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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바뀌면 인생의 목마름은 해갈됩니다 (요 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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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바뀌면 인생의 목마름은 해갈됩니다 (요 4:1-15)


지루한 것은 견디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답니다. 직장도 가끔 바꾸어야 하고, 집도, 시계도 바꾸어야만 속이 시원한 사람입니다. 교회도 계속 다니면 지루해 정기적으로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어느날 이 인간이 남편으로 사는 것이 지루했답니다. 자신은 매일 출근하여 뼈빠지게 일하는데 아내는 빈둥거리며 노는 것 같아 억울한 생각이 들었답니다. 교회를 다녀 양심이 있었기 때문에 아내를 바꿀 수는 없고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주여, 나는 매일 8시간이나 열심히 일 하는데, 집사람은 집에만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출근하여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를 마누라가 알도록 해주고 싶습니다. 하오니 주여 꼭 하루만 서로의 육체를 바꾸어서 지내게 해 주십시오."

딱하게 여긴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었답니다. 여자가 된 이 남편이 아내가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자 마자 밥을 짓고 애들을 깨우고, 옷을 챙겨 밥 먹이고 도시락을 싸서 학교로 들려 보내고, 남편 출근시키고, 세탁물을 거두어 세탁기에 돌리고, 이불 개고 쓸고 닦으며 돌아가며 집안 청소를 하고, 개를 목욕시키고, 은행가서 일보고, 오는 길에 장봐서 낑낑대며 집에 돌아오니 벌써 오후 1시가 넘었답니다. 빨래를 널고 애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먹을 간식을 준비하고, 애들을 기다리며 남편 와이셔츠 다림질을 하였답니다. 조금 있다가 애들이 학교에서 돌아와서 먹이고 숙제하라고 실랑이를 벌리고는 잠시 TV를 보며 숨돌리는데 벌써 오후 4시 30분 저녁 준비시간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또 허겁지겁 쌀 씻고 고기 저미고 채소를 다듬어서 국 끓이고 저녁 준비를 정신 없이 하였답니다. 저녁 먹은 후에 설거지 끝내고 세탁물을 개어 넣고 애들을 잠자리에 들려 재우고 나니 벌써 밤 10시가 넘었답니다. 지친 몸으로 남편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답니다.

다음날 아침! 아내가 된 이 인간은 눈뜨자 마자 침대 옆에 무릎 꿇고 기도하였답니다. "주여! 내가 정말 멍청했습니다. 마누라가 집에서 하는 일을 너무 모르고 질투하고 말았습니다. 제발 소원하오니, 저를 원상으로 회복하여 당장 남편으로 돌려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빙긋이 웃으시며 "이 인간아 그건 안 되느니라" 그리고는 계속 말씀 하셨답니다. "어제 하루 너는 정말 좋은 경험과 뉘우침을 얻었으리라 믿는다. 나도 네가 바로 남편으로 돌아가길 바라지만. 너는 오늘부터 10개월 후에야 남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넌 어제 밤에 그만 임신하고 말았느니라!!!"

이 때 아내가 된 이 인간은 한숨을 쉬며 “워쩐데유~~~~~”라고 울부짖었답니다. 누가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낯설게 하기를 좋아합니다.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지루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만족을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성을 바꾸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다가 변태 인간이 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꾼 여인이 나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정식 남편이 아닙니다. 남자에게 만족이 있는 줄 알고 끝없는 만족을 추구하지만 안식을 누리지 못한 여인입니다. 당시 상황으로 보면 자기 뜻에 의해 남편을 바꾸었다기 보다는 남편에게 바뀜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남편을 다섯 번 바꿀 정도면 얼마나 마음이 병들었겠습니까? 부모와 일가 친척으로부터 버림받았을 것입니다. 어디에서 그 여인이 내 딸이고 내 누이라고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태어날 때는 좋은 남자 만나 행복하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의 수치덩어리가 되어 버린 딸입니다. 가족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버림받은 여인입니다. 사람으로부터 소외된 여인입니다. 손가락질 당하는 여인입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동네는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천대받은 동네였습니다. 육체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물을 길지 않는 한 낯에 물을 길러 온 것을 보면 사람 만나는 것을 기피할 정도로 수치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커다란 정서적 상처로 왜곡된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워 삶의 목적도 삶의 희망도 없었습니다. 끝없이 갈증을 해소하려고 몸부림쳤지만 이 여인에게는 경제적 갈증, 육체적 갈증, 정신적 갈증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릇이 커도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 빗물을 다 받을 그릇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끝없는 욕구가 있습니다. 마슬로(Maslow)가 말한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사회적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등 다양한 욕구들이 있습니다. 이 욕구는 만족함을 모릅니다. 이 욕구들은 남편을 바꾼다고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바꾼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은 수렁과 같은 것입니다. 욕구불만은 수시로 다가옵니다. 부자가 되고 권력과 많은 지식을 가지면 욕구불만이 없습니까? 오히려 더 생깁니다. 부자가 될수록, 권력을 잡을수록 오히려 욕구불만은 커지는 것입니다. 가난할 때는 자신과 어울리는 사람들이 다 비슷하니까 그렇게 욕구불만이 크지 않는데 지위가 올라가고 부자가 되면 상대하는 사람들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자신보다 5배 10배 100배의 부를 가진 사람이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끝없이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살하는 아이들 보십시오. 공부 못하는 아이들 잘 자살하지 않습니다. 공부 잘하는 2등 3등 짜리가 자살합니다. 말단 직원 잘 자살하지 않습니다. 이사되고 잘 된 사람이 자살합니다. 낯은 층에 있는 사람은 뛰어 내리도 죽지 않습니다. 이사 정도 되어 높은 층에 있는 사람이 뛰어 내려야 죽습니다.

욕구 불만이 생기면 인간들은 일반적으로 다섯 가지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첫째가 우회 반응입니다. 젊은 여성이 결혼까지 생각하며 접근했던 남성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설사 상대방이 애인이 있다하더라도 친구만이라도 되고 싶다라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부자처럼 살고, 권력가처럼, 남과 다른 사람처럼 사는 시늉을 하여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둘째는 '공격행동'입니다. 자신이 사랑하고자 하는 남자의 애인을 골려주거나 최악의 경우는 애인을 살해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퇴각적 반응'입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일 경우에 많이 나타나는 현상으로 자신의 욕구를 축소시키며 체념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인생이라고 비관하며 삽니다.

넷째는 '대상적 반응'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성과 얼굴이 비슷한 다른 남성을 선택하여 욕구불만을 해소하는 것입니다. 출세하여 보복하겠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만족을 누리려 합니다. 자신을 배신한 그 남자 앞에 BMW 타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자아방어 반응'입니다. '합리화(Rationalization)'입니다. 친구에게 '그 남자와 결혼해도 행복하지 못할 것 같아 포기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욕구불만이 해결될까요? 이렇게 산다고 해서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남편 다섯 번 바꾸어가며 변신한다고 참 행복해지고 만족함을 누릴 수 있을까요?

남편 다섯 바꾸어도 여전한 목마름 주인 한 번 바뀌면 해갈됩니다.
파스칼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공간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공간은 하나님이 아니면 채울 수가 없는 공간입니다. 명예로, 권력으로, 돈으로, 쾌락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옛날에 송창식씨가 부른 고래사냥이라는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마음에 하나 가득 슬픔 뿐이네...”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마음에 진정한 만족을 주시는 주인이 계셔야 합니다. 인간은 소유로 만족하는 것같지만 진정한 만족은 관계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오 -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내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있을 수 없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해갈을 주시기 위해 찾아 오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이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여인은 남자의 재산처럼 취급받은 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더욱이 사마리아 지역은 앗수르에게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이방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혼혈족이 많이 나온 곳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지을 때 이들이 방해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같은 동족이지만 원수처럼 생각하였고 개처럼 취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곳에 갔습니다. 유다를 떠나 갈릴리고 가는 길은 두 길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를 통해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지름길입니다. 베뢰아와 데가볼리를 거쳐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우회로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멀지만 우회로를 택하여 갔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 수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우물에 앉아 이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상처와 우리의 고통, 우리의 필요, 우리의 억울함, 우리의 사정, 우리의 어려움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인생의 상처를 치유시켜 주시기 위해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곳에서 상처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6) 그녀의 깊이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그녀의 편견을 정복하고 그녀의 반항하는 고집을 꺾고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기 찾기 전에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눈으로 볼 없다고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형태가 있는 것만 봅니다. 그러나 형태가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공기는 형태가 없기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합니다. 사랑이 형태가 없기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합니다. 감정이 형태가 없기 때문에 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 시간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오늘도 삶의 용기를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땅에서 우상 숭배하며 우상장사의 아들로 살아갈 때 그를 찾아 갔습니다.(행7:2) 야곱이 그 형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도망갈 때 그를 찾아갔습니다(창28:10,13) 모세가 살인자가 되어 광야에서 양을 칠 때 그를 찾아갔습니다(출3:1,2). 삭개오, 사울과 베드로를 찾아가신 우리 주님게서 오늘도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베데스다 38년된 병자를 찾아 가신 예수님이 오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세계적인 성악가 호세 카레라스가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계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아티스트'로 선정된 사람입니다. 레코딩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천 만장이 넘는 클래식 음반은 단 두장 밖에 없는데 카레라스가 바로 그 두 장의 주인공입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음악인이라고 칭송을 받는 그가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이 41세로 백혈병으로 쓰려졌습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나이, 이 세상을 하직하기에는 억울한 나이였습니다. 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을 맡아 열정을 다하여 연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사전 연락도 없이 다가온 것은 죽음의 선고였습니다. 그러나 호세 카레라스는 절망하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자신을 찾아 오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손길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면, 남은 평생 주를 위해 충성하겠다"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만 하고 앉아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골수 이식 수술과 힘든 화학치료를 받았습니다. 힘겹고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은 빠지고 손톱과 발톱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찬송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 재산을 팔아 바르셀로나에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의 공연 수익금은 모두 이곳으로 보내어 졌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다. 나는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서 나보다 남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나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귀중한 것은 그것을 잃을 때 깨닫습니다. 평소 건강할 때는 건강의 귀중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물이나 공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이 많을 때, 공기가 풍부할 때 그것들의 고마움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홍수로 먹을 물이 없을 때 물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깨닫습니다. 고난과 문제, 삶의 끝없는 목마름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는 눈입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
예수님을 소외된 그녀를 찾아가 무엇이라고 말씀하였습니까?
예수님은 그녀의 영원한 갈증을 풀어 주시기 위해 물을 좀 달라고 합니다(7).
이 요청은 그 여자가 당시로는 응할 수 없는 요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의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이든지 사마리아인의 빵을 먹는 자는 돼지고기를 먹는 것과 같이 취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어찌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요구하냐고 반문합니다.(9) 아직 그녀는 영안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편견이 있었습니다. 당시 문화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관습의 노예가 되어있었습니다. 사실 주제 파악을 못한 것입니다. 교만하고 뻔뻔합니다. 인간이 늘 하나님 앞에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편견에 내가 누구인줄 알았으면 생수를 달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10). 그녀의 편견에 변명하거나 논증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잃어버린 자가 되었고 파멸해 버렸고, 지옥의 불 못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만 했습니다. 주님 없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고 부질없는 것임을 깨달아야 만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여야만 할 존재인 것을 알아야 만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녀는 깨닫지 못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릇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습니까? 예수님 자신을 알기보다는 그녀의 관심은 오직 우물과 두레박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대단히 영리한 것 같지만 보여주기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늘 보이는 세상 것에 집착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만족을 줄 줄 압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자신이 주는 물은 세상이 주는 물이 아님을 말씀합니다. 영생의 물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줍니다.(13,14) 드디어 이 여인의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여인은 요구합니다.(15)
“이런 물을 내게 주소서. 매일 수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물을 주옵소서. 수치를 피해 나오지 않는 물을 주옵소서.” 이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전혀 다른 말씀을 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인생에 가장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말하고 싶지 않은 죄의 문제입니다. 죽을 때까지 숨기고 싶은 문제입니다. 한 낯에 사람을 피해 물을 길러 올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문제를 예수님은 말하는 것입니다. 숨기려했던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남편이 다섯이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주님 앞에 이 여인은 자신의 포장하는 것을 그만두고 항복하였습니다. 인생이 완전히 변해 버렸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주님으로 예수님을 고백합니다. 선지자로 고백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29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유대인이라고 말했습니다.(9) 당신이라고 했습니다.(12) 그러나 그녀의 호칭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15절에는 주라고 합니다. 19절에는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29절에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변화의 경험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알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 주님으로 모실 때 인생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과거를 알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날 때 진정 인생은 치유되는 것입니다. 이 유레카의 경험을 할 때 인생은 바뀝니다. 어떤 경우든 만족할 수 밖에 없는 새로운 인생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때 청화대 고위직에 있었던 분입니다. 당시 권력을 가지고 많은 부를 얻었습니다. 땅도 많이 사 놓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와 권력을 얻으면 새로운 여인을 만나려고 하듯이 이 분도 쥐도 새도 모르게 예쁘고 젊은 첩을 두었습니다. 당시 교회 집사였습니다. 아내도 몰랐고 자신이 다니고 있는 담임목사님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간암이 걸린 것입니다. 치료받기 위해 미국에 갔지만 사형선고만 받고 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제가 섬겼던 담임 목사에게 찾아 왔습니다. 당시 신유의 은사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 집사님을 보자 마자 “첩있지 회개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집사님은 아무도 모른 줄 알았는데 처음 보는 목사님이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살아계심 앞에 철저히 회개를 하였습니다.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철저히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질병을 깨끗이 치유시켜 80대까지 살게 해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장로님이 되셨고 제가 섬겼던 그 교회 땅을 기증하였습니다.

아는 것과 고백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랑하는 것과 고백하는 것도 다릅니다. 사랑하여 결혼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으로 결혼한 것 아닙니다. 사랑의 고백을 하고 그 고백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결혼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고백이 영혼 깊숙이에서 우러나오고 우리 입술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인생의 목마름은 예수님은 진정 주인으로 그리스도로 모실 때 해갈됩니다.
남편 다섯 바꾸어도 여전히 목마름에서 벗어나지 못해도 주인 한 번 바꾸면 영원한 해갈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를 치료해 주실 만한 능력이 있으신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을 진정 중인으로 모시느냐 역사적 인물로 모시느냐가 우리 인생의 참 만족을 좌우하는 요소입니다. 예수님은 진정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면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면 우리는 바울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고후 3:5)”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해갈은 나의 욕구보다 더 크신 예수님을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만남에는 육체적인 만남도 있고 정서적인 만남, 영혼의 만남 등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만남은 사람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합니다. 정서적 만남보다 오래 가지 못합니다. 영향력이 없습니다. 부모와의 만남이고 배우자와의 만남은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만남입니다. 만나면 그 사람이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크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강력한 만남은 영적이 만남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만남입니다. 이 만남을 가지면 예수님이 전부가 되어 집니다. 욕구보다 예수님이 크게 보이고 현실보다 예수님이 크게 보이고 문제보다 예수님이 크게 보입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만 곁에 있으면 문제는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색깔을 바꾸어 집니다. 마음의 색깔이 바뀌면 인생의 색깔이 바뀌어 집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이 여인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과거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과거가 인생의 발목을 잡지 않았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물동이를 버려두었습니다. 진정한 생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우선순위가 바뀐 것입니다. 그녀는 물을 길러 우물에 왔고 오직 이일에 마음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변하였습니다. 지각변동이 일어났습니다. 인생관이 바뀌었습니다. 삶의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과거의 쓰라린 고통을 십자가에 다 묻어 버려야 합니다. 과거 때문에 괴로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죄는 용서함 받았습니다. 마음의 색깔이 바뀐 것입니다.
마음의 색깔은 인생의 색깔을 만듭니다. 이 여인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편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과거의 기억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조지아 주립대학의 데이비드 슈워츠 교수는 "성공하는 사람은 키나 체중, 학력이나 집안 배경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크기에 따라 평가된다."고 말했습니다. 노만 빈센트 필은 "생각을 바꾸면서 자기 세계도 바꿀 수있다"고 했습니다. 생각의 속도는 세상 어떤 것보다 빠릅니다. 생각은 1초에도 광활한 우주를 수십 바퀴나 돌 수 있고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생각은 결국 현실을 만들어 냅니다. 말이 끌지 않고 네 바퀴가 스스로 굴러가는 차를 구상한 헨리 포드의 생각이 자동차로 나타났고 라이트 형제의 하늘을 나는 생각이 오늘날의 비행기가 되어 나르고 있습니다. 패배주의적 생각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로마의 시인이었던 버질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갇는 것입니다. 엘빈 토플러는 “우리가 작은 일을 하는 동안에도 큰 일을 생각하면 자질구레한 모든 일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줍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을 하면 우리 인생은 불만족한 부분들은 자연히 해소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도저히 부끄러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없는 여인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모든 장애물을 뛰어 넘어 버렸습니다.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증거하였습니다.(28,29) 인생의 목표가 바뀐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힘을 받은 것입니다. 힘은 태울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차에 연료를 집어 넣었다고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산화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씀도,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고 설교를 들으면 설교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자신에게 행한 모든 것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간증합니다. 그러자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40). 그리고 그리스도를 인하여 믿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백합니다. 4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친히 듣고 예수님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알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희망이 없는 동네에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절망과 소외 속에 살아야 할 가정에 새로운 희망의 삶이 펼쳐졌습니다. 패배 의식이 없어졌습니다. 냉소주의자가 살아졌습니다. 편견의 늪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눈 앞을 가로 막았던 헛된 것들이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지나치게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목마른 여인이었습니다. 생리적 갈증과 심리적 갈증으로 허덕이는 여인이었습니다. 돈, 쾌락, 대우, 명예, 권력에 모마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은 아무리 마셔도 곧 다시 목이 마릅니다. 돈과 쾌락과 대우와 명예와 권력은 아무리 얻어도 곧 다시 목이 마릅니다. 터진 웅덩이는 아무리 물을 담아도 물이 고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버려진 천한 여인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일부러 먼길을 찾아 가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비난하고 버렸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나면서 여자는 남자의 사유재산처럼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리스 시대 대는 여자는 노예처럼 취급해야 질서가 잡힌다고 생각했습니다. 16세기 때도 이런 풍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명한 종교개혁자 루터는 "계집 아이는 남자보다도 말을 빨리 배우고, 걸음마도 빨리 배운다. 왜 그런지 아는가? 잡초는 좋은 곡식보다 빨리 자라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여자에게 투표권이 영국에서 허용된 것은 19세기부터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사마리아 이름 없는 여인을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여자를 처음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처음 증거되기 시작할 때 유럽에서 처음 신자는 여자였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귀하게 여겨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만족은 남편 다섯 바꾼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창조주, 인생의 주인 한 분 모시면 그 안에서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마 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누구나 과거를 지울 수는 없지만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는 있습니다.
과거를 지울 수 없다하지만 그래도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지 못할 정도로 과거의 그림자가 긴 것은 없습니다. 시작할 마음만 있다면 새롭게 출발하기에 늦은 시간이란 없습니다. 지나간 바람으로 풍차를 돌릴 수 없습니다.
남편 다섯 바꾸어도 여전한 목마름 주인 한 번 바뀌면 해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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