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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체험을 중요시하라! (행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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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체험을 중요시하라! (행 9:1∼9)


성경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든 바른 믿음에는 확증과 증거가 있어야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도 믿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증거되는 삶을 살았더니 축복하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 그 믿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정말로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삶과 생각과 마음 속까지도 감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나는 지금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한 순간도 숨겨질 수 없고, 감추일 수도 없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의 그 믿음을 세상 사람들도 인정해 줄까요?
여러분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세상 사람들이 인정할까요?

사람이 지식이 부족하면 미련해집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지식이 풍족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식을 위한 지식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만들뿐입니다. 어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지식이 부족했던 사람들입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당대에 가장 지식이 풍부했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관한 한 그들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지식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자신들이 아는 그 지식이 자신을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지식으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결국 문제는 그 사람의 성품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사람이 재물이 부족하면 초라해집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물질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재물을 위한 재물은 어리석은 젊은 부자를 만들뿐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서가 똑같이 기록하고 있는 한 사건이 있는데 바로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을 보십시오. 이 사람에게는 분명히 재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에게도 영혼 구원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영혼에 대한 갈증을 해결해 보고자 예수님께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이 한 말씀을 듣고는 근심하면서 떠나갔습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결국 이 청년의 문제도 성품의 문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리의 눈을 떠야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의 성품이 주님을 닮아가야 됩니다. 인간의 관심은 혼의 문제이기 때문에 인격을 중시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성품에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영의 문제는 바로 성품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육적인 성질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옛 어른들도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질대로 사는 사람은 자기 성질 때문에 망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질대로 살지 마십시오. 성질대로 사는 사람은 자기 감정을 조절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 감정 때문에 넘어집니다. 사단도 이것을 잘 알기 때문에 시시때때로 우리의 감정에 충동을 일으킵니다. 내 안에 있는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성질을 자꾸만 돋구어서 열을 받게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잊지 마십시오. 성질은 자기만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까지도 힘들게 합니다. 결국 성질대로 사는 사람은 그 성질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다듬어주시는 성품으로 사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아십니까? 성령은 그 사람의 성품을 붙듭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 사람의 성품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 있습니다. 우리의 성품은 마치 은사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성품은 그 모습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 성품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히면 온유해집니다. 우리의 어떤 성품도 하나님의 은혜에만 붙잡혀 있으면 귀하게 쓰일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질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품으로 사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세렝게티 평원에서는 수많은 동물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비옥한 평야이기는 하지만 비가 없으면 모든 초목과 생명이 죽습니다.

그러나 비만 내리면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생명들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메말라서 도저히 생명이 없을 것만 같았던 초목들이 비를 맞으면서 생명의 신비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삭막하던 평원이 한 순간에 내리는 비로 모든 초목과 동물들에게 안식과 생명을 주는 초원으로 바뀌어집니다. 비가 내렸더니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우리 인생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메마른 심령들이 살아나는 방법이 무엇일까? 영혼의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심령들에게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있습니다. 그 영혼에 성령의 단비를 맞으면 됩니다. 성령의 단비를 맞으면 죽어가던 심령들이 새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의 영혼에 성령이 임하시면 권세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의 심령 깊은 곳까지 성령의 충만함으로 채움을 받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왜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만 합니까?
여러 가지 논쟁이 있지만 사실은 간단합니다. 인간은 육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욕심입니다. 육신의 안목입니다. 조금 나은 사람은 지적 시각, 논리적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나면 영적 시각이 생깁니다. 영적 시각에 들어가면 육적 시각이나 지적 시각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힘과 지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이 시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영적 세계가 보여지기를 축복합니다. 영안의 눈이 열려지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내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법을 보게 하옵소서.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주여, 나에게 주의 놀라운 사랑을 나타내시옵소서."
그렇게 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탕자도 쉽게 살려고 자기의 것을 받아서 아버지 품을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면 거기에 자유가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거기에 풍성함이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고난과 고독과 아픔과 극심한 빈곤이었습니다. 이 어리석은 아들이 그때서야 아버지의 뜻대로 살려고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품에 돌아왔을 때 참된 자유가 있었습니다. 풍성함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내 자신을 과거와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과거와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만 회복할 수 있다고 하면 모든 변화는 즉시 발생합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은 경제적인 문제, 사람의 문제, 집안의 문제, 자기 내면의 문제 등을 가지고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우리가 그 문제를 발생시킨 그 당시에 갖고 있던 사고방식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육적인 것, 세상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만 받고 나면 다 해결됩니다. 이것이 제일 큰 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사람의 고통은 생각의 부족에서 옵니다. 사람의 모든 문제는 마음의 굳어짐에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심보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대체적으로 얼굴이 굳어 있다는 것입니다. 심보에 문제가 있는 사람의 얼굴은 그렇게 밝지 못합니다. 어딘가 어둡고, 심술이 나 있어 보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얼굴에는 방긋 방긋 웃음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환하게 빛나기를 축복합니다.

심보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얼굴만 굳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투가 삐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비꼬는 소리를 합니다. 똑같은 말을 해도 삐딱하게 말합니다. 거친 말을 하고, 상처난 말을 합니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그 말에 저주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저와 여러분의 말이 바로 세워지기를 축복합니다. 마가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여기에서 새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혀가 꼬부러지고 알아듣지 못하는 이상한 말을 하는 그런 방언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새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그들의 언어가 새로워졌다는 말입니다. 저주의 말이 축복의 말로 바뀌어집니다. 거칠고, 상처난 말이 부드럽고 치유하는 말로 바뀌어집니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말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로 바뀌어집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집니다. 누가요? 예수를 믿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이 말입니다.

이 은혜로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여호와의 신으로 권능의 채움을 받아 내 인생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이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에 보면, 어쩌다가 인생을 잘못 살아서 돌에 맞아 죽어야만 했던 젊은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든 사람들이 돌을 들어 치려다가 마침 거기 계신 주님께 물어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여인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현행범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질문입니다. "돌을 들어 치라!"고 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자신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죽이지 말라"고 하면 현행범이므로 당시의 법에 대해서 반대하는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부터 돌을 들어 쳐라!"

보십시오. 자신들의 인생을 과거와 다르게 볼 수 있도록 저들의 시각이 바뀌고 나니까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속에도 이런 꿈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이 바뀌는 영의 눈이 뜨여지는 놀라운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속에서 일어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인생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영의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여호와여, 내 눈을 열어서 나를 사랑하시며 내게 주의 기이한 능력을 다시 나타내심을 보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모두가 잘 되는 길이 분명히 있습니다. 죽은 것같이 싸늘한 인생은 결코 생명력 넘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매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영적 체험을 중요시 하십시오. 그렇지 않은 것은 다 가짜입니다. 체험되지 않은 진리는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체험되지 않는 신앙은 나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나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공급해 주십니다. 아십니까? 하나님의 성령으로 채움을 받은 사람은 사회나 역사 앞에 매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육체적인 미, 지성적인 미가 있습니다. 또 영적인 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쉐키나―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해서 인간이 갈 수 있는 최고의 선이라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고 나니까 그 얼굴에 광채가 있어 수건을 썼다고 했습니다.

학개 2장 21절에 보면,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진동하는 사건은 성령의 사건이고 영적 체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내 가슴이 뜨거워지며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자유로워지는 종교로부터의 해방은 어떤 물질적인 해방이나 세상에서의 해방보다도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으로 복음의 능력을 누리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승리로 죄와 사망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십시오.

주님은 물으십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으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친교를 갖고, 교회에 다니고, 기도를 배우는 것들이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말세에 믿는 자들에게 부어준다고 약속하신 성령을 받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내 힘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도 과거와 나를 다르게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만 임하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진수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복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것을 계획해 보고,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길을 가 보십시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권능으로 채움을 받는 것입니다. 내 평생 하나님 앞에서 복된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 모든 심령들에게 말합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채움을 받으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능력에는 그렇게 심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본인의 의욕입니다. 불같은 의욕, 불같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이 많아서 위대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적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한 불같은 의욕을 품은 사람들이 역사를 창조해 갑니다. "한 번 하나님만 믿고 해 보리라"고 도전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종교꾼은 싸늘합니다. 종교꾼은 이기적입니다. 종교꾼은 탐욕적입니다. 종교꾼은 자기 배만을 위합니다. 그러므로 종교꾼은 되지 마십시오. 영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따뜻합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해보려는 의욕이 생깁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창조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늘의 역사를 맛보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영적인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변할 때에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인간 변화에 대한 원칙 교과서는 성경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 인생이 변화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인생의 주인공은 사도 바울이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헬라 철학의 본 고장인 다소 출신입니다. 그는 태어난 환경 때문에 헬라 철학을 섭렵했습니다. 그는 당시에 60만 밖에 안 되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철학에 대해서도 잘 압니다. 뿐만 아니라 다소에 살았기에 동방 신비주의에 대해서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당대 최고의 스승인 가말리엘을 만나 학문적으로 세계 최고의 수준에 이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위협과 살기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남녀노소 누구나 결박하여 죽이고 고통을 주면서 사는 것이 제일 옳다고 믿었습니다. 되지도 못하고 된 줄로 착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전혀 변화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의 변화의 과정을 보십시오. 하루는 살기가 등등하여 얼굴에 위험한 무서움을 품고 다메섹에 이르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그의 얼굴에는 "쉐키나―하나님의 영광"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그를 둘러 비취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여러분 심령에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둘러 비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와 바울을 비추었던 쉐키나, 하나님의 영광이 지금 이곳에, 여러분의 심령에도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그 앞에 모든 지식과 이론을 초월하는 생명의 빛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 거룩한 영적 체험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 빛이 나타나니까 사울은 엎드러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소리를 들으라"고 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 아들아, 내 딸아, 네가 어찌하여 방황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의심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나를 속이느냐?"

이런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종교꾼은 이 소리하고는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그냥 종교적 행위로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어긋난 길로 가고 있음에도 불굴하고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면 그는 종교꾼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시간마다 코람데오, 하나님을 의식하고 감격으로, 기쁨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 갑작스런 초자연적인 사건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응답이 무엇이겠습니까? 사울이 던진 말은 오직 한마디뿐이었습니다.
"뉘시오니까?(who are you?)"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아시는데 그 아들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생명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가족입니까, 친구입니까?
여러분은 인생의 마지막을 한 번 상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장례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십니까?
제일 먼저 존경과 사랑을 가지고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어디로 갈 것 같습니까?
어떤 말을 남기고 싶습니까?
어떤 평가를 받고 싶습니까?
죽음 직전에 무엇을 양보 못하고 무슨 고집을 피우겠습니까?
그 마지막 순간에도 "내가 그것을 했어야 하는데, 내가 그것을 가졌어야 되는데…"라고 말하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삶의 마지막 결산은 아도나이, 내 생명의 주인을 찾는 그 시간에 발견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잘 믿으셔야 됩니다. 잘 믿으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라도 잘 믿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과 오고 오는 세대에 이 땅을 살아갈 여러분의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정말로 잘 믿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옆 사람에게 권해 보십시다.
"예수 잘 믿으셔야 됩니다!! 우리 끝까지 예수 잘 믿으십시다!!"

사울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무서운 충격! 그는 저항할 수 없는 하늘의 능력에 정복당했습니다. 그가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고서 깨어 일어나 보니까 눈을 떴지만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사실 과거에는 장님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과거를 보면 실체를 보지 못하는 장님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눈은 떴지만 볼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귀가 열렸지만 들을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나는 장님 같은 너의 인생을 구원할 예수라!"

'아나니아'란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라는 말인데, 그 사람이 와서 안수했을 때 사울의 눈이 열리며 새로운 세계가 보였습니다. 올 때의 발걸음과 갈 때의 발걸음이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올 때의 시각과 갈 때의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천국 지향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오직 그 분만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보십시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이 영적 체험을 일평생 소중하게 붙잡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자신이 경험했던 부활의 주님과의 만남에 대한 영적 체험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강권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자신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이 한 번의 영적 경험이 그로 하여금 푯대를 향하여 부름을 상을 바라보며 달려갈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도 영적 체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과 임재를 경험했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사울을 찾아오셔서 바울되게 하셨던 주님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다면 그 영적 체험을 소중하게 간직하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그 영적 체험을 아무런 가치가 없는 휴지처럼 취급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짓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께로부터 받은 영적 체험을 중요시하십시오. 영적 체험을 중요시하라는 말은 결국 여러분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변화된 성품을 보여주라는 말입니다.

아십니까? 변화되지 않는 삶은 거짓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신앙은 다른 사람들이 체험한 것을 내가 믿는 간접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 체험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내 신앙이고, 나 자신의 영적 체험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영적 체험을 소중하게 간직하셔야 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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