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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죽는 신앙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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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현 목사 설교(2006/07/02)

날마다 죽는 신앙의 신비
고린도전서 15:31


불란서의 실존주의 철학자인[샤르트르]의 아내[시몬느 드 보봐르]가 쓴 책 중에<인간은 모두 죽는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그 서두에 보면“인간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그 무엇도 인간에게는 도움이 되는 게 없다.”는 말로 인간의 무능함과 나약함을 이야기 합니다. 결국 인간이란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지혜로우려면 세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하나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야 할 날이 얼마 남았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결국 이 내용을 종합하여 우리 모두는 다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나는 날마다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또 한 종류의 사람은“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떤 사람이 현명한 사람일까요? 어리석은 사람은 날마다 산다는 것만 생각합니다. 죽음이 없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날마다 산다고 말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날마다 죽습니다. 태어나는 것이 죽음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죽음을 향해 사는 것입니다.
독일의[쇼펜하우어]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살아있을 때보다 죽은 후에 더욱 학문의 빛을 발했던 철학자였습니다. 그가 말년에 남긴 이야기는 유명합니다.“지금까지 인생이 무엇인지 또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라는 문제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왔지만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면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멈추지 않는 열차와도 같은 것입니다.
<날마다 산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가<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생명의 문제는 모든 것에 우선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이 생명의 문제입니다. 잘 사느냐, 못사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자로 사느냐, 가난하게 사느냐는 것은 대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공평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모든 사람이 늙는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늙지 않고 가난한 사람만 늙는다면 세상은 참 불공평 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죽음에 대한 공평성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죽지 않고 무식한 사람만 죽는다고 하면 억울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생명문제 앞에서 사람은 공평합니다. 이 앞에서는 돈, 명예, 권력, 쾌락, 지식, 이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빠르고 늦고의 차이일 뿐이지 하는 수 없이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임을 알아야합니다. 부자입니까?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잠깐입니다. 건강하십니까? 뽐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금방입니다.
[톨스토이]는 그의 참회록에서 어리석은 인간에 대하여 이런 우화로 풍자하고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광야 길을 걷다가 갑자기 맹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맹수를 피하여 도망치던 그 나그네는 마침 한 우물이 있어서 우물 구덩이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우물 밑바닥을 보았더니 큰 용이 나그네를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위를 쳐다보니 맹수가 자기를 집어삼킬 듯 노리고 있고 밑은 큰 용이 입을 벌리고 있는 아슬아슬한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나그네가‘이제 나는 죽었다.’하고 체념하려는 순간 눈을 들어 옆을 보니까 마침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 가지가 우물 있는 데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그네는 나무 가지를 붙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무 가지를 의지하고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쳤으나 힘은 자꾸만 빠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쥐가 나무 밑 둥을 갉아먹는 소리였는데 흰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이런 아슬아슬한 위기 속에서 눈을 들고 나뭇잎을 봤을 때 벌이 꿀을 만들어 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위기에 처한 것도 잊은 채 꿀을 혀로 핥아먹고 있었습니다. 이 나그네는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야 되겠다는 노력도 잊은 채 단 꿀만 빨아먹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우화를 인용하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인생은 어리석은 것, 나도 어리석었지 이 세상 향락에 취하고, 이 세상 욕심에 취하고, 죽음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생각 없이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노라.”
흰쥐와 검은 쥐가 마지막 의존하고 있는 생명의 줄기를 갉아먹듯이 흰쥐와 같은 밝은 낮과 검은 쥐와 같은 캄캄한 밤이 내 생명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 날 그 날“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나”, 그 날 그 날“무슨 취미로 사나”하는 욕망에 도취해서 인생을 끝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죽어가면서도 모르고 사는 줄로 착각하는 인생,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삶에 깜짝 놀랄 고백을 사도 바울이 보여줍니다.“나는 날마다 죽노라”이 말씀을 의역하면“나는 매일 죽으며 삽니다. 나는 매일 죽음에 노출되어 삽니다. 죽음 앞에서 살아갑니다.”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 말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실제로 날마다 죽음의 위기를 맞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어느 한 순간도 살아남을 수 없는 죽음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가 고후11장에서 친히 자기의 모든 죽음의 위기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이것이 실제적인 사도 바울이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고도 또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이제는 죽기를 각오하고 사는 삶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삶을 산다는 고백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그 옛날 다메섹 도상에서 이미 죽었다고 봐야 됩니다. 고로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자기를 위하는 생을 마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생을 산다는 거룩한 고백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말입니까? 이 말의 또 다른 의미는“날마다 나를 죽여서 주께 제물로 드린다. 주님이 아니었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겠는가 영광스러운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었기에 나의 생명을 주님께 제물로 드린다.”라는 말입니다.“내 육신의 정욕과 인간의 욕심과 세상적인 모든 것이 날마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육체적이고 생리적인 노쇠함으로 맞이하는 죽음이 아닙니다. 자기가 날마다 죽지 않고는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바울은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했던 또 다른 고백“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말씀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 보세요. 이 말씀에서<나>라는 말이 여섯 번 나오고<산다>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삶의 기본원리는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내가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원리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란 옛 사람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삶입니다. 옛 생각, 세상 것, 세속적 욕망을 계속적으로 부정하고, 동시에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생을 계속적으로 긍정하고 그리스도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을 거듭 거듭 확인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옛 사람이 죽었는가? 새 사람으로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확증하고, “오늘 이 날이 끝난다면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가?”를 끊임없이 재확인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죽어야 하는데 죽지 못했습니다. 끊어야 할 것이 있는데 못 끊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우셨으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까?“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이게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날마다 죽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복 받기를 원하지요? 어떤 복을 원하십니까? 분명한 것은 예수 믿기 전하고는 바라는 복이 달라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전과 달리 예수 믿고 얻을 복이 하나 있습니다. 그 복이 바로 날마다 내가 죽는 복입니다. 돈 벌어서 복을 받았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받는 것입니다.“예수 믿어서 아무개 뭐 되었다.”이것도 세상 사람들이 다 받는 복입니다. 정말 예수 믿고 받는 복은 내가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내가 날마다 죽노라”이 말은 감히 이 세상 사람들이 못하는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오늘 이런 고백을 하는 사도바울도 그 마음속에 살고자 하는 본능이 있고, 정욕도 있고 갖가지 인간적인 면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비겁하게 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죽여야 합니다. 화려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도 죽여야 합니다. 죽음을 잊어버리고 사는 동안이라도 향락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도 죽여야 합니다. 직장도 자기 사적인 감정이 죽어야 직장생활 잘 할 수 있습니다. 가정생활도 부부가 서로 자기를 죽여야 함께 살지 서로 안 죽이려고 하면 뜻이 안 맞아서 남편이 가출하든지 부인이 도망가든지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맘대로 하려는 마음을 죽여야 교회가 삽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려면 자기를 죽여야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나약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외롭고 고독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의 생은 다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죽으므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평생토록 예수 안에서 이러한 삶을 누리기 원하신다면<날마다 죽는 신앙의 신비>를 깊이 간직하며 사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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