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보혈과 죄인의 구속 (벧전 1:18~19)
본문
어느 조사기관이 서울을 비롯한 6대 도시에 사는 성인 일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종교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개신교인은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이 45.5%로 가장 많고, 불교인과 천주교인은 마음의 평안을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각각 74.0%, 73.2%였습니다. 이들은 내세 보다 현세를 위해 종교를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교인 가운데도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라는 대답이 37.2%나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평안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최우선 순위에 놓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마음의 평안을 주지만 그것은 신앙이 주는 은총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격적인 수양을 위해 종교생활을 한다고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 역시 사람의 인격을 고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생활의 선한 열매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기독교가 다루는 문제는 이 같은 것들보다 더욱 실질적이고 절실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지요.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기독교가 다루는 것은 죽을 운명에 처한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타 종교들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대속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나사렛 예수를 주님으로 믿습니다.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이 시간 저는 성경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의 보혈과 죄인의 구속(救贖)”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함으로써 복음의 핵심에 대하여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으려면 먼저 자신의 죄인 됨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죄인입니다. 그 하나는, 인류의 조상 아담의 죄얼을 유전 받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혈관 속에는 범죄한 아담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황인종의 자식은 황색 피부를 갖고 태어나고, 흑인의 자식은 검은색의 피부를 갖고 태어납니다. 이는 태어나는 사람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모의 유전자에 의해서 정해진 것입니다. 죄성의 문제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이 타락했으므로 그의 후손들은 누구나 타락한 본성을 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갓난아이는 순진무구합니다. 그러나 점점 자라가면서 자의식이 생기게 되면서부터 죄성이 발동하는 것을 봅니다. 누가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도 본능적으로 악한 생각을 하고 악한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처럼 타고난 죄성을 원죄라고 합니다. 로마서 5장 15절에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한 사람”은 인류의 조상 아담을 가리킨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그가 인류의 대표로서 범죄한 것입니다. 아담이 지은 모든 죄에 그의 후손들이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지은 최초의 죄에 대해서 공동의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시편 51편 5절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 앞에 고백하기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어머니 뱃속에 잉태되었던 그 순간부터 이미 죄성을 유전 받았다고 시인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죄성은 태어난 후에 나쁜 환경에 의해서 습득한 것이 아니라 태생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인인 사실은 비단 원죄에 의한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들은 저마다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되 만부득이 짓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짓습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지내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고 자연스럽듯이 인간은 자연스럽게 죄를 짓습니다. 언젠가 연세가 아흔이 다 되신 할머니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할머니,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죄 지으신 것 없으시지요?”라고 물었더니, 그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면서 “웬걸요. 살아온 것이 다 죄인데”라고 하셨습니다.
이 할머니처럼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는 사람은 전도하기가 수월합니다. 그 날 저는 그 할머니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는 도리를 말씀해 드렸더니 즉시로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왕상 8:46).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본다면 가장 깨끗한 사람과 가장 추악한 사람의 차이란 오십보백보에 불과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죄의 기준이 성경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접 사람을 죽여야 살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1)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27)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가지고 판단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중심을 보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판단하시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것은 환자가 자기의 병든 사실을 아는 것처럼 중요합니다. 저는 간암 말기가 된 줄도 모르고 매일 같이 술을 즐기던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갑자기 몸에 이상을 느끼고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후였습니다. 그러나 정기검진을 통해서 자기의 건강을 체크하는 사람은 조기에 병을 발견하고 치료를 받습니다.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구원의 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가 세관에서 사무 보는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셨더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았습니다. 그 날 저녁 마태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고 세리들과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광경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대답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는 자기의 죄인 됨을 인정했기에 예수님을 영접했으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죄인 됨을 시인하는 것은 구원의 기본 요건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의 피로써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두 번째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피에 대하여 너무 자주 언급해서 싫다고 합니다. 피 이야기 말고도 얼마든지 듣기 좋은 말이 많지 않으냐고 합니다. 교양을 높이고, 도덕적인 생활을 격려하고, 위안을 주고,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방법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이 시대에 맞다고 합니다. 그런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누구나 피를 보면 섬찟한 느낌을 갖습니다. 피는 살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과 정반대로 피는 살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적십자사의 헌혈운동에 동참하는 것은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큰 수술을 받으려면 수혈할 피가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피는 헌혈에 의한 것입니다. 이 때 헌혈은 생명을 나누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혈을 흘리신 것은 죄로 인해 멸망당할 인생들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피를 흘리면서 죽는 길을 택하셨을까요? 죄인들을 구원할 다른 방법은 없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길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속죄의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따라서 죄인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는 영원한 멸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에 긍휼이 한량없으신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생들을 살리기 위한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짐승의 피로써 속죄 제사를 드리는 방법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400년 전에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에 보면 하나님께 제사하는 방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7장 10절과 11절에 보면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0)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11)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이 말씀과 같이, 우리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피는 곧 생명이므로 피를 과도하게 흘리면 죽습니다. 따라서 피의 제사는 곧 생명을 제물로 바친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죄 때문에 죄 없는 소와 양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소나 양의 피가 사람의 죄를 없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속죄에 불과했습니다.
구약시대에 매우 빈번하게 제사를 드린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가 생각날 때마다 제물을 가지고 성막에 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물론, 이 때 실제로 제사의식을 거행한 사람은 백성이 아니고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차례씩 대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양푼에 담아서 지성소에 들어가서 온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한 이런 종류의 제사를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까지 계속 드렸습니다. 만일 짐승의 피로 드린 제사의 효력이 영구하다면 그처럼 자주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0장에 이르기를 “1)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에 의하여 짐승의 피로 드린 속죄 제사는 장차 오는 좋은 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써 드려주실 속죄 제사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속죄 제사는 하나의 상징적인 의식에 불과했지 그것이 실제로 인간의 죄를 없애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하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속죄가 가능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예수님만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왜 다른 성현들은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까? 바로 이 점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가리켜 독선적이라고 비난합니다. 천주교는 이 같은 세인들의 비난을 의식해서인지 타 종교들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타 종교를 비방하거나 적대시하면 안 됩니다. 종교가 다르더라도 서로 존중하고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협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과 함께 평화롭게 지내는 것과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말씀합니다.
이 처럼 주장하는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죄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장 14절로 16절에 이르기를 “14)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신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처럼 신비로운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가 하면 감히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고도 말씀합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로 17절에 이 같이 증언합니다. “15)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으신 분이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 이르기를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는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 공부를 아무리 많이 했더라도 하나님께서 어두운 마음을 밝혀주지 않으시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믿게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말하기를 “여러분의 집은 가난한 단칸방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거의 가구도 없는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식탁 위에는 식량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풀잎으로 저녁을 먹을지라도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확신이 없이 살진 소를 먹는 사람보다 얼마나 더 행복합니까! 여러분의 빈궁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의 부유함보다 좋은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 사실 하나 만으로도 이 땅에 태어난 충분한 보람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어보세요. 그러면 예수님에 대하여 더 깊이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뵙기 전에는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로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미워해서 핍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대제사장에게서 권한을 위임 받고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다메섹 가까이 다가왔을 때, 정오의 태양빛 보다 더 밝은 빛이 그와 그의 일행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그만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그러자 빛 속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핍박자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나사렛 예수가 속세무민 하다가 처형당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약성경에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하는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 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며 죽으셨음을 믿으십니까? 그 고귀한 보혈이 저와 성도님들의 심령에 뿌려져서 우리가 정결함을 받았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할 때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백성을 위한 속죄 제사를 드렸듯이,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죄의 유혹이 다가올 때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는 주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가 성도님들을 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미 온 몸을 깨끗하게 목욕한 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목욕한 자라도 외출하고 돌아오면 발을 씻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함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지만, 매일의 삶 속에서 알게 모르게 죄를 짓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죄를 그대로 두지 말고 즉각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감추지 아니하고 회개할 때,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하신 말씀과 같이, 다시금 정결케 되는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나고, 미움의 감정이 생겨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할 때 우리 마음속의 악이 제하여 지고 선한 생각이 자리 잡게 되고, 미움이 변하여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고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를 청산하고 화목을 이루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방 죄인이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없어졌으며,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어졌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 마음에 뿌려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피가 우리 마음에 뿌려진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는 증표입니다. 마귀가 성도들을 넘볼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8)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53)…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사람들은 성찬식을 오해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악의에 찬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은 실제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이 양식을 먹고 생명을 유지하듯이 우리의 영적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비로소 가능함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사람치고 제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예수님께서는 자원해서 죄인들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그것도 잔혹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셨습니다. 주님의 보혈은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기만 하면 그 보혈로써 모든 추한 죄를 씻겨주시며 영원한 생명을 베풀어 주십니다. 지금도 주님의 보혈은 성도들에게 영적 승리를 위한 능력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이 땅의 법정에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통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그런 말이 통할 리 만무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은 까닭에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을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으로 섬길 뿐 아니라,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날마다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김양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