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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사랑을 원한다 (요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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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사랑을 원한다 (요 4:14)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요구하는 방식은 다 다르지만 그들은 오직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생명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사랑을 원합니다. 그것이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사랑을 받음으로써 자라고 더욱 더 풍성해지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고뇌하는 모든 이들은 사랑을 원한다.

여러분이 애완용 강아지를 좋아한다면 가까이 와서 얼굴을 발에 부비고 꼬리를 흔들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그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여러분 옆에 가까이 오면 여러분에게서 어떤 영적 에너지가 흘러와서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여러분이 그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들이 느끼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지도 모르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그들은 알게 됩니다. 그들은 별로 감정이 왜곡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애완용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지 않으며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의 주인이라면 그들은 어떻게든 사랑을 받으려고 애교를 부리겠지만 주인이 아닌 담에야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식물을 사랑하고 좋아한다면 식물은 여러분의 그 에너지를 더 예민하게 느끼고 마음이 즐거워져서 꽃도 아름답게 피어나고 줄기도 윤택하게 잘 자라게 됩니다. 식물은 인간과 같이 왜곡된 감정과 비뚤어진 사고가 없으므로 사람의 감정과 느낌에 더욱 민감합니다.

그들은 주인이 그들을 돌보지 않으며 무관심하게 되면 삶의 회의를 느끼고 꽃도 잘 피우지 않으며 곧 시들어버립니다. 의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오직 사랑을 흡수함으로서 존재할 수가 있고 자랄 수 있습니다. 무관심하거나 미워하면 그 생명은 시들어가고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창조의 원리이며 생명의 원리입니다. 사랑은 건설이며 미움은 파괴입니다. 사랑이란 벽돌을 하나씩 올려서 집을 짓는 것이며 미움과 분노는 지어지고 있는 집을 도끼나 망치로 내려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집은 파괴됩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인간에게서 사랑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풍성한 삶, 풍성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대부분의 상담에서 필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고 설교가 아니며 가르침도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그들이 혼자가 아니며 그들은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에 대한 확인인 것입니다. 그들은 용기를 얻고 싶고, 힘을 얻고 싶어 합니다. 어떤 진리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해답이 없어도 따뜻한 말과 애정 어린 분위기를 느끼며 사랑의 주님이 그들과 같이 있음을 확인하면 그들은 곧 힘을 얻고 일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고뇌하는 모든 이들은 사랑을 원합니다.

누군가가 날마다 당신을 사랑하고 감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다면 그것이 바로 천국에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사람이 건강해진다는 것은 바로 솔직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마음을 부드럽게,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속마음을 이야기하면 남들이 다 자기를 싫어하고 떠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깊은 속에 죄책감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과 용납을 받지 못하고 자란 이들의 특성입니다. 마음이 건강해질 때 사람은 나쁜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밝고 쉬운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오해가 없습니다. 자연스럽고 쉬운 방식으로 서로 알아들을 수 있게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천국이 됩니다.

사랑이란 가슴 속에 깊이 담가두고 보존한다고 보존이 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쓰면 쓸수록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생명이기 때문에 쓰면 쓸수록 발전하는 것입니다. 기계는 쓸수록 망가지지만 사람은 쓸수록 발전하고 쓰지 않으면 기능이 약해집니다. 근육을 사용하지 않으면 근육이 약해지고 머리를 쓰지 않으면 머리가 나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아끼는 사람이 사랑의 측면에서 발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음속에서 넘치는 생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또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 그것은 사마리아 여인이나 그 당시의 백성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를 믿을 때 우리 안에서는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의 생수, 진리의 생수, 기쁨의 생수입니다. 그런데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봅니다. 속에서 생수가 계속 솟아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전제 위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에 그 생수가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는 데 계속 솟기만 하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물 돼지가 되어서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 밖으로 생수가 흐르지 않는다면 그 속에서 생수가 계속 솟구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밖에 나가는 길이 막혀있는 데 어떻게 속에서 계속 나올 수 있나요? 앞차가 막혀있는데 어떻게 교통이 원활하게 소통 될 수 있나요?

사랑은 우리의 감긴 눈을 뜨게 한다.

사랑이란 잃었던 시력을 찾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요, 그 무관심은 사랑이 없기 때문일진대, 사랑은 우리의 감긴 눈을 뜨게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그리고 자연에 대하여 좀 더 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할 때 진정 내가 감사하고 높이는 일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서는 일이란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랑은 형용사가 아닌 움직이는 동사입니다. 살아가는 날 동안 얼마나 사랑했는지 주님이 물으신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모두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작은 촛불 하나가 어둠을 물리치듯 사랑의 빛을 밝혀 세상을 환히 비추는 우리의 모습 가운데 주님 사랑이 느껴지길 바랍니다.

삶의 변화가 없다면 인생이 이미 녹슬고 있는 것

지금 여러분의 몸, 마음, 영혼은 건강하십니까? 삶의 변화가 없다면 그의 인생은 이미 녹이 슬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녹은 쇠에서 생기는데 녹슨 쇠는 그 자체를 못 쓰게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받았으나 섬기지 않고, 은사를 받았으나 방치하여 녹슨 심령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나요? 받은 은혜 가운데 건강이든지 재능이든지 물질이든지 활용하거나 나누지 않으면 자신의 모든 것이 위축되거나 축소되어 가거나 소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 심령, 몸이 치유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으로 충만할 때 모든 면에서 놀라운 자유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랑이 있는데 그것은 받기만 하려는 세상의 헛된 사랑과 받은 사랑을 나누어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받는 사랑에는 항상 갈증이 따르지만 주는 사랑은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오늘도 받는 사랑에만 집착하는 이유는, 이기심으로 인한 온갖 상처로 마음이 비뚤어진 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주는 사랑은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먼저 사랑을 주면 상대방이 변합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큰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사랑을 원합니다. 사랑으로 충만하시고 그 충만하신 사랑을 가지고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과 모든 곳에 나아가셔서 삶의 지경을 넓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부족합니다. 모든 이들에게 나누어줄 사랑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모든 짐을 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우리를 피곤하고 지치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십시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는 바로 주님이 거하십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날마다 샘솟는 생수를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자신의 힘이 아니고 주님을 의뢰하고 기대한다면 주님은 여러분에게서 조금씩 또 조금씩 새롭고 풍성한 생수의 사랑을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주님이 하신다는 것, 바로 그것이 기독교의 비밀입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다 사랑을 원합니다. 나도,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도 오직 사랑을 구합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사랑할 수 없을지라도 날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의뢰한다면, 그것을 기도함으로 기대한다면, 그것은 가능한 일이며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고 사용하실 것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사람은 살고 죽습니다. 여러분도 사랑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조그만 사랑이 조금씩 흘러나오게 될 때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서 더욱 더 크고 아름답고 풍성한 사랑이 점점 더 넘치게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천국입니다.

새는 그 가는 다리마져 부러졌을 때야 날기를 배운다

새의 다리는 참으로 약합니다. 만일 새가 그 가느다란 다리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새는 참으로 힘이 들것입니다. 새가 먹이를 찾아 나설 때,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 막아설 것이고, 험한 골짜기와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을 것이며, 넓은 강물이 새의 앞을 가로막고 있을 것입니다. 또 무서운 짐승이 따라올 때는 꼼짝 못하고 잡아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새는 그 다리만으로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새는 아무런 희망도 없기에 그 좋은 목소리로 아무런 노래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하고 한 숨만 쉬고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만약 새가 그 가는 다리마져 부러졌다면 이제 어찌하겠습니까? 새는 그 가는 다리를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둥지에 누어서 죽을 날만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새의 다리를 그렇게 가늘게 만들었는가 하면, 또 다른 대책으로 새에게 아주 강하고 아주 놀라운 바위를 넘을 수 있고, 산을 넘을 수 있고, 짐승을 피할 수 있는, 심지어 저 사나운 호랑이도 올라갈 수 없는 저 높은 하늘위로 올라갈 수 있는 날개, 날개를 주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땅으로 향하는 새의 다리는 약하지만 하늘로 향하는 새의 날개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위를 넘고 강을 건너고, 산을 뛰어넘을 수 있고, 저 높은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똑같이, 우리 사람들에게도 날개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람에게는 영혼이 새의 날개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새의 가는 다리로 생존의 몸부림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몸부림을 하고 있으며, 어쩌다가 다리가 부러졌다면 이제 절망하고 자포자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 우리를 뒤쫓아 오는 무서운 맹수, 저 절벽, 저 강만을 바라다보고 많은 사람들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새는 그 가는 다리마져 부러졌을 때야 날기를 배운다고 합니다. 새가 처량한 가는 다리에서 더 처량한 부러진 다리가 되었을 때야 새는 도리어 저 바위를 피할 수 있었으며, 저 산을 뛰어넘을 수 있고 강을 건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는 다리만 보고 절망하며 살지 마시고 또한 그 다리마저 부러졌을지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더 큰 능력의 날개를 펼 수 있는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작은 이야기 하나, 작은 일 하나, 작은 만남 하나를 아름답게 생각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미 그때 아름다운 기적이 잉태되고 빛나는 삶을 약속받게 됩니다. 아름다운 기적은 그 사람의 생각을 바꿉니다. 말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인생을 바꿉니다. 그 사람의 이름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한 주간 쉼 없이 계속된 폭우는 많은 사람의 꿈과 터전을 앗아갔습니다. 우리나라 전국이‘물 폭탄’을 맞은 듯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며 지금까지도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가족과 집을 잃은 한 수재민은 울면서 말하기를“폭우야 그치겠지만 눈물은 평생 흘려야 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가슴 아픈 말입니다.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이번 폭우만큼 많은 눈물을 흘린 이웃이 있습니다. 피 흘리는 심정으로 다른 사람의 근심과 아픔을 덜어주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숙한 덕인 긍휼일 것입니다.

수재로 공동체가 근심에 싸이는 이 때‘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이사야 49:13) 하나님께서 황폐해진 수해 현장과 모두의 마음, 생활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시며 치셨으나 싸매어주시는 분’(호세아 6:1)이십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상처가 내 상처라고 여기는 긍휼의 마음으로 상처 난 민족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기회가 확산된다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 구조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만나 주시고 채워 주시고 그리고 생수를 공급하고 나누는 자들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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