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 결혼의 3대 원리
본문
창세기 2장 18-25절
< 성공적인 결혼생활의 원리 >
영국의 처칠 수상은 도저히 건강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줄담배, 폭음, 비만, 운동부족 등 성인병에 걸리기 좋은 온갖 조건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노익장을 과시했습니다. 66세에 수상에 올랐고, 77세에 재선되었습니다. 또한 재임기간 중에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전쟁 후에는 회고록을 쓰며 90세까지 장수했습니다.
의사들은 그의 장수의 비결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의사는 낮잠 때문에 장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의사들은 처칠의 장수의 원인이 ‘화목한 가정’ 때문이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처칠이 엄청난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내 클레멘타인의 격려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화목한 가정은 성공의 가장 위대한 비결이고, 그것이 바로 이 땅의 천국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아내에게 필요한 원리, 남편에게 필요한 원리, 서로에게 필요한 원리’의 세 가지 원리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 원리는 부부 사이의 원리뿐만 아니라 공동체 생활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원리입니다.
1. 아내에게 필요한 원리
아내에게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원리는 남편의 돕는 배필이 되라는 것입니다. 창조할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대부분 좋았지만 한 가지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이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고독은 보기에 좋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고독이 창조성을 자극하고 사람을 성숙하게 하기도 하지만 고독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 있고 서로 삶을 나눌 대상이 있을 때 행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돕는 배필로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말은 남자는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내의 제일 사명은 무엇입니까? 남편을 돕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 비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비판은 남들이 잘하고 세상이 잘합니다. 아내까지 그 일을 잘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남자도 여자가 계속 파헤치면 다 넘어집니다. 잠언 19장 13절 말씀을 보면 잔소리하는 아내를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물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계속 떨어지면 바위도 패입니다. 아무리 의지와 능력이 강한 남자라도 여자가 계속 긁으면 그 인생은 끝장나게 됩니다.
어떤 분은 자기 남편에 대해서 무조건 나쁘게 말하고,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신은 가만히 있어요!”라고 하면서 기를 완전히 죽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남편의 기를 죽이면 가정 축복의 기운도 죽게 됩니다.
아내는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우리 각 사람에게 영적인 돕는 배필로 수호천사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처럼 아내도 남편의 수호천사로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보고 “하나님이 내게 보낸 수호천사구나!”라고 깨닫고, 아내도 자신을 남편의 수호천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내의 최대 매력은 재테크를 잘하고, 말을 잘하고, 능력이 있는 모습에 있지 않고 남편의 수호천사가 되는 모습에 있습니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돕는 배필’을 잘못 해석해서 아내를 종처럼 다뤘습니다. 그처럼 여자의 인권이 짓밟히고 여자의 한이 서린 나라들은 대개 못살았습니다. 반면에 아내가 종이 아니라 수호천사라는 사실을 알고 창조의 섭리를 깨달으면 가정과 교회와 나라가 다 행복하게 되고 축복의 문도 열리게 됩니다. 그러면 아내는 어떤 수호천사가 되어야 할까요?
1) 가정에서 인정받는 수호천사
아내는 남편을 다방면에서 돕고, 격려와 위로의 말을 많이 해주고, 또 자녀들에게 지혜로운 어머니가 되어서 가정에서 인정받는 수호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여자들은 직장에서 인정받습니다.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높게 평가받을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높게 평가할 일은 가정에서 인정받는 수호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요새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의식이 깨어서 가정 일이 직장이나 사업에서의 일보다 결코 편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사소한 일처럼 보이는 일들이 더 하기 힘든 일이고 더 소중한 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아내는 자부심을 가지고 가정을 세우고 인도하는 역할에서 자기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영적인 도움을 주는 수호천사
대개 보면 교회에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 사실은 여자들이 영적생활에서 남자보다 앞선 존재라는 뜻도 있습니다. 책을 읽는 것도 대개 여자들이 책을 읽지 남자들 중에는 1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확실히 여자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앞서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무엇보다 가정에서 남편과 자녀가 믿음생활을 잘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정에서 여자들이 하는 일을 ‘살림’이라고 합니다. 그 ‘살림’이라는 말의 어원은 ‘살려준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 말대로 여자들은 가정 살림도 잘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영적 살림을 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내들은 항상 “나는 이 가정에 파송된 선교사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남편과 자녀를 믿음으로 잘 이끌어야 합니다. 사실 해외선교사 이상으로 중요한 선교사가 가정선교사입니다.
3) 남편과 동행해주는 수호천사
아내는 남편이 외롭지 않게 항상 동행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먼저 몸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가끔 남편이 놀러가자고 할 때 주일만 범하는 것이 아니라면 내키지 않아도 따라가야 합니다. 그처럼 몸으로도 함께 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남편의 마음이 자기에게 있도록 하고 남편을 마음으로 성원해주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아내의 성원이 없으면 아무리 대단히 성공한 사람처럼 보여도 실패자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아내의 함께 있어야 남편이 잘 살 수 있음을 아시고 대체로 아내를 오래 살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아내의 중요성을 알고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 아내가 저보다 오래 살게 하소서!” 아내가 오래 사는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보약이 생기면 남자들이 먹지만 사실 보약은 여자가 먹어야 합니다. 남편에게는 보약보다 건강한 아내가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인천에서 목회할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수련회 장소 답사를 갔다가 돌아올 때 아내가 운전하는데 갑자기 트럭이 차선을 침범해서 운전석으로 들어왔습니다. 거의 부딪히기 직전에 아내가 급히 핸들을 꺾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자동차가 내 좌석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내 좌석 뒤쪽으로 오는 차와 거의 부딪칠 뻔 했습니다.
다행히 사고는 없었는데 하마터면 아내 대신 제가 죽을 뻔했습니다. 그때 저는 아내가 참 지혜롭게 행동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죽으려면 남편이 먼저 죽는 게 낫습니다. 아내는 남편 없어도 하나님 의지하고 그런대로 잘 살지만 남편은 아내 없이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그만큼 남편에게는 아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가끔 남편이 못나보여도 그런 남편도 귀중히 알고 몸과 마음으로 함께 해주어야 합니다.
2. 남편에게 필요한 원리
남편은 아내를 자기 생명보다 더 아껴주어야 합니다. 본문 2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여자의 창조와 관련해서 몇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 여자는 창조사역 중 가장 마지막에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여자는 흙으로 창조된 남자보다 더욱 귀한 재료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여자는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을 깊은 잠에 들게 하심으로 그 만드는 일을 보지도 않고 관여하지도 않게 하셨습니다.
왜 많은 뼈 중에서 갈빗대를 선택해서 여자를 만드셨을까요? 보통 2가지 이유를 댑니다. 첫째, 남자의 옆구리 부분에서 갈빗대를 취해 만든 것은 남녀가 인격적으로 상호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체 뼈로 여자를 만들지 않은 것은 남자에게 짓밟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고, 머리뼈로 여자를 만들지 않은 것은 남자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둘째, 남자의 심장 근처에서 갈빗대를 취해 만든 것은 여자는 남자로부터 사랑받고 보호받아야 함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자는 남자를 의지해 살아야 하고 남자를 떠나서는 결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남자도 잃어버린 갈빗대인 여자를 떠나서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남자와 여자는 하나로 결합함으로서 창조의 기쁨과 영광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게 됩니다.
계속해서 본문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이 구절은 마치 신부의 아버지가 곱게 키운 딸을 신랑에게 넘겨주기 위해 식장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그때 하와를 보고 아담이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본문 23절 말씀을 보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하와를 가장 소중한 보배로 여기겠다는 고백입니다.
모든 남편들을 그런 고백을 가지고 아내를 보배처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또한 아내도 남편이 자기가 어느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인 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결혼해서 이미 인생 다 끝난 것처럼 전혀 꾸미지도 않고 “알아주려면 알아주고, 말려면 말라.”고 하면서 포기하고 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남편은 아내가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세상에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아담처럼 사탕발린 말은 잘하는데 말로만 끝나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고 경제적인 책임도 지지 않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돕는 배필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태도입니다.
본문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돕는 배필의 이야기가 그 구절에서 한 번 더 나오는데 그 말씀이 나온 배경이 읽혀집니다.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이 구절을 보면 아담이 열심히 이름을 짓는 일을 하는 중에 돕는 배필의 필요성이 부각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돕는 배필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가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책무 중의 하나가 일터를 가지는 것입니다. 남자의 경우에 일터가 없고 땀 흘릴 줄 모르면 철이 들고 때가 될 때까지 결혼할 자격이 없습니다. 아내의 돕는 배필의 사역도 남편이 땀을 흘릴 때 가치가 있습니다.
3. 서로에게 필요한 원리
본문 24-25절 말씀을 보면 부부가 서로에게 요구되는 4가지 실천윤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먼저 본문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이 구절에 3가지 실천윤리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1) 부모를 떠나라
부모를 떠나라는 것은 결혼하면 책임 있는 존재로서 홀로 서는 ‘독립성’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아픔을 줍니다. 그러나 부모를 잘 떠나야 행복한 결혼이 됩니다.
또한 본문에서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고 말했지만 여자도 부모를 잘 떠나야 합니다. 갈등이 생길 때마다 수시로 친정으로 달려가 낱낱이 일러바치면 결코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부부는 배우자에게 수치감을 줄 수 있는 비밀을 서로 힘써 지켜주어야 합니다. 또한 본문에서는 “자식이 부모를 떠나”라고 말했지만 부모도 자녀를 사위나 며느리에게 잘 떠나보내야 합니다.
오늘날 “부모를 떠나라!”는 원리는 가정생활 세미나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원리를 잘못 받아들여 효심까지 내버리는 부작용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서양으로부터 흘러온 잘못된 결혼신학의 맹점입니다. 그처럼 “부모를 떠나라!”는 명령은 강조되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더 중요한 계명이 무시되는 것은 아주 잘못입니다.
옛날에는 부모의 명령을 하늘같이 여기고 이치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이치를 따지면 대졸 학력의 며느리가 국졸 학력의 시어머님의 말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치에 맞아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의 말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이치를 따져 오히려 가정불화가 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부모를 떠나라!”는 명령은 “자녀가 책임적인 존재가 되라!”는 말이지 부모 공경을 버리고, 부모의 권고를 무시하고, 부모와 마음과 거리가 멀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어떤 부모도 자녀를 떠나보낼 수 없습니다. 부모는 아들을 위해 쉽게 죽을 수 있어도 아내는 남편을 위해 쉽게 죽지 못합니다. 사랑의 정도가 다릅니다. 부모의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에 가깝다면 배우자의 사랑은 필레오의 사랑에 가깝습니다.
이것도 모르고 어머니가 남편을 지나치게 독점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부모가 성경에 나오는 “부모를 떠나라!”는 말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자녀를 기쁘게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은 부모가 스스로 실천할 자세이지 배우자가 상대의 부모에게 요구할 자세는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자세를 요구하면서 상대 부모, 특히 시어머니의 잘못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고, 그런 경향으로 생겨난 냉소적인 단어가 ‘마마보이’라는 단어입니다.
요즘은 효자라면 무조건 마마보이로 우습게 아는 행태까지 생겼습니다. “부모를 떠나라!”는 말씀에 대한 잘못된 적용이 큰 잘못을 낳은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부모를 떠나라!”는 말은 자녀의 책임감과 독립심을 강조한 말씀이지 핵가족 시대의 삶을 합리화하고 부모 공경을 등한시하는데 사용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2) 연합하라
본문에서 “연합하라!”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 “연합하라!”는 말은 “상호 협력해서 철저히 하나가 되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에서 ‘연합하다’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아교로 붙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만큼 부부사이는 모든 면에서 틈이 생기지 않도록 단단하게 밀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연합하라!”는 말씀은 “일심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다른 사랑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부부가 된다는 것은 한 대상을 위해 자기의 전 생애를 드리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셋째, “연합하라!”는 말씀은 부부가 “모든 것을 함께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부부는 물질뿐만 아니라 정서와 비전과 사명까지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가정생활에서 생기는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그리고 성공과 실패까지 모두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3) 한 몸을 이루라
이 말씀은 육체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만약 성경이 “연합하라!”는 말씀으로 끝났다면 사람들은 형이상학적인 플라토닉 사랑으로도 부부가 온전히 하나 될 수 있다는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신적인 나눔만으로는 온전한 부부생활이 가능하지 않고 육체적인 연합도 필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몸을 이루라!”고 실제적인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육체적 결합을 차원 낮게 생각하지만 기독교는 전인적 인간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영혼은 좋은 것이고, 육체는 나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육체적 연합을 무시하는 부부는 결코 온전한 부부가 아닙니다.
오늘날 가장 많은 이혼 사유로 드는 것이 ‘성격(性格) 차이’입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성격 차이’보다 더 큰 이혼 사유는 성격에서 ‘격’자 하나를 뺀 ‘성(性 ) 차이’라고 합니다. 사실 성격 차이는 명백한 이혼사유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격이 다른 것은 보완의 가능성이 있고, 그 성격 차이로 인해서 서로에게 없는 성격으로 말미암아 부부생활이 더 풍성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상 이혼의 더 깊은 이유는 ‘성격 문제에 대한 불만’ 때문이 아니라 부끄럽기도 하고 자존심 때문에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성적인 문제에 대한 불만’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부부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결혼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남편 및 아내와 더불어 성적인 즐거움을 누릴 권리와 당위성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4절 말씀을 보면 부부간의 성 윤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부부는 성 생활에서 자기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말고 배우자가 자기 몸을 주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즉 자신에게 필요가 느껴지지 않아도 상대방이 필요를 느끼면 그 필요를 채워주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자기의 필요나 욕구를 뛰어넘어서 상대방 중심의 성생활을 하는 것은 성경이 강조하는 아가페 사랑의 핵심 요소입니다. 부부는 서로의 성적 필요를 채울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합법적인 대상입니다. 그 대상으로부터 만족을 얻지 못할 때 부부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되고, 결국 부부생활에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몸을 이루라!”는 명령은 세속적이거나 부끄러운 명령이 아니라 거룩한 명령입니다.
4) 벌거벗으라
본문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부부는 벌거벗고도 부끄러워 아니해야 합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서로 솔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부는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을 줄 알아야 하고, 아무리 어이없는 일을 들어도 서로의 수치심을 자극하지 말고, 또한 아무리 서로 잘 알아도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 더욱 서로에게 충실하십시오 >
탈무드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습니다. “행복에서 불행으로는 한 순간이지만 불행에서 행복으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부부는 서로의 장단점을 잘 알게 되었다고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관심을 가지는 일에 태만하면 안 됩니다. 결혼이라는 차를 출발시켰거든 한시도 핸들을 놓아서도 안 되고, 바깥의 경치가 좋다고 해서 한눈을 팔아서도 안 됩니다. 우주와 전 세계를 소홀히 할지언정 서로에 대해서는 소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큰 죄와 비극은 대개 홀로 있는 데서 싹틉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돕는 배필을 주어 같이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몸은 한 집에 있지만 마음은 떨어져 있고, 부부가 서로 다른 것을 더 바라보면 안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배우자로부터 먼저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처럼 부부는 서로에 대해 더욱 충실하고 더욱 관심을 기울여줌으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약 20년 전, 서울의 한 교회에 얼굴도 잘생기고, 옷도 잘 갈아입고, 날씬한 여자가 교회를 잘 다녔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교양이 있는 여자라고 좋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교회에서 기도하고 나오는데 그 여자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목사님이 “왜 그러느냐?”고 묻자 남편의 핍박이 심해서 기도하러 왔는데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다시 “남편이 왜 핍박을 하느냐?”고 묻자 남편이 살림이 엉망이라고 교회를 다니지 말라고 핍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솔직한 사연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분 남편은 돈을 벌겠다고 중동에 가서 땀 흘려서 한국에 송금했는데, 아내가 그 돈 가지고 미장원 자주 다니고, 옷 해 입고, 마사지 하고, 계돈 띠고 해서 돈을 다 날렸습니다.
결국 남편이 그 사실을 알고 바람이 들었다고 교회까지 못 다니게 했습니다. 그래서 “왜 교회를 못 다니게 해요! 부부끼리 종교에 자유도 없어요!”라고 막 저항했더니 어제는 손찌검까지 하고 핍박이 심해서 울고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다 듣고 그 교회 목사님이 기도해주었습니다. “주여! 아무래도 잘 맞은 것 같습니다. 이제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잘 깨닫고 좋은 가정 만들게 해주소서.”
사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맞아도 쌉니다. 기독교에서는 그런 여자가 당하는 어려움을 핍박이나 십자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란 잘못이 없는 상황에서 남이 잘못한 것을 대신 지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열심히 땀 흘리며 살면 자신도 열심히 땀 흘리고 사는 심정을 가져야 바른 배우자의 모습입니다.
모든 공동체 생활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느 공동체에 가든지 그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섬겨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을 사람은 알아주지 못해도 하나님은 반드시 알아주실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서는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변화시키고, 나라를 변화시키는 거룩한 초석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