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세 가지 토대 (갈 5:5-6)
본문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으로서 로마서와 더불어 구원의 진리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사도가 이 편지를 쓰게 된 배경은 이와 같습니다. 당시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에 의해서 소아시아의 갈라디아 지역에 이방인들이 중심이 된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들의 신자들은 지난날에는 우상숭배에 젖어서 살던 이방인들이었지만 이제는 복음을 믿어 나날이 그 믿음이 자라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죄에서 구원받은 데 대한 기쁨과 그들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유대로부터 온 어떤 자들이 사도 바울을 험담하며 그가 전해 준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받는다고 한 바울의 가르침은 틀린 것이며,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를 믿는 것 외에도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갈라디아 교인들은 큰 혼란에 빠졌으며, 개중에는 이 율법주의자들의 말을 곧이 믿고 따르려는 자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수를 기록한 이 서신을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교회에 보냈습니다.
집을 짓는 데는 토대가 매우 중요합니다. 튼튼한 토대 위에 세운 집은 태풍이 불어와도 끄떡하지 않지만, 부실한 토대 위에 세운 집은 바람이 조금만 강하게 불어도 기울거나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시험의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림 없으려면 신앙의 토대가 온전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는 " 5)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에 근거해서 기독교 신앙의 세 가지 토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함으로 성도님들과 더불어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의 신앙은 성령의 역사를 토대로 삼아야 합니다.
본문에“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라는 표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또는 "성령을 통해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진 믿음에 의해서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람들이 만든 어떤 종교 이론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님에 의한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은 학식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이 많든 적든 간에 사람의 능력으로는 복음을 들어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이동풍(馬耳東風), 또는"쇠귀에 경 읽기"라는 말이 이런 경우를 뜻합니다. 심오한 철학을 논하고 과학적 지식에는 해박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캄캄절벽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성적이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이는 차원이 다른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철학이나 과학은 이 땅에 속한 학문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구원의 도리는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을 때, 그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 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말씀을 알 수 없었으므로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백성들을 가르치던 랍비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71인으로 구성된 당시 유대 최고 종교재판소인 산헤드린의 의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가르치던 선생이었지만 거듭남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셨을 때, 어떤 사람들이 그 이튿날에도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어제 기적을 행하셨던 곳에 갔다가 예수님이 없자 여러 척의 배를 나누어 타고 갈릴리 건너편으로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정말로 열성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반가워하며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습니까?"라고 문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찾아온 이유를 아셨으므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3)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기적의 떡을 자주 얻어먹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떡은 육신의 배를 부르게 하는 데 효과가 있지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 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떡에만 관심이 있었지, 예수님을 통해서 영혼의 구원을 얻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들에게 예수님은 단지 놀라운 기적을 행하여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구원을 받는 데 인간의 자질이나 능력이나 수단 방법은 아무 쓸 데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우리의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 곧 성령이시며 육은 무익합니다. 이렇게 볼 때,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주의를 강요했던 자들은 성령과는 상관없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복음을 믿게 된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눈을 열어주셨기 때문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는 기독교 신앙을 혼잡하게 만들려고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항상 성령을 힘입어 악한 자들의 미혹을 물리치고 순수한 신앙을 지켜나가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토대로 삼아야 합니다.
사도는 말씀하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혼란하게 만들었던 자들은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는 줄로 알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위에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므로 그 성격이 거룩하고 온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시면서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 18: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게 되어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치명적인 문제는 사람으로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로 율법을 지켜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율법에 "살인하지 말라" 고 하신 계명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살해한 적이 없으니까 이 계명을 잘 지켜왔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는 일반적인 법률상식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21)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에 보면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살인죄에 대한 성경의 해석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계명이 있습니다. 이 역시 우리는 실제로 간음한 적이 없으므로 잘 지켰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 27)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고 하셨습니다.
국가의 형법은 실제 행위가 있어야 죄가 성립되지만 하나님의 법인 율법은 실제 행위 뿐 아니라 악한 생각만 해도 율법을 범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이는 인간의 행위는 그 생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지 않았는데 간음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먼저 마음속에 생각이 자리 잡은 다음에 그것이 행위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볼 때, 율법을 지켜서 의인으로 인정받을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죄인들을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가 지은 죄가 얼마나 크고 흉악하던지 간에 흰 눈같이, 양털같이 정결하게 씻겨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는 이 같이 말씀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목적이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의롭다는 인정을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을 얻을 목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의롭게 되었고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되 구원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 받은 성도다운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시대나 지금이나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은 율법주의로서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의 진리를 거역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는 이 같이 말씀합니다. "2)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
율법주의자들은 죄인들을 대속하기 위해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토대로 삼은 신앙으로 무장하여 율법주의의 미혹을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을 토대로 삼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니, 구원을 얻는 믿음을 가리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이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사랑과 믿음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있지만 사랑은 없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였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죄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식이 자기를 낳아서 길러주신 부모님의 사랑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비웃는다면 어찌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면 어찌 심판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들을 비롯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친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하기를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일 3:1)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사랑을 알 때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길로 나가는 일이 생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라고 했던 다윗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의 사랑은 거짓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일서 5장 1절로 2절에는 "1)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2)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합니다. 요한일서 4장 11절로 12절에 "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 안에서 지체 된 성도들을 사랑합니다. 성도들은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형제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 안에서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형제 사랑이 점점 식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고통당하는 형제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14절로 19절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4)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15)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18)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저는 우리 교회가 교인수가 많아서 유명해 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예배당 건물이 아름답고 웅장해서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교인 가운데 사회 유명인사가 많아서 알려지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형제 사랑이 충만한 교회로 소문이 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는 사랑의 결핍으로 괴로워하는 형제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관심을 갖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같은 구역 식구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열심내지 못하는 형제를 보거든 모른 체 할 것이 아니라 찾아가 권면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병든 형제가 있거든 자주 찾아가 위로하고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제를 보고 외면하지 말고 돕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의 형제들을 친절하게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사랑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가장 흔한 단어가 사랑이면서도, 진실한 사랑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사랑의 결핍으로 인해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병들고 생활이 병들어 갑니다. 테레사 수녀는 말하기를 "나는 어떤 알코올 중독자가 어느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술에 빠져 들었다고 한 얘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 받지 못한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방탕한 생활에 탐닉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랑의 결핍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해도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이들은 그 표정이 밝습니다. 가난해도 서로 사랑하는 부부는 행복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남에게 사랑을 나누어줄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신으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참되다고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가진 의는 율법을 지켜서 얻은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문화와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어떻게 변할지라도 아니, 천지가 없어질지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복음의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언제나 성령을 힘입고,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예수 그리스도 위에 토대를 둔 믿음으로 무장하여 율법주의와 세속주의의 도전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