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의 법칙 (고전 14:26-40)
본문
고전14:26-40 / 사역의 법칙
이제 우리 교회는 하반기 모든 사역들이 다음주간부터 집중될 것입니다.
제자훈련사역 목장사역 전도사역등 모든 교회회사역들이 이 가을에는 더욱 성숙한 사역이 되기를 원하고 더욱 성숙한 사역자들로 헌신되기를 기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역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역자입니다. 교회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같은 특별한 위치의 사람들만이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역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은사를 주셨고 그 은사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역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에서 다양성 있는 사역을 하면서 통일성있는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양성 속의 통일성있는 교회의 모습은 바로 질서있는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보면 얼마나 질서있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질서의 하나님이시기에 질서잇게 모든 것을 통치하여 가십니다.
자연에는 자연의 질서가 있습니다.만일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이 질서를 무시하고 뜨지 않거나 일찍 져버린다면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것입니다.
사회에도 법을 통한 질서가 있어서 사회가 유지가 됩니다.만일 법이 없다면 금방 무질서하고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가끔 신호들이 고장난 거리에서 차들이 뒤엉켜 무질서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정에는 가정의 질서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형제 간에 친척 간에 질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도 질서가 필요합니다.교회가 교회로서 온전한 기능을 하기 위해서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그래서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는 질서가 있습니다. 마치 성숙한 몸이 제 역할을 다하면서 질서를 이루어 균형을 이루는 것같이 성숙한 교회가 그렇습니다.성숙한 교회는 질서있는 예배가 있습니다. 성숙한 교회는 질서있는 사역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가 깨어지고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가장 큰문제는 자유를 남용하거나 오용하면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가령 본문에 고린도교회의 문제점 중에서 자유의 남용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특히 공예배 중에서 자의대로 방언을 자유대로 말하면서 예배가 어지러워지면서 질서가 깨어지고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사실 방언으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찬송하고 방언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내 기분 내 믿음에서는 자유롭고 좋습니다. 그런데 타인들에게,교회 전체에서는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질서를 어지럽히는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처럼 자유는 있는데 질서없이 자기중심으로 신앙 생활 할 수 잇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처럼 본인의 자유로움을 앞세워 교회에서 사역할 때 결국 질서가 없는 성도,질서가 없는 교회를 우리의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우리가 많이 볼 수 잇습니다.
무질서한 고린도교회는 교회로서 제기능을 다하지 못합니다.이렇게 미성숙하고 문제있는 고린도교회의 모습은 오늘 부분적으로 우리 교회속에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교회를 향하여 어떻게 주신 은사와 직분으로 사역해야 할 것인가를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모든 사역 속에서 덕을 세우는 사역자가 되십시오
26절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떄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은사가 있습니다. 찬송시도 있습니다. 가르치는 말씀도 있습니다. 방언도 있습니다. 통역함도 있습니다. 먼저 이 다양한 은사와 직분에 대한 인정,이 부분에 대한 활동이 있어야 합니다.교회는 다양한 직분도 있습니다.교회는 다양한 섬김도 있습니다.이런 다양한 은사와 직분대로 이 “모든 것”을 행하여져야 합니다.찬송도 행해야 합니다. 가르치는 말씀도 행해야 합니다. 찬송의 은사도 행해야 합니다.모두가 중요한 것이고 모든 것이 다 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덕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먼저 덕있는 모습은 교회 속에서 서로의 가치와 존재를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거나 어느 것이 덜 중요하다고 우열을 매겨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마치 몸으로 말하면 다양한 지체가 제위치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몸에 필요에 따라 귀와 눈과 입과 코과 손발등이 있습니다. 만약 온 몸이 눈이면 듣지를 못하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에 온몸이 냄새맡는 곳이라면 보지도 말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2: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라고 합니다. 귀는 드드는 역할이 있습니다. 눈은 보는 역할이 있습니다. 코는 냄새맡는 역할이 있습니다. 입은 말하는 역할 먹는 역할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든 지체 모든 역할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만약에 서로 지체가 자신이 우월하다고 자랑하면서 상대방을 무시한다고 가정하여 보십시오 .만약에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는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 고전12:21절에 말씀합니다. 오히려 고전12: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라고 합니다.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몸의 약한 부분들이 얼마나 요긴한지 모릅니다. 손톱 발톱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가끔 발톱이 상하거나 손톱이 상하면 얼마나 힘이들고 어려운지 모릅니다. 눈위에 눈꺼풀 부분에 조그마한 종기가 생기면 눈전체가 힘이 들고 얼굴전체가 힘이 드는 것을 경험합니다. 여러분 교회 속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은사에서 작은 은사 쓸모없는 은사는 없습니다. 모든은사가 귀하고 모든 은사가 중요하고 모든 은사가 필요합니다.
다음에 덕있는 사역자의 모습은 교회 속에서 모든 사역들이 질서있게 행해져야 합니다.
그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7절에 교회에서 덕을 세워가는 부분에 대하여 지적합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방언을 할 때 방언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여러 사람이 있을때에 2가지 원칙을 강조합니다. 하나는 차서를 따라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질서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방언하고 싶다고 막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은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을 놓고 방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즉 방언으로 남에게 유익을 끼치라는 것이니다.
만일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8절 만일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방언을 내가 하고 싶은 데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유익이 되는 방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방언이 유익이 되지 못할때에는 방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내가 하고 싶지만 전체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자리,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내가 참고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가령 예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만일 예언하는 사람이 여러사람이거든 하나씩 하나씩 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을 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방언을 하거나 예언을 하거나 모든 은사를 사용하거나 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자유”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 속에서 모든 것을 덕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덕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나보다 남을 더 배려하고 하나되게 하는 것이 바로 덕입니다.
결국 덕은 화평을 이루게 되고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33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방언을 한다고 합시다. 덕있는 사람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하여 어떻게 방언을 합니까? “차서를 따라”하는 것입니다.“통역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철저히 남을 배려하는 것입니다.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사를 사용하더라도 나의 유익과 기분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유익이 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좋더라도 남에게 피해가 된다면 내가 양보해야 합니다.
특히 고린도교회의 경우 방언으로 인하여 교회가 혼란하엿습니다.아마도 공집회시에 자신들의 은사를 가지고 자신을 자랑하면서 남을 배려하지 않고 사용한 것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덕입니다.
가끔 교회에서 보면 일을 잘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기가 막히게 일을 잘 하시는 봉사의 은사가 있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을 잘 하고 못하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일을 통하여 얼마나 교회를 세우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덕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열심히 사역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 열심이어야 합니다. 나를 세우는 열심히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열심히 되어야 하고 나를 자랑하는 사역이 아니라 항상 교회를 화평하게 세우는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종종 교회와 남을 보지 않고 나만 생각하는 은사를 사용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까?
‘내가 최고다’라는 교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교회는 무명의 용사들이 많아야 하는데 전부 서로 장군이 되고 장교가 되어 나를 드러내려고 하는데서 문제가 생깁니다.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했는지 거기서 “내 이름이 나타나지 말아야 합니다.”남을 세우고 남을 칭찬하고 남을 용기를 주면서 사람을 세워가는 것이 결국 덕있는 사람이요 그러므로 교회가 질서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한번은 무디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는데 어떤 남자에게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모처럼 기도기회를 얻은지라 너무나 오랬동안 기도를 했습니다.무디는 그 기도가 예배에 덕이 되지 못하고 예배 분위기를 망친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형제가 기도를 마칠 때까지 다같이 찬양합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덕있는 사역이 서로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마음을 더욱 갖아야 합니다. 더 넓은 마음 더 넓은 생각을 갖아야 합니다. 사역을 하다가 보면 이렇게 저렇게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 그럴때마다 우리는 주님이 상처받으신 것같이 좀 억울해도 좀 속상해도 상처받으면서 화평을 위해서 질서를 위해서 나를 내려놓고 그 사명을 감당하시는 덕스러운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회에서 오직 서로 복종하면서 사역하십시오
34절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모든 성도들 모든 교회의 여자들이 잠잠해야 한다고 합니다.
왜 특히 본문에서는 여자와 관련하여 잠잠하라고 말씀합니까?
본문의 고린도교회는 특별히 자유분방한 여자들로 인해 복종이 없이 교회가 무질서했던 모양입니다. 복종이 없는 사역은 결국 교회를 허물고 오히려 마귀를 쫓게 합니다.
왜 사역을 하면서 복종하지 않는 문제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34-36에 보면 복종하지 않은 여자들의 경우 말과 관련된 교회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의 은사를 갖은 사람들의 문제는 교만이 문제였습니다.
사실 고린도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선줄로 생각하고”“다 아는 것”처럼 자기들의 신앙을 과대평가하면서 말로서 문제를 많이 일으킨 것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교회의 질서를 꺠는 이유로 드는 것이 바로 “말”입니다.
교회 문제의 가장 중심 원인이 있다면 아마도 “말”일 것입니다.
거의 교회 문제가 이 말에서 생기는 것을 봅니다.사소한 말 한마디가 씨가 되어 교회분란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사역자들은 먼저 자신을 복종하여 “말”을 다스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역자로서 말에 있어서 잠잠할 필요가 있습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 자기를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에 각 지체들의 위치를 주신 것같이 우리의 교회 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위치에서 교회를 보느냐에 따라서 교회가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만약에 몸으로 본다면 발의 위치에서 몸을 보는 것과 머리의 위치에서 몸을 보는 것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발의 위치에서 몸을 보면 몸이 너무 발을 많이 사용하여서 피곤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의 위치에서는 너무 몸이 머리를 사용하지 않아서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도 만약에 우리가 성도의 입장에서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보여질 수 있습니다. 만약에 새가족부 입장에서는 교회가 새신자를 좀더 배려해야 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찬양대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찬양대를 더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입장에서 말을 하고 불만과 어려움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적은 교회는 적은 교회대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특히 재정의 불족함 일꾼의 부족함 시설의 열악함들이 현실의 교회인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지상의 모든 교회들이 겪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렵고 힘든 현실 속에서 중요한 것은 마인드의 문제입니다. 주님의 마인드를 갖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는 온전히 주님을 드러내는 동기로 잠잠하게 주님께 복족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교회를 사역해야 합니다. 문제는 기도로 아뢰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은 기도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현실적인 문제는 교회 속에서 함께 대화하면서 풀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아무 해결도 되지 않는 불평과 불만의 자리에서 이렇게 저렇게 자기를 드러내는 말로 함부로 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잠잠할 수 잇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교회 주님의 나라에서 복종하는 사람이 덕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교만하면 결국 복종하지 못합니다. 교만하면 결국 내가 최고가 되는 것입니다.그러면 모든 것이 내가 중심이 되어서 함부로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교회 생활하다가 보면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어느날 스펄젼 목사님에게 한 신도가 찾아와서 부탁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저에게 온전한 교회가 잇으면 소개시켜주십시오”그러자 스펄젼 목사님 말씀이 “‘천국에 가서 찾아 보십시오” 라고 하였답니다. 지상에 어떤 교회도 완전한 교회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상의 대부분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문제는 복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목회자는 사역에서 주님께 복종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주님이 세운 지도자들에게 복종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권위를 인정하여 주어야 합니다. 지도자는 세워져야 세워지는 것이지 스스로 자기를 세워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평신도 사역자들도 그렇습니다.
어떤 팀이든지 팀장이 있고 리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리더에게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설령 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지라도 먼저 리더를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잘 따르는 자가 결국 나중에 잘 끌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이 이끌때 잘 끌어가는 사람은 나중에 남을 끌어가는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음 주일이면 우리는 다시 목장교회가 시작되고 목장모임들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목장교회는 초대에루살렘교회처럼 교회 속의 작은 교회 운동입니다. 먼저 여러분들이 목자들의 권위를 인정하여 주어야 합니다. 목자들은 리더쉽을 갖고 그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서 섬기고 지도하면서 이끌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목원들은 목자들에게 복종하셔야 합니다. 비록 목자들에게서 부족한 부분의 모습이 나타날때에는 서로 기도하면서 함께 세워가야 할 부분입니다. 그래야 목장사역들이 원만하게 이루어져 갈 수 잇습니다.
여러분 사역을 하면서 우리가 먼저 말에 조심하시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명심할 것은 좀더 인내하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좀 한템포 늦추어야 합니다. 야고보서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합니다.
때로 마음에 좋지 않은 감정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감정을 잘 다스리기를 바랍니다.먼저 그 감정이 일어날때에는 그 자리를 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번 더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좀 더 마음의 냉정이 회복되고 나서 말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비난하는 말을 멈추시기 바랍니다. 남을 판단하는 말을 금하시기 바랍니다.불평하고 시기하는 말을 금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나를 복종할 수 있습니까?
바울의 고백처럼 갈2:20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있을떄” 온전하게 복종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느냐 주님이 사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내 안에 주님이 사는 좋은 방법이 한가지 있습니다. 복종하여 서로 덕을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지 않는 사역자가 되십시오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여기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합니다. 또 방언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교회 속에서 은사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질서가 깨어지고 교회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은사의 역기능이 일어날 때 은사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은사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다양한 필요성을 채워주어갈 때 우리 속에 분명하게 혼란이 일어나고 어려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모든 것을 페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은사요 사역이라면 그것을 금하여서는 안됩니다.
먼저 우리가 성령의 사역일지라도 때로 미성숙으로 인해서 다소 문제가 일어날 때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속에서 우리가 사역자들이 사역을 하는 가운데 다소 이런 저런 문제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가령 반주자들이 반주를 미스하는 경우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찬양을 하는 사람들이 좀 잘 못부를 수도 있습니다. 때로 기도자가 헤맬 수도 있고 설교자가 죽을 쓸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할 수 있는대로 우리가 사역에 프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그러나 하루아침에 프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 우리는 그 사역자들의 실수와 부족을 바라볼때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성숙한 성도라면 좀 미숙할지라도 기다리고 들어주고 보아주고 참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기다려주었듯이 나도 이제 남을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가 나를 참아주고 주님이 나를 참아준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좀 부족하고 실수하는 사역자들을 비난하고 욕하여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은사를 사용하는 사역자 당자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하되 포기하기 말고 그냥 은사를 사용하여 사역해야 합니다. 사용하다가 문제가 생겼다고 그만두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은사가 다양하게 사용되어질수록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위치에서 은사대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물론 사용하다가 사람들과 문제도 생기고 어려움도 겪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사를 소멸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자꾸 활용해야 합니다.그대로 두면 녹이 슬고 맙니다. 마태복음25장에 보면 한달란트 받은 자가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습니다.결국 달란트를 장사하여 남기지 못한 그 종은 책망을 받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지 못하엿습니다. 그 한달란트를 숨긴 종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는 게으름 다른 하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게으름으로 사역에 멈춤이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사람들에 대한 판단받는 것의 두려움이 사역에 멈춤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역자들이 사역을 하면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라고 합니다. 은사를 사용하다가 내가 너무 나를 드러내거나 내가 나를 너무 세우려고 하지 않는가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를 사용하는 문제게 있어서 “서로 적당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방언도 적당하게 예언도 적당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홀하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서로 상대방을 보면서 균형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김치를 담글 때 갖은 양념이 서로 적당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고춧가루도 적당해야 합니다. 소금도 적당해야 합니다. 마늘도 적당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한가지 양념이 너무 많이 들어갈 경우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다른 양념들의 맛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가령 고춧가루가 너무 들어갈 경우 마늘의 특유의 향이 없어지는 법입니다. 그러면 김치맛이 날수 없습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은사가 적당하게 서로 사용되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질서대로 하시기 바랍니다.교회는 은사를 다양하게 사용하되 질서있게 세워져가야 합니다.명령을 받거나 통치를 받을 때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으시고 서로 피차에 주님께 하듯이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은사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내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은사는 바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주신 은사를 가지고 나를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주신 은사는 교회를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덕있는 사역자로 우리모두가 사역에 승리하시고 열매맺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