈 길을 힘 있게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문성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