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예수님이 필요한가? (마 9:1-8)
본문
사람들은 필요에 의해서 무엇을 찾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신에게 필요가 없으면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필요가 있는 것이면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라면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영적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까?
병들었으면서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의사를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며칠을 굶었으면서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면 큰일입니다. 음식을 찾지 않을 것이고 그는 굶어 죽을 것입니다. 며칠씩 잠도 자지 않고 쉼없이 일했으면서 피곤을 느끼지 못하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얼마 못가서 그의 몸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필요를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존재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존재여야 합니다.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한 거룩하고도 간절한 욕구가 있어야 합니다.
미국 프리스턴 신학교의 초대 학장을 지냈던 알렉산더 교수가 40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1851년 10월 22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종시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한 잔의 물이지 결코 넓은 바다의 물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 역시 온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한 분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다”
그렇습니다.
무더운 여름날에 목이 탈 때 필요한 것은 한잔의 물이지 바다의 많은 물이 아닌 것처럼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니 지금 나에게 필요한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에 충만한 그 어느것 보다도 더 간절히 더 절박하게 필요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침상에 메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 이 사람을 데려왔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① 죄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데리고 주님께 왔을 때 주님은 중풍 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성인들이 있고 훌륭한 사람들이 있지만 인간이 하나님께 지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속 죄권은 하나님께 속죄양으로 바쳐진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범죄는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에 속죄권이 그에게 있습니다.
친구들이 침상에 누인채로 데리고 온 중풍병자를 보시고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자기들끼리 말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하겠는가?” 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시고 5절에 보면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라고 말입니다.
죄를 사했다는 말을 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병든 자에게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 가라 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면 그 말은 당장에 증거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네 죄를 사했다” 라는 말을 하실 수 있는 즉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권세자임을 스스로 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함으로서 증명하신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자리에서 즉시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은 병을 고치기 위함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인간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가 주님에게만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권세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죄인 된 우리 즉 나에게 예수님은 너무도 소중하고 필요한 구제주 이십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위대한 용서를 값없이 나누어주십니다.
② 병 때문입니다.
둘째는 병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본문 2절에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병은 우리를 침상에 눕힙니다. 천하장사도 병들면 침상에 누워야 합니다. 그 누구도 세상의 권력을 다 쥐고 있는 사람도 병들면 침상에 누워야 합니다.
욥기서에 보면 병들어 고생하는 사람의 곤고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욥 7: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욥 7: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인간은 이런 질병의 고통을 당하면서 세상을 삽니다.
그런데 또 53:3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질고를 아는 분이라고 했고 4절에서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한 분....” 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즉 우리의 질고를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질고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병을 고치시는 권세가 그에게 있습니다.
병을 이길 힘을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할 것은 예수를 믿으면 아무 질병도 없다는 사상은 절대로 위험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의 육신의 질병을 통해서 마음의 병을 고치시기도 하시고 우리가 병들어 고생하는 대가를 치르게 함으로서 더 신령하고 영적이며 진정 중요한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거룩한 뜻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어도 아플 수 있고 병들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아픔과 질고를 주님께서 다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고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병 고침을 받는 실례는 성경에서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많은 분들이 체험하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질병이 칭찬과 상급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당해도 원망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질고를 참고 견디며 믿음을 지키었을 때 오히려 칭찬과 상급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질고가 죄 때문에 온 것이지만 믿는 자에게는 그 죄 값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치러졌기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 질고가 임할 때 자신을 위해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참고 인내하면 상급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병도 상급이 될 수 있습니다.
질병을 이길 힘도 질병이 상급이 되는 비결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병이 없는 사람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면 인생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③ 고독한 존재이기에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병들면 사람이 떠납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만 남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올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곁에 있어도 병든 사람은 외롭습니다. 그 병의 고통은 혼자 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문병을 와서 같이 눈물을 흘려줘도 결국 질병의 고통을 감내해야하는 것은 병든 사람 자신입니다. 그래서 병들면 고독한 것입니다.
이 고독은 인간이 지닌 근본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외로움을 하나님을 떠난 외로움입니다. 끊임없이 외롭고 고독한 것은 바로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군중 속에서 고독하십니까?
자식들 속에 있으나 외롭습니까? 수많은 친구를 사귀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과에 매여 있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소리치며 올라오는 영혼의 고독은 웬 일입니까?
시 36:9절에 보면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의 원천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을 떠날 때 인간은 근본적인 고독이 엄습하는 것입니다.
렘 17:13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우리의 소망이시고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고독함이 임하며 모든 불행과 저주가 임합니다. 그러기에 고독하고 외로운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④ 피곤하고 곤고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피곤의 문제입니다. 결국 늙고 병들고 쇠약해집니다. 유전학적으로 늙음은 곧 세포의 피곤입니다.
고속도로를 가다 보면 휴게소가 많이 있습니다. 운전 중 졸립고 피곤할 때 잠시 들려 쉬면서 음식도 사먹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정말 피곤할 때는 휴게소를 아무리 들려도 피곤함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휴식은 마음에서 부터입니다.
휴게소가 아무리 많아도 인생길에서 마음이 고달프고, 사는 게 괴롭고 힘든 사람들에 참 휴식을 줄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휴게소는 많아도 참 된 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찬송가 290 고달픈 인생길을 가는 동안 편히 쉴 곳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마음의 휴식을 줄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마 11:28절에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다.
과연 예수가 필요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나는 예수가 필요 없는 완벽한 사람이다” 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자만이요 교만입니다. 자신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할 때 필요를 채울 수 있는 해답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