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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신 하나님 (창 3: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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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신 하나님 (창 3:6-15)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아주 작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동산’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해봐야 두 명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한 사람은 남자고 다른 한 사람은 여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책임을 주셨습니다.
그 책임은 그곳을 잘 다스리고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스린다’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 있는 동물들을 잘 돌보아주고 거기에 있는 땅을 경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동산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이 작은 동산은 그냥 동산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었고, 이 작은 나라는 이 세상의 모든 운명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나라였습니다.

이 나라의 주인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의와 정의가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사람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가장 높은 자리에서 청지기로서 거기에 있는 동물들을 잘 돌보아주고, 또 거기에 있는 땅을 경작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에는 법이 있었고, 언약이 있었습니다.
그 작은 동산은 하나님의 나라였기에 하나님의 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두 그루의 나무로 표현하셨습니다.
창 2:9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나무는 하나님의 약속을 새겨놓으신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최초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 가운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이 나무와 열매를 따먹는 행위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의도를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창 2:16절, 1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성도여러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자체에 무슨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생명나무처럼 이것도 평범한 나무였습니다. 그냥 보기에 좋고 먹음직한 열매를 맺는 나무였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나무를 통하여 우리 인간 마음속에 있는 의도를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느냐 거역하기를 원하느냐 하는 그 의도를 나무 열매를 따먹는 행위를 통해서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은 처음에 이 작은 나라의 청지기로 만족했습니다.
모든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 교만과 욕심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을 이 나라에서 몰아내고, 이 나라를 아담과 하와의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귀의 유혹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은 의도적인 반역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따먹은 것이 아닙니다. 호기심으로 따먹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그 나라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그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속에 있는 악한 생각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목숨을 잃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생명력 있는 교제가 영원히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창 3:6-7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아담과 하와는 드디어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자 곧바로 몸과 마음에 변화가 왔습니다.
마음에는 두려움이 찾아오고, 몸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옷이 벗겨짐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수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과 수치심이 몰려오면서 그들은 끝없는 절벽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본문 8-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범죄 한 사람을 찾아오셔서 질문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질문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질문하시는 것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고 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겼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이 세상에서 죽도록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이나 죽도록 하라고 우리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한 가지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며, 하나님을 가장 중요한 분으로 모시고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제쳐놓은 채 자기 기분과 생각에 따라 많은 일을 벌여놓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표현되는 장이되고, 그 관계가 연장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없이 벌이는 많은 일들은 하나님 앞에 무의미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죄가 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Ⅰ.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첫 번째는, 죄를 지은 인간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일반적인 은혜와 특별한 은혜로 구분해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특별 은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직접 주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성품을 직접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기쁨을 나에게 주시고, 나에게 말씀하시며, 나를 택하셔서 아들로 삼으시고 변화시키는 것을 특별 은혜라고 합니다.
반면에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것을 일반 은혜라고 말합니다. 시간, 공기, 물, 자연 등, 이것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일반 은혜에 속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불순종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금방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지금까지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자 그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져 버리고 알몸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라는 것은 실제로 눈이 밝아졌다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렸다는 것입니다.

시력이 향상되어 더 잘 보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사람은 그들의 몸에 하나님의 영광을 옷처럼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벌거벗은 줄 몰랐습니다. 자기 몸이 수치스러운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나니까 그 영광이 금방 사라져 버리고 알몸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순수하고 고귀한 영적 순결을 잃어버리자 자기 몸이 수치스러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지자 그들은 견딜 수 없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두려웠고 수치감에 떨었습니다.
나뭇잎으로 대충 가리긴 했지만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런데 비록 인간은 하나님의 곁을 떠나 범죄 하였지만, 하나님께선 그들을 포기할 수 없으셨기에 그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예전 같으면, 하나님의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시간이 그들에게 가장 복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난 후에 그 시간은 가장 두려운 시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까지는 그 시간이 가장 기뻤는데 이제는 가장 낯선 시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장 어색한 시간, 가장 두려운 시간, 가장 가기 싫은 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거부하며, 하나님 만나는 것을 낯설고 어색하고 거북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특별한 임재를 알았으면서도 마음의 문을 닫고 숨어 버렸습니다.

Ⅱ. 두 번째로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질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본문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존전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마음에 거부감과 어색함이 있었습니다. 마음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임재하는 현상을 알고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을 알면서도 숨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소리를 못들은 체 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계속 아담을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그 숨은 자리에게 나오기까지 “아담,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하고 계속 찾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아담을 그렇게 찾으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찾아오시고, 아담을 부르십니까?
하나님을 피해서 숨어 있는 아담을 내버려두지 않고 왜 찾아오셔서 아담을 부르고 계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관심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면, 아담은 거기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뿐만이 아니라 모든 아담의 후손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는 영원히 단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숨어 있는 아담을 찾으셔서 그들의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시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 소망을 보여주기 위해 아담을 찾아오셔서, 아담을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신 것은 그를 책망하고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만약 멸망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숨어 있게 내버려 두면 아담은 자동으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영원히 죽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대로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을 찾아오시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시고 숨어 있는 곳에서, 멸망의 그늘진 곳에서, 질병과 고통의 자리에서 나올 때까지 계속 그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풀이를 하거나 우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시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 소망을 보여주기 위함인 줄로 믿습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이 모양 그대로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제발 오늘은 날 건들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목사가 찾아오는 것도, 목사가 전화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을 때 아담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의 대답은 참으로 이상한 대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신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의 대답은 핵심을 놓친 대답이었습니다. 본질적인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에 그의 죄를 고백했어야 했습니다.
그에게 왜 수치와 두려움이 왔는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에게 무엇이 문제입니까?
오늘 우리에게는 몸에 병이 든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업이 어렵게 된 것이 중요한 문제이고, 먹고 사는 것이 훨씬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였습니다.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교만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던 불신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본문 11절에서 하나님은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지적하고자 하셨던 핵심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였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고 내 영역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내 멋대로 하려고 한 교만이 문제였고, 몸이 이렇게 변해버린 것은 거기에 따라오는 결과에 불과했습니다.

아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자고 했을 때 그것을 제지하지 않은 것은 남편의 책임입니다. 아내가 하는 말이라고 해서 다 들어서는 안 됩니다. 아내가 범죄 하려고 할 때 막지 못한 책임이 아담에게 있었고, 아담도 동일한 마음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죄 문제를 두고 말씀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남의 물건을 빼앗을 때 그것은 그 사람에게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을 때에 그에게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범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타난 증세만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기도하려고 해도 시간이 없고, 피곤해요.
►아이를 돌보아야 하지요. 직장의 일 때문에
►사업을 꾸려가기가 여긴 힘든 게 아니에요.
►왜 이렇게 교회가 사랑이 없는지 모르겠어요.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없고, 내가서야 할 자리도 없는 것 같아요.
►오늘 이 교회에서 나라는 존재가 이것밖에 안 돼요?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나타난 증세만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십니다.

►지금 너의 마음속에서 내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느냐?
►너의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자가 누구냐? 나 하나님이냐, 아니면 그 일이냐? 그것이냐?

명목상으로는 좋은 교인입니다. 흠잡을 떼가 없어요.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제멋대로 살고 있어요. 그러다가 병들거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벌거벗었으므로 숨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벌거벗은 것은 결과입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님을 마음속에서 몰아내고 있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있었어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헌신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와 본질적인 문제를 두고 말씀을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서 가장 높은 곳에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확인하려고 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세타령을 듣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핑계를 듣고 싶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으며,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에 있으며,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그 하나만을 확인하고 싶어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여러 핑계와 신세타령 가운데서 분명한 한 가지를 확인하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몰아내고, 무시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겼고, 내 교만과 방종한 삶을 통해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께 상처를 드렸으며, 하나님 앞에 회복해야 할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고통의 원인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닙니다.
몸이 이상하게 변해버린 것이 아닙니다. 병든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살 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몰아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중요한 하나님은 놓치고 주변적인 것들만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수치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던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과 수치와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많은 어려움과 고통과 수치와 두려움의 원인을 깨닫게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 수 있는지 소망을 보여주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본질적인 문제는 바로 죄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경은 요일 1:8-9절에서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죄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 1:7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 죄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은혜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 중심에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말씀에 철저히 헌신해야 합니다.

생명주시니 하나님이요, 능력 주시니 하나님이요, 우리의 풍성한 삶을 약속하신 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영광 위하여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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