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예배 훈련 (요 4:23~24)
본문
교회는 훈련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훈련받는 장소이며 교회는 그 자체가 훈련입니다. 칼빈은 교회를 훈련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의 광야생활은 교회의 모델입니다. 스데반은 사도행전 7장에서 이를 광야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의 광야생활을 주신 것은 훈련받게 하신 기간입니다. 훈련이 없이는 결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훈련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교회가 쇠퇴할 때마다 나타나는 증세가 있다고 합니다. 교회가 쇠퇴할 때는 회의를 예배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예배해야 할 사람들이 예배를 소홀하게 생각하면 교회가 쇠퇴하게 되는 징조입니다. 교회보다 기관이 발달하는 것도 교회 쇠퇴의 증세라고 합니다. 교회가 가장 발달하고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기관이 발달하면 이 또한 쇠퇴의 징조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목적은 예배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하나님께 대하 제사인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교회가 교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장하는 교회의 특징들을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는 끊임없는 복음전파의 열정을 가진 교회입니다. 둘째는 복음적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입니다. 셋째는 예배의 역동성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어느 때나 성장했습니다.
예배란 말은 구약에서 히브리어로 ‘아바드’라고 합니다. 이 말은 ‘봉사’ 혹은 ‘섬김’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굴복하다’, ‘엎드리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라고 합니다. 이 말은 ‘경배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틴어에서는 ‘라트레이아’(latreia)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섬김’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예배의식’(liturgy)이란 단어의 어원입니다. 예배의 어원을 보면 한결같이 섬김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일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깁니까?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핵심 목적은 제사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배하게 하려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32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영과 진리 안에서’(in spirit and in truth)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려면 예배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예배의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의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예배의 의미, 목적, 내용을 알고 예배할 수 있도록 잘 훈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 훈련을 통하여 가장 중요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배는 가장 중요한 명령입니다.
이사야 66:23에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 예배는 선택이 아닙니다. 시간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하고, 피곤하면 안하고, 힘들면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예배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과 피곤해도 예배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예배입니다. 오히려 힘들고 지치면 교회에 와서 예배해야 합니다. 피곤하여 도저히 못 나오겠다 싶을 때에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힘들고 지칠 때에 예수님께 나와야 쉼을 얻습니다. 힘을 얻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누가 주말에 제일 힘들 것 같아요? 바로 접니다. 주말이면 긴장이 되고 주일 예배 시간에도 초긴장 상태입니다. 다른 날은 몰라도 주말에 만일 힘들고 피곤하여 못 나온다면 저부터 안 나와야 합니다. 예배는 누구나 다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46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하였습니다. 47절에는 “하나님을 찬미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예배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이유, 모여서 한 일은 성전 예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예배가 목적이었습니다. 잘 훈련된 성도의 예배하는 모습입니다.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불러 모으다’라는 뜻입니다. 모임은 여러 가지 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누가 “왜 예배에 빠지지 않습니까?”라고 우리에게 물으면 우리는 분명히 대답해야 합니다. “예배는 반드시 해야 할 구원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니까”. 예배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훈련이 잘 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배는 가장 중요한 훈련입니다.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합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는 잘 훈련되고 정제된 예배입니다. 군인이 훈련받는 것을 보세요. 군사훈련은 내 몸에 베어 내 것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훈련을 실전같이 합니다. 훈련은 내가 살고, 아군이 이기기 위한 훈련입니다. 저도 군에 있을 때 모범헌병이었습니다 표창도 받았습니다. 우리 부대의 숫자로 암호를 푸는 음어병이었습니다. 음어 경연대회에서 1등하여 포상휴가도 갔습니다. 그런데 이 훈련을 할 때는 머리 속에 숫자밖에 없어요. 전심으로 집중하여 훈련합니다. 그래야 빨리 음어를 풀 수 있습니다. 늦으면 내가 죽습니다. 아군이 집니다. 훈련은 생명입니다. 교회의 훈련도 생명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훈련에 있습니다. 교회의 훈련은 우리가 살고 이기기 위한 일입니다.
고 육영수 여사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부인으로서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 도중 문세광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념의 또 하나의 희생자였습니다. 영부인은 문세광이 총을 들고 앞을 향해 뛰어가는데도 꼿꼿한 자세로 단상에 앉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영부인의 꼿꼿한 자세를 아름답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과 그 외의 요인들은 다 엎드리거나 피했는데 영부인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볼 때는 군사훈련이 되어 있는 대통령과 다른 요인들은 반사적으로 엎드렸지만 영부인은 그렇지 못했다고 봅니다. 훈련되지 않으면 머리가 알면서도 몸이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훈련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진 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진이 나면 테이블이나 책상 밑으로 몸을 숨기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면 지진에 대비한 훈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진이 났을 때에 분명히 머리는 알고 있었는데 “어어”하다보니 몸은 숨기지 못하고 지진이 지나갔습니다. 얼른 집에 가보니 아이들과 아내는 식탁 아래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평소에 훈련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생각은 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법입니다.
로마서 12:1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합니다. 예배는 우리가 드릴 몸의 훈련입니다. 몸을 드리는 것이 훈련입니다.
예배하는 자는 몸을 드리는 자입니다. 예배하는 자는 헌신하는 자입니다. 예배는 헌신입니다. 그리스도인 삶은 전적인 헌신입니다. 몸은 자꾸 써야 좋아집니다.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배하는 자가, 교회에 열심이 나오는 자가 그렇지 않은 자보다 건강한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영국 명 재상 글레드스톤은 “나에게는 예배석이 대영제국의 수상석 보다 더 존귀하다”고 하였습니다. 예배의 자리는 세상에서 어떤 자리보다 더 귀합니다. 예배의 자리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 축복이 됩니다. 예배의 자리는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예배훈련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겠습니까? 첫째는 예배에 참석하는 훈련입니다. 예배는 절대로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은혜받기를 사모하는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는 앞자리에 앉는 것이 좋습니다. 음악회에 가면 항상 제일 앞자리 좋은 자리는 비싸고 뒷자리는 싼데 왜 교회는 로얄석은 안 앉고 일찍 와서 뒤쪽 C석에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둘째는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훈련입니다. 예배의 모든 순서가 함께 참여할 순서입니다. 예배 시간에 구경꾼은 없습니다. 모든 예배자가 하나님께 능동적인 자세로 나가야 합니다. 셋째는 기도와 찬양과 봉헌 등 모든 순서에 의미 있게 참여하는 훈련입니다. 장로님께서 기도하시고 나는 듣는 시간이 아닙니다. 나도 함께 참여하는 기도입니다. 찬양대는 찬양하고 나는 감상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내가 찬양하는 시간입니다. 봉헌은 정성으로 해야 합니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 드리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꺼내 온전히 드리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훈련입니다. 교제가 없는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서로 인사하는 시간은 중요한 예배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일주일 내내 예배의 자세로 교회 일에 협력하는 훈련입니다. 우리 예배는 주일 하루, 한 시간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는 일주일 내내 이어집니다. 교회 안과 밖에서 이루어지는 한 주간의 일들을 기억하고 기도하고 참여하는 것이 온전한 예배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예배의 훈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고,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 목적을 성취하는 과정입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예배하는 일입니다.
파가니니 이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알려진 사라사테는 사람들이 천재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사라사테는 “천재라고? 나처럼 37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14시간씩 연습한다면 누구라도 천재가 될 수 있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훈련은 천재를 만듭니다. 예배도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배의 천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북미주 대부분의 교회들은 주일 오전 11시에 예배합니다. 오전 11시에 예배를 하게 된 것은 소젖을 짜는데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교인들 중 소를 가진 사람이 더 이상 아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배는 11시에 모입니다. 예배는 오랜 전통과 훈련을 통하여 우리의 관습이 됩니다. 그러나 훈련이 습관이 되지 않고 진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경건의 연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예배가 예배의 목적과 기능을 회복하고, 주일 하루가 아닌 매일매일 일상에서 예배하는 잘 훈련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