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1-8)
본문
필립 부룩스라는 유명한 사람이 현대인들은 세 가지 형태로 살아간다고 규정을 했습니다. 첫째는 피상적인 낙관주의자들이 지구촌에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되고 있는데도 그저 잘 되어 간다고 사람들에게 속임수로 낙관론을 펼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염세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도피하고, 은둔하고, 좌절하고, 존재와 역할을 부정하고, 자기 할 일을 하지 않는 염세주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번째로 진정한 낙천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은혜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책임 있게 살아가며, 고난을 이겨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지구촌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그 살아가는 형태는 세 부류안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려한 구호들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구호 중에 가장 많이 나오는 구호가 ‘하나 되자’ ‘개혁하자’는 말입니다. 이 시간 ‘하나 됨’에 대한 말씀을 나눌 때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큰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 되자’ ‘여야가 하나 되자’ 교단, 교회, 기업, 군대조직, 가정까지도 하나가 되자는 구호아래서 하나 됨을 추구합니다. 하나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나 되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되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괴로워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하나 되기 위해서 회의를 하고, 구호를 외치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각서를 쓰고 온갖 노력을 하지만 여전히 하나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모두가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존 그리샴 박사가 오랫동안의 상담과 연구를 거쳐 낸 책인데 지구촌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는 아주 다릅니다. 화성과 금성은 너무나 다른 별입니다. 거기에서 온 남녀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사랑을 할 때 얼마나 다른 점이 많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점이 다른데도 나를 닮으라고 하는 것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고 기분이 좋을 때는 다르다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개성이 됩니다. 그러나 불화하고 갈등이 일어날 때는 다르다는 것이 전부 문제로 등장합니다. 우리들은 지금 어떻습니까? 다르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까? 다르다는 것이 개성이 됩니까?
사람이라는 것은 남녀를 구분해서 보면 사실은 대부분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나서 먹고, 입고, 자고, 살고, 그러다가 죽는 것은 남녀가 구별이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그저 1~2%만 다를 뿐이지 사실은 다 같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거기에 차별이 없습니다. 창조했다는 것에 차별이 없습니다. 다만 재료가 다릅니다. 남자는 흙으로,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하나님이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흙으로 지은 것과 갈비뼈로 지은 차이가 근본차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하나님이 사람으로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흙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갈비뼈 하나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사람으로 창조를 하셨다는 것에서 똑같다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보면 사람은 똑같습니다. 잘 났다 못났다, 배웠다 못 배웠다, 가졌다 못 가졌다는 것은 그저 살아가면서 시비하는 조건인데 인간을 종말론적으로 보면 똑같습니다. 마지막 순간은 똑같습니다. 가진 자답게 죽는 법도 없고, 배운 사람답게 죽는 특별한 법이 없습니다.
종말은 같다
어느 남편이 아주 잘난 사람입니다. 출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한 가지 결함이 있었습니다. 아내를 너무 구박합니다. 아내는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은, 자기편에서 보면 무식한 여자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자기 아내를 많이 구박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남편이 먼저 치매가 들었습니다. 병실을 찾아온 사람들 앞에 이 부인은 자기 수치이면서도 “그렇게 잘났더니 친구도 못 알아보고 자기 마누라도 못 알아보는 등신이 되었네.” 하면서 저주 섞인 푸념을 하더랍니다. 이승만 박사가 하와이에서 만년을 보냈습니다. 숨은 이야기 중에 그가 영어를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분은 평생 영어 속에서 산 사람입니다. 영어를 한국말 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어를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통역관을 세워서 대화를 했다는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잘났다는 것은 끝에 가면 하나도 차이가 없습니다. 가졌다는 것, 배웠다는 것을 가지고 사람을 구박하면 안 됩니다. 종말론적으로 인간은 남녀 간에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순간부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의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것을 고백하고 예수 안에서 하나 됨을 확인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주 안에서 우리는 저절로 하나가 됩니다.
초대교회 때 로마는 1/3이 노예들입니다. 피지배 민족들을 끌어다가 노예로 부렸습니다. 그 노예들이 복음을 받고 교회에 많이 들어왔습니다. 교회 안에는 노예나 왕족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다 하나라고 성경이 선언했습니다. 여성들도 천대받던 그 시절에 예수 믿고, 교회 안에서 사람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귀신들린 자, 세리, 이방인, 모든 죄인들도 예수 믿고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요 소망이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분이시라”고 선언합니다. 하나 됨의 근본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만유의 아버지가 되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를 다스리시고,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 됨의 원칙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됨의 원칙
첫째는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만유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교회도 성령도 소망도 주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구원의 근본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존재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은 어떤 조건보다도 하나 되는 절대적 조건입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했습니다. 부름 받은 우리 중심으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 중심으로 교회가 하나 됩니다.
두 번째는 하나 됨의 값을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하고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다섯 가지 조건이 나왔습니다. 하나 되자고 하면서 하나가 안 되는 경우에 오늘 이 말씀을 잘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의 교훈은 하나가 안 되는 모든 것을 하나 되게 하는 열쇠입니다.
첫째, 겸손으로 하나 되라는 것입니다. 겸손의 성경적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손을 들고 ‘나는 주님을 왕으로 모시겠습니다.’ 이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오늘 여기 나오신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 분 앞에 바로 살겠다고 무릎 꿇고 항복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예수님께 항복하는 것에서 겸손이 성립됩니다. 예수만이 주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왕이시라고 할 때 우리는 모두 신하가 되는 것이고, 그 분 앞에 우리가 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유로 하라는 것입니다. 온유는 고사성어가 잘 말해줍니다. 이 한자말과 히브리원어와 헬라어로 보면 의미가 통하는 것이 더러 많이 있습니다. 온유라는 말은 내유외강입니다. 안으로는 부드럽고 밖으로는 강한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의 근본 뜻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예수님께서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온유하다고 한 것은 안으로는 사랑의 주님이면서도 밖으로는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십자가의 무시무시한 형벌을 참아내는 강직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온유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겸손하다고 했습니다. 그 겸손은 자기의 뜻을 죽이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주님의 겸손입니다. 아버지의 뜻 앞에 복종하는 것이 주님의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온유와 겸손이라는 용어는 쉽게 사용하면 안 됩니다. 상당히 무게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겸손하자 할 때는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자는 것입니다. 온유하자는 것은 안으로는 부드럽고 겉으로는 강직해야 합니다. 우리의 성품은 부드럽고 일할 때는 과감하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범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신 데서 증명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희생의 근본입니다. 희생의 실체입니다. 희생이 있는 곳에 내유외강이 일어납니다.
내유외강의 지상의 모델은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만큼 자식을 향해서 안으로 여리고, 밖으로 강한 존재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자식 때문에 때로는 벌레처럼 취급받을 때도 있고, 낮아질 때도 있고, 못 먹어도 굶어도 개의치 않는 것이 우리 어머니입니다. 자식 때문에 모든 체면을 다 버릴 줄 아는 것이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그 자식 때문에 목숨을 던지는 것이 어머니의 강함입니다. 어머니만큼 강한 존재가 없습니다. 어머니만큼 용감한 존재가 없습니다. 누가 어머니의 용기에 비교가 됩니까?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용기를 어디서 비교할 수 있습니까? 왜 어머니가 그렇게 부드러우면서 강합니까? 자식을 위해 전적으로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만큼 부드럽고 강한 존재가 없습니다. 자기 희생이 바쳐진 그 자식은 너무 귀합니다. 그 자식을 위해서 자기는 벌레처럼 멸시를 받아도 좋다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 내유외강의 실체가 희생입니다. 희생이 있는 곳에 내유외강이 일어납니다. 희생한 대상 앞에 내유외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은 자기 극복입니다. 자기 극복이 있는 거기에 다른 것도 극복이 됩니다. 사람들이 인내에 실패하는 것은 자기 극복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극복하고 나면 다른 것도 다 극복합니다. 자기한테 걸리면 그 외의 것도 다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은사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입니다. 입으로 사랑한다 하면서 마음으로 거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용납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수용하는 것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평안의 줄로 매어라. 이것도 실천적 행위를 말합니다. 줄을 가지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고 평안의 매는 줄이 되라는 것입니다. 묶어놓은 줄이 아니고 매는 줄이 되라는 것입니다. 실천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은 너무 완고하고 너무 사납고 너무 공격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갑니다. 그야말로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으로 용납하고, 평안의 줄로 서로 매는 이러한 대가를 가지고 하나 되자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몫 다 챙기고, 자기 입장 다 세우고, 자기 할 말 다 하고 남을 배려하는 일 없이 하나 되자고 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권위 있는 국회 단상에서 여야 위원들이 어떤 특정사안에 대하여 발언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사나운지 모릅니다. 너무 공격적입니다. 옛 이야기입니다. 여야가 자기들의 입장에서만 발언을 하지 국민과 역사와 민족을 의식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국민을 의식하고 발언하면 그렇게 안 됩니다. 모두가 자기 입장을 가지고 이야기 하니 사나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하나가 됩니까? 상생정치는 벌써 물 건너 가버렸습니다. 희망찬 내년을 설계할 연말에 우리 앞에 펼쳐질 정치투쟁은 비관적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가 되지 않습니까? 하나 됨의 값을 지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손해 보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남을 배려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값을 지불하는 것인데 그것을 안 하려고 자기 몫만 챙기려는 곳에는 어떤 분야도 하나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들려옵니다. 에베소서 2장 29절에 “너희는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오늘 우리는 서울 시민으로 만난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 시민으로 만났습니다. 예배드리는 우리가 오늘 예배드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하늘나라에 그대로 갑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도 하나님을 영원토록 섬길 하늘나라 시민으로 만난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 됨은 이렇게 하나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 되지 않으려 해도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서도 한 하나님을 섬길 하늘나라 시민으로 이미 하나 된 존재입니다. 이것을 힘써 지켜가라고 했습니다. 하나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된 것을 성경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는 아무리 도피해도 안 됩니다.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것은 빠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가족의식을 회복해야
“하나님의 권속이라.”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가족보다 가까운 관계는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라 했습니다. 가족은 아주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가족이 그렇게 귀하면서도 무관심하거나 등한히 하고 상처 내는 일이 가족끼리 제일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족보다 진한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가족을 대하고 사랑하는데 방법이 서툴러서 가족을 실망시킬 때가 많습니다. 그것도 보완을 해야 합니다. 가족에게 함부로 하는 것을 이웃사람에게 하면 형사문제가 될 것이 많습니다. 남들 앞에는 조그마한 대접을 받은 것도 전화를 해서 감사하다고 인사까지 하면서 가족의 고마움에 대해서는 표현을 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문제시 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인사 한번 빠지면 다음에 만날 때 눈빛이 다릅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가족에게 실망을 해도, 가족 때문에 손해를 보아도 밥상에서 숟가락은 듭니다. 속으로 미워도 밥은 같이 먹습니다. 눈물은 흘러도 밥은 함께 먹습니다. 이것이 가족입니다.
그런데 성경만 너희들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도 보험회사 구호를 보십시오. “가족처럼 모시겠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가입할 때는 가족처럼 대하는데 보험금을 탈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약관을 내 놓고 따집니다. 늑대처럼 호랑이처럼 변하는 것이 보험사입니다. 그러나 보험사는 그렇게 하더라도 교회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보고 “너희들은 하나님의 가족이니”라고 했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처럼 우리가 살아야 하는데 왜 가족 아닌 것처럼 자꾸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보험사처럼 가입할 때 다르고, 탈 때 다른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직자는 목사에게, 평신도는 교인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하는 일은 성직이고, 교인들이 갖고 있는 직업은 그냥 직업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의 개념을 달리 합니다. 제가 성직자로서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이 순간은 성직자입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고 일상적으로 저와 여러분이 만날 때 저는 성직자가 되지 않습니다. 똑같은 평신도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고,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똑같습니다. 기능과 직능과 하는 사역 때문에 그 순간은 성직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할 때 바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성직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업이 성직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성직입니다. 목사가 예배 인도하면서 영광을 드러내는 것과 여러분이 직장에서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다 성직이 됩니다. 여러분은 성직자가 되어 성직을 누리려 하지 말고 평신도로서 얼마든지 성직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평신도가 되어서 성직을 수행하려 하지 말고 성직자의 위치를 바로 지킴으로서 만족하는 것입니다.
특신도를 경계해야
그러나 우리들이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즘 만들어낸 말입니다. ‘특신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평신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성직자로서 그것으로 만족하면 됩니다. 목사도, 교인들도 특신도가 되면 안 됩니다. 교인들이 주님의 양들인데 목사 자신의 양들처럼 교인들을 군림하고 이용하는 이런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특신도가 되면 안 됩니다. 교인들도 특신도가 되면 안 됩니다. ‘나는 너보다 잘났다’ ‘나는 너와는 다르다’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가족을 멸시하고 상처내고 윽박지르고 같은 교인위에 특신도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2절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목사는 성직자로 제자리 지키고, 교인들은 평신도로서 만족하면 됩니다.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의식입니다. 프라이버시, 사생활, 비밀을 말할 때 쓰는 말입니다. 어느 호텔이나 관공서에 가면 ‘프라이빗 룸’이라고 써놓은 것이 있습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하는 방들이 있습니다. ‘프라이빗’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죄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프라이빗이라는 것은 혼자 있겠다는 것입니다. 개인화를 말합니다. 혼자 있고자 하는 심리는 죄를 짓는 심리입니다. 죄를 묵상하는 심리입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 같은 곳에서도 남자를 지어 놓고 보니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해서 여자를 지어서 짝을 지어주었습니다. 인간이 프라이버시를 살린다 해서 좋은 명분을 세우는데 프라이버시는 죄입니다. ‘우리 교회는 교인들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한다, 우리 교회는 남의 말 잘 안 한다, 우리 교회는 프라이버시가 살아 있어. 현대적인 교회야’가 아닙니다. 프라이버시가 살아있다는 말은 죄가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프라이빗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으면 숨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받고 혼자 개인화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받으면 열리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의 닫힌 것을 열어주시는 영입니다. 몰랐던 것을 알게 하는 영입니다. 숨어 있던 것을 끄집어내는 영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나 되게 한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숨는 것이 아닙니다. 프라이버시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받은 은혜가 있거든 활짝 여십시오. 성도의 가정에서 받은 축복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활짝 여십시오.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열게 합니다.
맺는 말
우리는 이미 주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하나 됨을 살려가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 되기 위해서 값을 지불하시기 바랍니다. 대가를 지불하면서 하나 되자 하면 하나가 됩니다. 이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 우리 주변에 하나 되자는 구호는 난무하지만 하나 되는 결과가 없습니다. 남북도 하나 되어야 합니다. 장애물이 굉장히 많습니다. 여야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가족처럼 모시겠다는 보험사의 두 얼굴이 아니라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이고,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이것을 성령 안에서 끝까지 지켜가야 합니다. 하나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 됨의 모범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