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구경꾼에서 예수 제자로 (눅 5:1-11)
본문
1. 이 설교의 주제:
예수 구경꾼에 안주하며 살기 쉬운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베드로를 변화시킨 예수님의 방법을 통해 배운다.
사람은 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누군가의 ‘제자’가 되어 인생을 삽니다. 구원받기 전에 인간은 세상 풍속의 제자로 삽니다. 그래서 이 세상 풍속,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사람으로 삽니다(엡 2:2-3절). 10대에는 일류대학을 좇고, 20대에는 일류 직장을 좇고, 30-50대까지는 30-50평 아파트를 좇다가 공동묘지에서 종지부를 찍는 인생을 삽니다. 구원받은 후에는 예수의 제자로 세상을 사는 것이 원칙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행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엡 2:10절).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예수 제자로 시작했다가, 자신도 모르게 예수 구경꾼으로 하루 하루 인생을 허비하며 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구원받기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강 건너 불 보듯 멀찍이 서서나마 예수를 구경하는 것이 다를 뿐, ‘이 세상 풍속’을 좇는다는 점에서는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 말로는 예수 제자라고 하지만, 실제는 세상 풍속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 이전에 그의 형제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를 메시아로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요 1:35-42).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 제자로 살지 않고 예수 구경꾼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 구경꾼에서 예수 제자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베드로가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으면서 말씀을 전하는 예수를 구경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1절 하반절을 보면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었는지를 본문은 모두 여섯 단계를 거쳐 밝혀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우리에게 적용해서 우리 스스로가 예수 구경꾼에서 예수 제자로 바뀌는 은혜의 경험을 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Ⅱ. 베드로를 변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하시는 예수님의 은혜(1-3절)
본문 3절 상반절에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예수 구경꾼으로 있는 베드로를 예수 제자로 변화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접근하시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연처럼 보이겠지만,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예수님의 접근은 베드로를 변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4절 이후에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며 베드로를 이끌어가시는 모습을 보면, 우리의 이 판단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예수 제자’로 변화시키시기 위해 ‘의도적 접근’을 하고 계십니다. 2000년 전에는 ‘육체’로 접근하셨지만, 지금은 ‘성령’으로 접근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무한하다 할 정도로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 경건의 시간, 성도의 교제, 기도 등 직접적 신앙행습을 통해서만 아니라, 우연처럼 보이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접근하십니다.
Ⅲ. 구경꾼 입장에서라도 말씀을 듣게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3절 하-4절 초)
본문 3절 하반절과 4절 초반에는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베드로의 배에 올라 무리를 가르치심으로써 베드로에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려는 예수님의 사려 깊은 배려를 알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구경꾼으로 있던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이 자기 배에서 가르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구경꾼의 입장에서라도 말씀을 듣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십니다. 예배 시간, 성경공부 시간, 경건의 시간 등에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말씀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말씀을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도 하나님 은혜의 한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 듣기, 소그룹 모임에서 말씀 듣는 시간, 공과공부 시간 등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Ⅳ. 구체적인 말씀으로 베드로에게 도전하시는 예수님의 은혜(4절)
4절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구체적인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이 명령은 무리에게 한 말씀과 다른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그 명령에 순종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칭송이나 하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명령입니다. 순종하든지 말든지 양자택일을 하라는 도전의 말씀입니다. 이 명령은 도전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베드로를 변화시키려는 예수님의 은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구체적인 말씀으로 도전하십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 명령은 나를 변화시키시려는 은혜의 명령입니다. 내가 어떤 처지와 상황 속에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나에게 변화를 위한 은혜의 명령을 주실 수 있는 능력의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서라도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순종할 수 있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나의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명령 밖에 있는 삶은, 현세의 관점에서 보면 유익한 것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결코 허망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24시간 후 내가 죽더라도 그 24시간의 삶을 예수님의 말씀에 싣는다면, 그 24시간의 삶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의미가 있게 됩니다. 이것은 큰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음으로써 나의 삶은 의미 있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성경의 여러 말씀 중에서 자신의 처지에 적용할 수 있는 말씀 한 구절을 통하여 우리는 지금도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삽시다.
Ⅴ. 베드로는 상황이나 경험보다 말씀의 권위를 우위에 두고 순종함으로써 예수님의 은혜에 반응함(5절)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베드로의 반론이 5절에 나옵니다. 즉 베드로는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명령이 경우에 맞지 않는다고 간접적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서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말하면서 순종의 의사를 밝힙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순종 의사는 매우 감동적입니다. 어부로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 입장에서 보면, 고기 잡는 것은 가장 자신 있는 일일 것입니다. 베드로의 결정은 가장 자신 있는 것에서 자기 경험보다 말씀을 의지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감옥에 가두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우리 경험이나 상황 속에 가두는 데는 매우 익숙합니다. 그래서 경험과 상황에 부합되는 것만 ‘진리’라고 인정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만 순종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자신을 속이기도 합니다.
‘말씀에 의지한다’는 것은 말씀의 진실성에 대한 100% 확신이 있을 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기 배 위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약간의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이 발동하여, ‘밑져야 본전이다’라는 마음으로 순종하기로 결심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믿는 대상이 좋을 때는 ‘희미한 확신’조차도 좋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약간의 떨림과 두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첫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100% 믿어지면 철저하게 순종하겠다는 것은 믿지 않고 살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연애하다가 결혼할 때, 그 배우자감을 100% 알고 확신했기 때문에 결혼을 결심하는 사람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단 한 구절이라도 10년 이상 꾸준하게 순종하고 있는 말씀이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말씀의 전문가는 성경 전체 내용을 잘 알고 그것을 논리정연하게 잘 설명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 말씀의 전문가입니다. 어떤 사람의 됨됨이와 행동을 생각할 때, 특별한 성경구절이 생각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구절의 전문가인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먹지 않으면 그 약효를 체험할 수 없듯이, 말씀은 순종하지 않으면 그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구절만이라도 제대로 순종함으로써 말씀의 능력뿐 아니라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베드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Ⅵ. 베드로는 만선(滿船)의 기쁨에 눈멀지 않고, 그것을 계기로 예수님 앞에서 참된 자기 발견을 합니다(6-10절 상)
예수님 말씀에 순종한 결과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경험 많은 어부들이 모두 놀랄 정도의 만선(滿船)이 된 것입니다. 하룻밤을 꼬박 새고도 고기를 잡지 못한 어부들 입장에서 보자면, 기적 같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만선에 눈이 멀지 않았습니다. 만선 자체가 주는 기쁨에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8절 후반절에 나오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우리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보자면, 베드로는 매우 기뻐하며 예수님께 크게 감사하면 될 일일 것입니다. 조금 더 나간다면 잡은 생선에 대한 십일조와 감사헌물을 좀 넉넉하게 하는 것으로 끝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베드로의 이런 고백과 태도가 정상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또는 하나님을 참되게 만난다면, 베드로 같은 태도가 자연스럽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우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도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사 6:5)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전 존재가 당혹스러워지는 경험을 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함부로 만홀이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전 존재의 밑바닥을 흔드는 경험으로 예수님을 만났기에 ‘만선’의 기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습니다. 반면 우리는 예수님을 너무 내 입맛에 맞게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 세계의 창조자이시며 도저히 마주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하신 예수님을 내 상상력 속에 가두고 내 상상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예수님을 인정하는 오만을 범하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더라도 놀라지 않습니다. 베드로처럼, “나는 죄인이니 내 곁을 떠나소서”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 살아계신 예수님을 보기 전에 내 머리 속에--내 상상력 속에--있는 예수님, 하나님을 먼저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상상력 속에 가둔 하나님 속에 내가 다시 갇히게 됩니다. 신자의 신앙행습과 삶이 왜곡되는 것은 이런 이중 구속(拘束)과 관계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왜곡 현상이 예수님을 자기 소원 성취의 수단으로 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신자가 자기 목적을 성취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하고, 그 자기 발견에 기초하여 자신의 목적이나 소원을 완전히 바꾸게 만드는 것이 기독교의 요체입니다. 베드로가 만선의 기쁨에 눈 멀지 않고, 오히려 자기 발견에 눈이 크게 떠진 경험을 우리 모두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Ⅶ. 정직한 자기 발견에 참된 위로와 비전을 주는 것으로 응답하는 예수님(10절)
예수님은 정직하게 자신을 발견한--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한--베드로를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정서적 안정과 함께 참된 삶의 비전을 주십니다. 10절 하반절에 나오는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이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죄성만을 강조하는 부정적 또는 소극적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성을 깨닫게 함으로써 만족을 누리는 가학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정직한 자기 성찰이 이루어진 사람에게 예수님은 참된 위로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무서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 만족만을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무력한 자가 그저 말로만 위로하는 값싼 위로가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너무나 거룩하셔서 그 앞에 서면 모든 사람이 그 순결성 때문에 두려워 떨게 되는 분이 무서워 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위로를 맛본 사람은 이후에는 그 어떤 대상--세상 권세가, 재력가, 고결한 인격자 등--앞에서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큰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성찰한 자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위로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직하게 자신을 성찰한 베드로에게 좀 더 적극적 대처를 해주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라는 10절 하반절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을 예수님 즉 생명에로 이끄는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살려주신 것만도 큰 은혜인데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일을 맡기시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인간 생명의 가치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게 고귀합니다. 그러나 그가 산 인생의 가치는 그가 사는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누리고, 그 생명을 나눠주며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지는 일을 평생하게 해주신 것은 우리 인생의 가치를 한 없이 고귀한 것으로 만드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Ⅷ. 만선(滿船)을 버리고, 예수 제자의 길로 나서는 베드로(10절하-11절)
예수님에게서 참된 위로와 참된 삶의 비전을 받은 베드로의 반응을 본문 11절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여기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라고 한 것은 만선의 배를 버려두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삶이 완전히 뒤바뀐 것임을 보여줍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만선의 꿈’을 갖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어젯밤에도 그 꿈을 좇느라고 밤을 샜습니다. 그리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순종할 때도 그는 ‘만선의 꿈’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만선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베드로는 만선보다 예수를 더 귀하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능력의 진수를 베드로의 이런 변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빈배를 만선으로 만든 것에서도 나타나지만, 만선을 좇던 사람들이 만선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게 만드는 데서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에서 만선은 하나의 소도구 역할밖에 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만선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는 길에 나섬으로써 베드로는 예수 구경꾼에서 예수 제자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 제자의 길 즉 ‘버리고 따르기’와 관련하여 우리가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적용할 때 문화적 요소와 초문화적 요소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거할 때는 실제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야만 예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은 성령으로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서나 예수를 따를 수 있습니다. 직장, 가정, 학교 등 어디에서라도 우리는 예수를 따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을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것들이 우리 마음 속에서 예수님보다 우선순위를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모든 것을 소유하면서 예수님을 좇되, 여차 하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의 마음은 늘 견지하면서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삶의 최우선에 두어야 한다는 것은 초문화적 성격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가정이나 직장 등을 버려야 하는가와 관련된 문제는 ‘문화적 성격’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실 때와는 달리, 성령으로 계실 때인 지금은 실제로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Ⅸ. 자주 점검해야 할 예수 제자의 길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4:6). 따라서 예수 제자의 길은 ‘생명의 길’이고 ‘진리의 길’입니다. 이만한 가치가 세상에 없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 보면, 우리가 만약 예수 제자의 길을 가지 않으면, 허위의 길, 죽음의 길을 갈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고 사십시다.
또 한 가지 결론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요 21:19-21절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두 번씩이나 권면합니다. 한 번 예수 제자가 되었다고 해서 끝까지 자동적으로 제자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예수 제자의 길을 제대로 걷고 있는지를 부지런히 점검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제자의 삶을 잘 영위할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며 사는 우리가 됩시다. 샬롬. (김병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