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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가 땅을 얻으리라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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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가 땅을 얻으리라 (마 5:1-12)


예수를 믿는 것과 인격이 성숙하는 것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 신앙인격이 저절로 성숙해 지는 것은 아니다. 신학지식이 많은 것과 신앙인격이 성숙한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십자가 아래서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경우가 허다 하다. 예수를 믿고 상당한 위치에 있 있는 사람도 신앙인격이 세상 사람만도 못한 것을 본다. 기도와 신앙인격이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기도를 많이 한다고 신앙인격이 성숙해 지는 것은 아니다.

정통신학과 순교신앙에 토대를 둔 고신공동체는 폭력이 난무한 시대를 맞이했다. 대학, 병원, 이사회에서 폭력이 난무하더니 관선 임시이사가 파송된 상태에 있다. 이것이 지금은 북상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를 보면 우리 공동체의 신학교육에 큰 허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목회자 훈련의 가장 큰 허점은 신학교육이 지식위주로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자기를 살피고, 자기의 내면을 성찰하고, 자기 안에 있는 어두운 자아와 더불어 싸우는 훈련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기의 신앙인격, 행동양식을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개선하는 훈련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형태로 지난 수십 년의 신학교육을 시켜온 결과가 오늘의 사태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산상보훈의 고장 갈릴리 호수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호수 북편 산비탈 넓은 곳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한편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그 설교가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되어 있다.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 한다.

산상보훈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인물의 성격을 묘사한다. 그의 생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과 같지 않고, 행동양식이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자연인과 다르다.

산상보훈의 주인공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에 대한 연민성에서 벗어나고, 세상성을 초극한 사람이다. 그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온유함’이다. 그 온유함 덕분에 그는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

유태인과 불레셋 사람들은 땅을 둘러싸고 끝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유태인은 종교적 이유를 근거로 반달모양의 지중해 연안 동편 땅이 자기들의 땅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라는 것이다. 불레셋 사람들은 역사적 이유를 근거로 그 땅을 넘보지 말라고 한다. 수천 년 동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소유했고 살아온 땅이라고 한다.

산상보훈을 듣던 무리는 땅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메시아가 등장하여 한 맺힌 사연을 들어주고,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게 하고, 잃어버린 나라의 주권을 되찾아 줄 것을 기대했다. 무력과 혁명으로 빼앗긴 땅을 되찾아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메시아를 학수고대한 것은 칼로, 쿠데타로, 힘으로 적을 제압하고 빼앗긴 땅을 되찾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그의 가르치는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 권세 있는 자와 같았다. 하나님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네 죄를 용서하노라”고 했다.

여보게, 나와 함께 가세. 귀신도 놀라서 떠난다네. 한센병자를 고치고, 지체부자유자를 치료하며, 시각장애자의 눈을 뜨게 한다네. 죽은 사람도 살렸대. 회당장 야이로의 딸 말일세. “달리다쿰” 하면서 일으켜 세웠나니, 그가 메시아일 수 있어. 빨리 가보세. 종종걸음으로 달려간 사람들이 4-5천 명이 더 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민족적인 한을 풀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카리스마적인 노도질풍을 일으키고, 파쇼적인 힘으로 나라의 주권을 되찾게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한 희망 덕분에 그들은 고통과 한을 달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마5:5)라고 말했다. 상식을 벗어난 말로 들렸다. 온유가 무엇이기에 땅을 차지한다는 말인가? 강력한 무력과 날카로운 창검으로도 땅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를 형편에 온유한 태도로 어떻게 빼앗긴 땅과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온유는 타인에 대한 행동의 성질을 일컫는 말이다. 부드럽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을 할 때에 공손히 부드럽게 해야 한다. ‘말 한마디가 천량 빚을 값는다’고 했다. 잠언서의 저자는 “부드러운 혀가 뼈를 꺾는다”(잠언15:15)고 했다.

지난 해 막내 아이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인천공항에서 인천시내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퇴근시간이라서 교통이 원할 하지 않았다. 적당한 곳에 내려서 택시를 타기로 했다. 옆자리에 않은 20대 중반의 청년에서 물었다. 부평으로 가는 택시를 터려면 어느 지점에서 내려야 하는가 하고 물었다. 그 청년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가냘픈 목소리로,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건장하게 생기고, 부드럽기는 한데, 대한민국의 장래가 걱정될 정도였다. 저런 사람이 적이 쳐들어올 때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겠나 싶었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고 했다. 어진 사람은 적이 없다는 말이다. 산상보훈이 말하는 온유가 과연 이런 종류의 것일까? 온유한 에수께서는 적이 많았다. 그 적들이 그를 십자가에 달아 죽일 정도로 적이 많았다.

과연 산상보훈이 말하는 온유가 여성적인 부드러움인가? 그렇다면 역사상 남자보다는 여자가 땅을 더 많이 차지했을 것이고, 주견 없는 사람, 이래도 무방하고 저래도 무방한 사람, 기회주의적인 사람이 더 많은 땅을 차지할 것이 아닌가? 불의를 향하여 적절한 때 분노하고, 악을 향하여 일사결전을 불사하는 사람, 끓는 가마와 같이 강인한 순교자는 온유와 무관한가?

산상보훈의 주인공은 아주 특별한 점이 있다. 정신과 삶의 태도가 자연적 본성을 가진 사람과 다르다.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 뺨을 돌려댄다.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리를 동행한다. 속옷을 갖고자 송사하면 겉옷도 벗어준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지 않는다. 원수를 사랑한다. 자연인의 본성을 따라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고, 그 영으로 채워지고, 그 영에 따라 살아간다. 자기부정, 속물근성을 버린 사람이다. 세상 사람이 물리적인 힘, 무력, 폭력으로 땅을 차지하려 할 때 그는 온유하게 접근하고 그 덕분에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

아담의 타락이 인류에게 물려 준 가장 저주스런 것은 자기에 대한 민감성, 자기 연민성이다. 자기를 불쌍히 여기고, 자기를 동정한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일에 거의 모든 삶을 소비한다.

1) 자기연민은 자신이 타인보다 더 우월감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 골방에는 부정적인 자아가 웅크리고 있다. 그에게 말을 건다. 여보게, 자네는 저 사 보다 더 나은 사람이야. 자네는 더 좋은 학교를 다녔어. 자네는 더 좋은 가정교육을 받았어, 자네는 저 사람보다 더 훌륭해, 자네는 까마귀 노는 곳에 있는 한 마리의 고결한 백로야’라고 말한다. 이런 말을 듣고 자기를 연민하는 최면이 걸린 사람은 우월감의 포로가된다. 자기 주장, 자기 사상, 자기 생각을 절대화 한다.

2) 자기민감성은 남을 비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남을 깎아내린다. 확실한 근거도 없이 타인을 정죄하고, 험담한다. 명예훼손이라는 살인행위를 마다하지 않는다. 개혁주의 전통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단순한 살인만이 아니라 명예훼손을 포함시킨다.

이러한 폭력성이 아이러니 하게도 정의, 윤리, 도덕성, 합리성, 양심 따위의 그럴싸한 가면을 쓰고 자기를 들어낸다. 대중은 그 가면 때문에 자칫 속아 넘어가거나 혼란스럽게 되거나 판단을 잘못하게 된다.

3) 자기연민성은 마지막 단계에서 공격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동료를 음해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선동한다. 언론 플레이를 하고, 언어폭력을 일삼고, 계파 조직을 만들어 폭력성을 행사한다.

그러나 산상보훈의 주인공을 보라. (1) 속물근성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 뺨을 돌려댄다.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는 자에게 십리를 동행한다. 속옷을 갖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을 벗어 준다. 자기에 대한 연민, 속물근성을 버린 것이다. 자기를 부정하는 그의 심령은 가난하다. 자신에 대해 애통한다. 남을 긍휼히 여긴다. 마음이 청결하다. 악한 말을 들었을 때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천국에서 상이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2) 남을 판단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함부로 남을 비판하지 않는다. 자신의 비판 때문에 자신이 비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안다. 자신이 남을 악하게 헤아리면 남도 자신을 악하게 헤아릴 것이라는 것을 안다.

(3) 자기를 철저히 성찰한다. 자기의 눈 속에 들보를 먼저 본다. 형제를 향해 “라카”(무식한 놈)라고 하는 상투적인 욕설 한 마디를 내뱉으면 자신이 지옥 불에 던져 지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로 철저히 자기를 돌아본다. 말 한 마디, 남을 정죄하는 한 마디가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안다.

자연적 본성에 따라 사는 사람과 그리스도인의 행동양식이 얼마나 대조적인가?

정통신학을 지향하는 공동체의 결함은 정죄의식, 자기절대화, 폭력성 등에서 나타난다. 진보계, 자유주의계 사람들보다 보수계, 정통신학을 지향하는 공동체 안에 다툼이 많다. 그 배후에는 진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진리는 고정되어 있고 불변하고 단수로 존재한다고 하는 패러다임이다.

이러한 진리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은 항상 옳고 타인의 생각하는 것은 그릇 된 것으로 본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정통이고 타인의 것은 비정통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을 항상 자신의 평가와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다. 자신이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치 없는 것으로 보면 그러한 생각을 악하다고 판단한다. 반대로 자신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상대방이 가치 있다고 보면 그러한 사람에 대해 전투적인 자세를 가진다. 비판하고, 정죄하고, 헤아린다.

정통신학을 추구하는 공동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악질적인 폐습은 우리 믿음터와 배움터를 해친다. 그 실체를 들어 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 위에 군림하고 우리를 괴롭힌다.

아브라함은 온유한 사람이었다. 조카와 땅을 두고 갈등을 겪을 때 파쇼적으로, 폭력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기득권이나 연장자 의식을 버렸다. 조카에서 선택의 우선권을 주었다. 온유한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땅만이 아니라 영원한 땅을 기업으로 받았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었다. 이집트 궁중교육을 받았다. 정치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성공 조건과 가능성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히브리인 노예들과 동일시하고,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 편에 섰다. 홍해를 건넌 후에도 모든 영광과 찬양을 하나님께 돌렸다.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려 하지 않았고, 영광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다윗의 온유함은 그가 노래를 잘 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예술적 감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다윗은 원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자신이 숨어 있는 동굴에 사울이 들어와 용변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내가 어찌 죽이리요”라고 했다. 자기를 해하려고 한 사람의 목숨을 끊지 않았다. 겸손히 자기 위에 계신 하나님에게 순종했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는 가볍고 쉬움이라”고 했다. 박해, 경멸, 아유, 조롱을 참았다. 원수에게 관대했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졌다.

신앙인격의 도야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는 어두운 자아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다. 자기부정, 속물근성을 버리는 일이다.

자아 존재에 근거한 자긍심과 교만과 죄성에 근거한 자긍심은 다르다. 자기부정(Self-Denial)은 후패한 옛사람을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개혁주의 전통이 인간성숙과 직결된 성화(Sanctification)을 강조하는 것은 십가가 도리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것과 신앙인격의 성숙이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마지막 하나님 앞에서 영화되기 전까지 부단히 어두운 자기와 더불어 싸우는 노력이다. 후패한 겉 사람의 종이 되지 않고 거듭난 속 사람과 동행하는 일이다.

목회자의 기본 요건은 온유와 겸손이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를 많이 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십자가 밑에서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어야 한고, 자기연민, 자기에 대한 민감성을 버리는 차원으로 도약해야 한다. 그러한 단계에 이른 사람이 원만한 목회를 할 수 있다. 교회가 원하는 목사훈련은 신학지식만이 아니다. 인격적 성숙을 요구한다.

우리의 배움터는 조상들이 물려준 ‘땅’마저 잃을 위기 상황에 돌입했다. 세상적인 힘을 길러 정적을 제압하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계파주의가 이 사태를 몰고 왔다. 계파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는 계파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보호를 구하기보다는 계파를 의지하고 계파의 보호를 받으려 한다. 계파주의 교회정치는 하나님이 일하실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차지한다”는 구호 아래서 힘으로, 권력으로 접근한다. 우리의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이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으리라’는 그리스도의 순종하지 않은 탓이다.

정통신학을 고백하고, 많은 학식을 가지고, 풍부한 상식을 지녔어도 우리에게 온유와 겸손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랑을 논하고, 윤리를 강조하고, 정의를 외쳐도 우리 안에 자기부정이 없고, 자기연민성, 속물근성을 버리지 못하면 선한 열매가 없다. 성경을 몽땅 외우고, 삼위일체론을 완전히 이해하고, 방대한 신학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자기부정이 없으면 그 공동체를 위기의 상태로 몰고 간다. 우리 공동체의 우선과제는 속물근성을 버리고 폭력성에서 탈피하는 신앙인격의 성숙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분의 면전에 대형 거울을 갖다대신다. 여러분 속에 웅크리고 있는 어두운 자아를 보라.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끙끙대게 만들고 허우적거리게 만들고, 우리의 삶을 황폐화 시키고 폭력적으로 군림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보이는가? 신앙인격의 성숙은 이 속물근성을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성령의 역사를 더욱 의지하자. 십자가 앞에 엎드리자. 자신을 쳐서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자 “나는 죽고 그리스도는 살고”의 정신으로 살자. "나는 낮아지고 그는 높아지고," "나는 없어지고 그가 주관하고" .... 그리스도인의 온유함은 거칠고 사악한 세상을 이기는 무기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 방법이다.

토마스 아켐퍼스(Thomas a Kempis, 1380-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를 정독하기 바란다. 여름 방학 중에 산사 바위틈 시원한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정독하라. 토마스는 자기연민이라는 속물근성을 버린 사람을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우리가 온유와 겸손의 덕을 가지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성 삼위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면, 삼위일체론을 학문적으로 토론함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참으로 아무리 고상하게 들리는 언어라 할지라도 인간을 거룩하고 의롭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덕이 충만한 생활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십니다.

교만한 말은 사람을 의롭게도 못하고 거룩하게도 못하지만 선한 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굄을 받게 합니다. 나는 삼위일체가 무엇이냐 하는 정의를 내리는 것보다 나는 오히려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싶습니다.

우리가 성경 전부와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모조리 외운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 모든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진실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만을 섬기는 일 이외에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됩니다. 우리의 가장 높은 지식이란 이 세상을 멸시하고 날마다 하나님 나라를 더듬어 그 나라 가까이 사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켐퍼스는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주여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내가 사랑해야 할 모든 것을 사랑하고
당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가장 존중히 여기고
당신이 보시기에 악한 모든 것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을
나에게 허락하소서.

눈에 보이는 대로
피상적으로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무지한 사람의 말을 듣고
영향을 받지 않게 하소서.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차이를 분별하는
참된 판단과
언제나 그 무엇보다도
당신의 뜻과 기뻐하시는 바를
구할 수 있는
참된 판단력을
나에게 허락하소서.
(최덕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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