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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 입니까? ‘세리’ 입니까? (눅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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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 입니까? ‘세리’ 입니까? (눅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4)

오늘 우리의 본문은 누가복음 18장 앞부분에 수록되어 있는 두 비유 중의 한 가지입니다. 누가(Luke)는 ‘기도’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두 비유를 소개합니다. 하나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1-8절)와 오늘 우리의 본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9-14절)가 있습니다.

억울한 과부의 비유 기도가 ‘어떻게’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자비를 얻는가를 가르친 비유라면, 세리의 기도는 ‘어떠한’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는가를 가르친 비유라 하겠습니다. 이 두 기도가 가르쳐 준 것이, 억울한 과부의 비유 기도가 ‘끈질긴 기도’라고 한다면, 세리의 기도는 ‘겸손한 기도’를 가르친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끈질기게’하는 기도는 어떻게 하는 기도이며, ‘겸손하게’하는 기도는 어떠한 기도입니까? 끈질기게 하는 기도는 참고 기다리며 하는 기도입니다. 비록 응답이 더디다고 하더라도 낙망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응답이 있을 때까지 끝까지 하는 기도입니다. 겸손하게 하는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자기를 낮추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하는 기도란 ‘가난한’(貧)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빈’(公) 손으로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하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끈질기게 하는 기도와 겸손하게 하는, 이 두 기도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둘 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에게만 절대 의존하고 하는 기도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이 둘 중의 하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게 인정받고 응답 받는기도가 어떠한 기도이며, 어떻게 하는 기도인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두 인물을, 즉 바리새인과 세리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두 사람의 비교는 곧 구약율법의 요구를 정확하게 잘 지키는 자로서 ‘자신의 의로움’(自己義)을 과시하는 바리새인과 자신의 죄를 마음깊이 인식하고, ‘하나님의 자비로움’(하나님의 義)을 간구 하는 세리의 행위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이 같은 두 인물의 비교한 교훈은 예수님의 다른 비유들인 '탕자의 비유'(눅15:11-32)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16:19-31)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아들과 불순종한 두 아들의 비유'(마21:28-32)들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오늘 우리의 본문을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우리의 본문이 다른 비유들에서 발견되는 것과는 달리 ‘비유’(혹은 비교)라기 보다는 당시 유대사회에 실제로 있었던 바리새인과 세리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바리새인은 율법을 정확하게 잘 지킴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으려고 무척 애쓴 자들입니다.

그리고 세리들은 실제로 율법을 지키지 않고 범죄를 일삼은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세리들은 자신들의 행위로서는 도무지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본문은 예수의 다른 비유들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형식의 비유라기보다는 유대사회에 실제로 있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대조시켜 교훈합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의 본보기로서 바리새인과 율법밖에 있는 사람, 곧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의 상징으로서 세리(마9:10-11; 11:19; 21:31; 막2:15; 눅5:29; 7:34), 이 두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 이 둘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극적으로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첫 째 두 사람이 기도하는 모습을 살펴봅시다.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곧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행 2:15;3:1;10:9). 성전은 동, 서, 남쪽이 골짜기로 둘러싸인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이곳의 유대인의 뜰에서 기도를 하곤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개인적인 기도를 위해서 편리한 시간을 택해 성전에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는 똑같이 성전에 ‘올라갔으며’(10절), 두 사람은 똑같이 성전에서 ‘내려갔습니다.’(14절). 두 사람은 모두 그들의 마음을 ‘성전’과 ‘하나님’께로 향했고, 모두 기도 드렸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에서는 우선 부정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토색과 불의와 간음을 행치 아니한다는 것(11절)과 그다음 긍정적으로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을 자랑합니다(12절. 이 같은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신의 경건과 공로(업적)를 전면에 내세워 과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기도의 형식(태도)과 내용에서는 극명한 대립을 보입니다. 본문 11~ 13절을 보면 세리의 기도는 바리새파 사람과는 대조적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서서 기도했다.'는 것은 성전에서 서 있는 자세로 기도하는 하나의 '습관'을 암시하는데 기도시간이 길었으나 그 기도의 주어는 계속 ‘나’중심 이었습니다. 그는 '토색(討索),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으며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즉 자신에게는 불의가 전혀 없으며, 깨끗함을 자랑한 것입니다. 유대 법에 의하면 금식은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행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은총을 원하는 자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도 금식을 행했으며, 예루살렘에 장이 서는 때 얼굴을 희게 하고, 헝클어진 머리에, 구김살이 간 옷을 입고 큰 거리에 나와 자신들의 경건을 자랑하였습니다(마 6:16-18 주석 참조). 이처럼 자신들의 의(義)를 자랑하는 자들은 오히려 의롭지 못한 자들이며, 예수님과 무관한 자들이었고 오히려 책방의 대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5:3절).

또한 바리새인은 12절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말하며, 신앙의 행위를 자랑하였습니다. 후대에 이르러 유대교의 랍비들은 율법의 문자적 적용에 더욱 철저하기 위해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이르기까지 십일조를 바치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마 23:23).

본 절의 바리새인은 십일조를 철저히 지킨 것을 내세우며, 하나님께 보답을 요구하는 듯한??자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십일조가 모든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이요. 자기는 청지기에 불과함을 고백하는 행위임(마25:14- 30)을 알지 못한 태도였습니다.

요컨대, 십일조는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조건부적 뇌물이 아니라 택함 받은 자가 마땅히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드려야 하는 신앙의 표시인 것입니다(욥 1:21;롬 11:36). 옆 사람에게 물어봅시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반면에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이나 내용는 바리새인의 기도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세리는 멀리 아마도 성전 밖 이방인의 뜰에 서서 기도하였을 것이며,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정상적인 여러 자세 중 하나였습니다(시 123:1;막 6:41;7:34;요 11:41;17:1).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 합니다(13절). ‘멀리 서서’라는 것은 ‘성전 밖에서’라는 것이고, ‘가슴을 치며’라는 것은 "죄에 대한 뉘우침과 비통한 마음"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것은 ‘가슴’이 죄의 자리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세리의 기도는 자신의 업적을 전혀 내놓을 수 없는 죄인으로서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며, 용서를 간구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세리는 기도의 정상 자세조차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죄인 중에 죄인임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였고,"

"가슴을 치며"라고 하였는데 이 표현은 정확히 말하자면 죄의 근원지로서의 마음을 치는 깊은 참회와 애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23:48;마11:19). 또한 헬라어 동사 '에튀프테'는 '때리다.', '치다.'의 뜻인 '튀프토'의 미완료형으로 계속해서 치는, 반복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그가 세리라는 자기 직업을 통하여 범해온 죄 많은 생활들을 청산할 뿐 아니라 그동안 그가 사람들로부터 착복한 금액에다 율법에 명시된 배상액까지 부가하여 갚고자 하는 굳은 결의가 이 표현 속에 암시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출 22:1-15).

또한 "불쌍히 여기옵소서."의 헬라어 "힐라스데티"의 단어의 뜻은 '진정하옵소서.', '분노하지 마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말 속에는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동시에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세리의 모습이 역력히 나타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를 가리켜 '많은 죄인들 중의 한 명'이라고 칭하지 않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관대한 처분만을 기다리는 그의 겸손한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짧고, 그 기도의 주어는 ‘하나님’이었습니다(13절). 바리새인의 기도에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관심이 계속 ‘수평적으로’ 쏠리고 있으나(11절), 세리의 기도는 ‘수직적으로’ 계속 하나님께로만 향해 있습니다(13절). 이렇게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는 달랐습니다.

두 번째 두 사람의 기도 결과를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 두 사람의 대비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갔다.”(14a절)는 말씀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라는 "데디카이오메노스"단어의 뜻은 '의롭게 하다.'는 뜻이지만 이 단어는 여기서 <완료 수동태 형>으로 사용되어 "하나님께서 이 세리를 주권적으로 의롭다고 선포하고 확정하셨음을 암시" 한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은 결국 두 사람이 본질적으로 다르고, 그 차이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 온 것인가를 말합니다. 그 결과가 바로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토색과 불의와 간음을 행치 않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경건한 ‘바리새인’이 아니라, 성전 밖에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사실, 이것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얻었습니다. 그가 기도의 응답을 받았으며, 그가 의롭다하심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오늘 우리의 본문이 말하는 결론입니다.

성도여러분! 어찌하여 하나님의 은총이‘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에게 나타났습니까? 바리새인은 율법을 정확하게 잘 지키는 자이고, 세리는 그렇지 못한 자인데, 어찌하여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까? 바리새인은 세리와는 구별된 거룩한 자의 반열에 속한 자이고, 세리는 항상 죄를 범하는 죄인으로서 속된 자의 반열에 속해 있는 자인데, 어찌하여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가’ 하나님께 용납되었습니까?

왜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입니까? 도대체 바리새인의 기도가 무엇이 잘 못 되었기에 응답되지 않고, 세리의 기도가 응답되었습니까? 일반적인 기대와는 달리 의인(義人)이라고 자처하는 ‘바리새인’이 아니고 죄인(罪人)으로 인식하는 ‘세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것이 오늘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바리새인이 아니라’(14a절)라고 하는 것에는 상당한 까닭이 있습니다. 그가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 까닭은, 그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업적’(공로)을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했습니다. 그는 위대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비’를 뒷전으로 하고 ‘자신의 공로’를 앞세웠습니다. 이는 곧 자신의 공로에 의존할 뿐 하나님의 자비를 의존하지 않는 불신의 행위입니다.

이와 같은 불신의 행위는 자신의 결핍과 곤궁함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됩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자비(긍휼)같은 것은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대단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누구나 그러하듯이 육체를 신뢰(자랑) 한(빌3:4) 사람입니다. 그는 교만하기 그지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결정적인 잘못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태도입니다. 이렇게 바리세인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교만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자비(긍휼)를 입지 못하였으며, 결국 그는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이 사람, 즉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14b절)고 하는데도 상당한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리가 바리새인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리가 바리새인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그는 바리새인과는 달리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단지 ‘죄인’일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고는 도무지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합니다. 그는 결핍과 곤궁함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에 목마른 사람입니다. 그는 바리새인과는 달리 하나님의 자비가 절대로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는 가난하고(貧) 빈(公) 손의 상태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손’이 된 세리, 그 빈손으로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13절)라고 고백한 세리, 이렇게 빈손으로 하나님의 자비의 손을 붙잡고 죄인임을 고백한 그 세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세리, 그는 실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은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기뻐하시고 받아 주시는 분'이 십니다.

세 번째 이제 우리 모두 세리와 같은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나의 모습을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솔직하게 내 놓아야 합니다.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선언하신 주님 앞에 ‘나 자신’을 적나라하게 내 보여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한 ‘저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인지, 아니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 사람(세리)’과 같은 사람인지, 주께서 ‘나를 누구’라고 하시는지 주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너는 저 바리새인과 같이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 사람 곧 세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세리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세리와 같이 의롭다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바리새인과 같은 자기 자신과 업적을 자랑하는 ‘교만’을 버리고, 세리와 같이 ‘겸손’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학벌이나 신분이며, 가문이나 재산입니까? 아니면 도덕적인 인격과 종교적인 신앙입니까?

바울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배설물’로 여기고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한다.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고상하고, 그가 가진 의(義)가 율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義)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빌3:3-9).

그렇습니다. 우리가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나의 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에서 비롯됩니다. 세리는 자기를 가리켜 '많은 죄인들 중의 한 명'이라고 칭하지 않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관대한 처분만을 기다리는 그의 겸손한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선 바리새인과 세리 중 세리가 더 의롭다는 절대적인 판결을 내리셨는데(14절) 이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사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신앙인의 참된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요일 1:8,9).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저 바리새인처럼 자기 '자신의 경건과 업적을 자랑하는 교만한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절대 의존하여,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의’를 간구 하는 '세리와 같이 겸손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세리와 같은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살아가는 참으로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런 세리와 같은 기도도 기뻐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을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아울러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 금요일에도 <중보기도학교>를 엽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중보기도를 하셨습니다. 바울은 병든 자들을 위하여 중보기도 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약5:14).

그러므로 사랑하는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도 서로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약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곤경에 처한 자들과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중보 기도는 힘과 용기를 줍니다. 중보기도는 낙심하고 절망가운데 있는 자에게 새로운 희망을 줍니다.

독일의 유명한 화가인, 뒤러(Albrecht D rer)는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누른 베르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도하는 손'입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두 친구가 그림 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다 가난하여 함께 공부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두 친구는 한사람이 일을 하여 돈을 벌어 다른 친구를 도와주고 성공하면 그 다음에 일하던 친구가 공부하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뒤러'가 먼저 공부하기로 하고, 그의 친구는 일을 하여 '뒤러'의 학비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뒤러'는 학업을 마치고 성공한 후에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친구는 기도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심한 노동으로 손이 망가져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그 손을 모으고 '뒤러'가 성공하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뒤러'는 그 자리에서 연필을 꺼내어 문틈으로 보이는 그의 손을 스케치하였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를 위해 기도하던 그의 아름다운 손은 지금도 명작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우정과 중보의 기도입니까! 우리도 이처럼 중보의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기도의 모범>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중보의 기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성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까지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한번하고 끝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계속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무려 여섯 번(50인, 45인, 40인, 30인, 20인, 10인)이나 기도하여 그때마다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기도가 우리가 중보기도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고 기도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가서 밤낮으로 부르짖음으로 결국 원한을 풀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같다고 하겠습니다(눅18:1-8).

이토록 아브라함이 기도가 이루어질 때까지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 끝까지 참아 주시는 인내의 하나님, 그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본문의 ‘세리’처럼 창세기 18:20-33절에 기도한 ‘아브라함’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붙들고, 오로지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기 위해서는 세리처럼 '빈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손에 무엇이 잡혀 있는 한, 다른 것을 잡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는 한, 든든한 무엇을 내가 가지고 있는 한,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전적으로 하나님을 붙잡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빈손이 되었을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모든 힘, 나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속수무책일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게 됩니다. 이때 기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위해 개입하셔서 당신의 절대 능력을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의 정신력'입니다. 우리는 가난의 정신력으로, 오로지 빈손으로,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리의 기도가 그러하였고, 아브라함의 기도는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소돔성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소돔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중보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중보기도의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신, 그 무서운 심판을 가로 막아서서 "이 백성들이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32:31-32)라고 목숨을 걸고 중보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중보기도를 하셨습니다. 바울은 병든 자들을 위하여 중보기도 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약5: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서로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약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곤경에 처한 자들과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중보 기도는 힘과 용기를 줍니다. 중보기도는 낙심하고 절망 가운데 있는 자에게 새로운 희망을 줍니다.

나를 위해 해야 할 참으로 급한 기도의 내용도 많지만 우선 다른 사람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의 기도를 할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왜냐하면 그때에 하나님은 기적을 만들어 주시고, 상황을 역전시켜 주시고, 다른 사람의 문제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도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마태 6장 31~33절)

바리새인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열심 있는 종교생활은 하였지만 좋은 신앙의 열매가 없고, 하나님께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리와 같은 기도 하는 자세를 본??받기를 원합니다. 또 한 차원 더욱 성숙된 중보기도 자가 되어 하나님께 인정과 응답과 변화의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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