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婦가 해야 할 일
본문
박재선목사 [성경본문] (시45: 8-17)
「시편」은 다른 성경들과는 달리 매 장마다 대부분 각각 표제어가 있습니다. 모든 시편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표제어를 가지고 있는 시편이라면 이 표제어를 가지고 그 시편을 지은 사람이 누구이며, 또 어떠한 상황에서 지은 것인지’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노래를 부르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는 표제어를 포함해서 모두 3개의 표제어가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이 노래를 어떤 상황에서 지었고, 무엇을 목적으로 지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고 했으니까 이 시는 성전에서 찬양을 맡았던 지파인 고라 자손 중의 누군가가 지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마스길’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마스길’이라는 말은‘교훈적인 시’라는 말입니다. 이 시를 지은 사람이 누군가를 교훈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지은 것입니다.
둘째, ‘영장으로 소산님에 맞춘 것’이라는 표제어가 또 있습니다.‘영장’이란 성가대의 인도자를 지칭하며, ‘소산님에 맞춘다.’는 말은 지휘자가 나타내려는 음악적 지시로서 어떤 악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가대 지휘자의 인도에 따라 어떤 특정한 악기로 연주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셋째는‘사랑의 노래’라는 표제어입니다. 이 표제를 통해서 이 시가 언제 사용되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의 노래’는 결혼 때에 불려진 노래인데 특별히 왕이나 왕족의 결혼 때에 불려진 노래였습니다. 이 시가 불려진 혼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다윗」 계통에 속한 어느 왕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 시편 45편은 메시아 시로 분류되는 시입니다. 단지 다윗 왕가의 한 왕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이 시를 메시아 시로 분류하는가 하면 6절에 기록된‘영원한 주의 보좌’라는 단어는 일개 사람에게는 묘사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할 수 있는 독특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8절에 나오는 ‘몰약과 침향과 육계’는 오직 정한 제사에만 사용되는 것으로 제사 외에는 사용될 수 없는 재료들입니다. 출애굽기 30:23절에 보면 제사장과 성전기구에 부어 거룩하게 하는 거룩한 관유와 그것을 만드는 방법이 기록되었는데 그 재료가 바로 몰약과 육계와 창포 곧 침향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어서 말하기를‘이와 같은 것을 만들지도 말고 이것을 타인에게 붓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붓기라도 하면 그 백성 중에서 끊겨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30:33절)
그러니 8절의 말씀만 보아도 이 시는 사람이 아닌 이 땅에 오실 영원한 왕 예수님께 드려진 찬송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결혼식의 주인공이신 우리 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절에 보면 우리 주께서 외형적인 아름다움만 지니신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그 인격이 고매하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주님은 진리로 무장하시고 진리 가운데 행하시는 분이시며 진리를 따르지 않는 어떠한 원수라도 무찌르시는 대장부입니다. 그러니 그 왕위는 끊어지지 않고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위대하신 임금과 혼인예식을 행하는 그 신부는 누구일까요? 가장 좋다고 하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서있는 왕후는 누구일까요? 주님은 자신의 신부가 바로 주의 택하신 백성 곧 교회요 성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우리 주님과 교회, 주님과 성도와의 결혼을 언급한 곳이 많습니다. ꡔ아가서ꡕ가 대표적입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과 결혼을 이야기 하지만 상징적으로 볼 때 솔로몬은 예수님을 의미하고 술람미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물론 직접적인 언급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 속에 신랑이신 예수님과 신부인 성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한 에베소서 5장 22-33절까지의 기록들을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이 외에 요한계시록 19장 7-8절 말씀에도 나타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 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누가 어린양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까?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자이니 곧 성도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도 기록하는데 성경은 그들을 향해‘음녀’라고 칭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당신의 신부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저‘아멘’할 일이 아닙니다. 돌이켜 보면 얼마나 부끄럽고 겸연쩍은 일입니까? 우리가 거룩하신 우리 주님의 신부로서 과연 합당합니까? 지난날에 행한 그 수많은 악한 말과 행위들을 보면 예수님의 신부로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자격을 놓고 본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모습과 행위를 보지 않고 우리를 신부라 칭하여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인간의 잣대만으로도 절대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없는데 이 모든 부끄러움을 감싸 안으시고, 또 용서해 주시고 신부로 맞아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저와 여러분을 신부라 부르시는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며 신부 된 우리는 분명히 주 앞에 갖추어야 할 모습이 있습니다. ◉
어떤 모습들을 갖추어야 하겠습니까?
1. 신부는 아름답게 치장하고 단장하여야 합니다.
신부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특별히 꾸미지 않아도 성스러운 예식을 행하는 그 모습 속에서 아름다움이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부는 남편을 위해서 아름답게 단장하는 것이 예의요, 마땅한 일입니다. 물론 결혼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몸을 장식하며 화장하는 것은 누구에게 보이려고 단장합니까? 그저 외출할 때만 단장하고 화장할 뿐 집에서 남편에게는 단장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단장하는 우선된 목적은 남편이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왕후가‘오빌의 금’으로 장식하였다고 했는데 오빌의 금이란 순결하고 영화로운 모습을 의미합니다. 곧 그리스도를 모시는 성도는 순결하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러나 외형적인 아름다움만 있을 뿐 내적인 아름다움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도 이와 같아서 외형적인 모습이 웅장하거나 듣기에 좋은 소리를 전하는 성가대가 있다고 하여서 아름다운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외적으로 기도하는 일에나 예배하는 일에 열심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진정 아름다운 교회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있으며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 교회입니다. 또한 진정한 아름다운 성도는 외형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마음까지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아니하신다면 그를 어찌 아름다운 성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날마다 자신의 외적인 행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더불어 내적인 마음이나 생각까지도 주께서 기뻐하시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2. 신부는 신부되기 이전의 자기 집과 백성을 잊어야 합니다.
창세기 2장 24절은 혼인하는 부부가 가지는 참다운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지로다”이 말씀은 혼인하는 자는 반드시 그 부모를 떠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모를 떠나라는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이나 정신적인 의지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어머니의 그늘 속에 있는 남편이라면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한 아내의 남편, 자녀들의 아버지가 될 힘도 없고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친정 생각에 남편을 돌아 보지 못한다면 이 역시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출가외인이라는 옛말은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옳은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시고 혼인예식을 행하는 성도들은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부모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전에 행하던 습관과 정욕이요, 이전에 즐기던 세상 쾌락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하셨다(창12:1).
「아브라함」에게 있어 그‘아비 집’은 갈대아 우르라는 도시로서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문명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살기에 편리하며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으며 국가의 군사력으로 보호를 받을 수도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하나님에 대하여 악을 행하는 도시였습니다. ‘지그라트’라는 거대한 제단이 있으며, ‘난나’라는 달의 여신을 숭상하는 도시였습니다. 악한 모습은 다 갖추고 있는 도시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될 이스라엘 민족을 이룰 「아브라함」이 그러한 곳에 거주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곳에서 악한 영향력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도들을 향하여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부로서 마땅히 벗어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신부로서 누릴 영광과 화려함만 바라고 있습니다. 옳지 못해 미련하기까지 한 모습입니다. 버리지 않으면 취할 수 없다는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신부됨의 영광과 위치를 생각하면 아쉬워 할 것도 없고 미련을 가질 것도 없습니다. 무엇이 우리 주님과 함께 사는 것보다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자신의 행동으로 인하여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훼손될 것이 있다면 과감히 버리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3. 신부는 그리스도를 날마다 경배해야 합니다.
성경에 언급된 여인들 중에 가장 모범적인 아내로 나타나는 「사라」는 그의 남편 「아브라함」을 늘 ‘주’라고 부르며 존경하였습니다(벧전3:6). 앞에서 말한바 에베소서의 말씀처럼 아내들은 남편을 존경하며 복종하여야 합니다. 더욱이 교회는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 되게 존경하며 경배하여야 합니다.
①경배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복종한다는 표시입니다. 신하가 왕에게 엎드려 절하며 부복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니 곧 그 뜻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것이며 자신의 의지와 욕구는 철저하게 절제하겠다는 표시입니다.
② 경배한다는 것은 존경하다는 표시입니다. 모세가 장인을 맞이하여 절하고 그에게 입 맞추는 장면(출18:7)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으니 상대의 인격과 행위를 존경하며 존중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③ 경배한다는 것은 경외한다는 표시입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에 보면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경외란 곧 마음으로 두려워하며 마음으로 상대를 높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④ 경배한다는 것은 충성하겠다는 표시입니다. 게으르지 않고 온 마음으로 섬기며 순종하겠다는 다짐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주 하나님을 경배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행할 때 주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본문에서‘왕후가 왕의 우편에 섰다’는 말씀처럼,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주의 오른편에 설 수 있도록 높여 주실 것입니다.‘오른편에 선다는 말은 주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인정받고 총애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 나라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들어가는 특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신부인 성도 여러분, 신부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신부로서의 바른 모습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1. 신부는 아름답게 치장하고 단장하여야 합니다.
2. 신부는 신부되기 이전의 자기 집과 백성을 잊어야 합니다.
3. 신부는 그리스도를 날마다 경배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부끄러움을 벗어버리고 순결함으로 주 앞에 서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