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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직장윤리 (골 3: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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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직장윤리 (골 3:22~4:1)


그리스도인의 가정윤리와 직장윤리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을 달 5월을 맞아 지난 3주 동안 가정에 관한 설교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기억나시지요? 5월 첫 주에는 ‘부모들아!’라는 제목으로 성경은 자녀교육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는가 생각해 보았고, 둘째 주에는 ‘자녀들아!’라는 제목으로 진정한 효도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지난주에는 ‘아내들아! 남편들아!’라는 제목으로 부부윤리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지요.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그리스도인의 직장윤리’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직장이 가정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을 분도 있겠지만 사실 가정은 직장과 너무나도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직장생활이 바로 서야 가정이 든든하게 설 수 있고, 가정이 든든할 때 직장생활이 바로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이 실직을 하거나 사업에 실패하니 가정도 함께 무너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정에 불화가 있으니까 직장이나 사업장에서도 스트레스를 훨씬 많이 받고 힘들어하는 일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 한 직장인의 일기를 공개합니다.

하루 종일 김 부장에게 시달렸다. 차라리 내 업무능력에 대해 직접적으로 잘 했다 못 했다 말해주면 좋겠는데 교묘하게 인신공격을 해대며 말로 비꼬아서 나를 못살게 군다. 퇴근시간까지 겨우 겨우 견디다가 즐거운 우리 집으로 직행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나를 개선장군처럼 반길 아이들을 상상했건만, 큰 녀석은 제 방에서 나와 보지도 않고 작은 녀석은 컴퓨터 게임에 빠져 얼굴도 돌리지 않는다. 아내는 무슨 이유인지 인상만 쓰며 입이 오리만큼 나와 있다. 차려놓은 밥을 몇 술 뜨고 방에 들어와 TV를 켰다. 한참 뉴스를 보고 있는데 아내가 툴툴거리며 말을 걸어온다. 매일 반복되는 이야기... 결론도, 해결방법도 없는 이야기를 끝없이 늘어놓으며 나를 힘들게 한다.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말인지... 우리 가정이 정말 즐거운 우리 집일까?

이렇게 가정에서 뒷받침이 되지 못하면 직장생활도 좋을 수가 없는 법입니다. 직장에서 시달리고 가정에서도 스트레스 받으면 직장도 어려워지고 가정도 위기를 맞습니다. 그러니 우리 주부들은 남편들에게 잘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사일 하랴 자녀들 키우랴 정말 힘든 것 알지만 남편이 바깥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가정이 안정되고 평안을 주면 우리 남편들, 정말 힘이 나고 잔소리 안 해도 정말 열심히 일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아내의 모습이지요.

이렇게 가정과 직장이 밀접하게 연관된 것을 성경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인 골로새서도 그리스도인의 가정윤리 중 맨 마지막으로 크리스천 직장윤리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노예제도를 극복하는 그리스도적 윤리 : 종들의 자세

오늘 본문은 고대 로마제국의 노예제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노예는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모든 가사는 노예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노예는 가정의 가장 중요한 일원이었습니다. 물론 노예는 전혀 사람대우를 받지 못하고 재산의 일부분이나 가재도구 정도로만 취급 받기는 했지만 아무튼 노예는 가정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도 보면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 맨 마지막 요소로 종과 주인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2절부터 25절까지 보면 먼저 종들에게 올바른 윤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가 로마 제국 내에 퍼져가면서 노예들 가운데 예수 믿는 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신앙을 가진 노예들에게 올바른 크리스천 종의 자세에 대해 가르친 것입니다. 22~23절을 읽읍시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 교훈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종들은 상전에게 순종하되 사람에게 대하듯 순종하지 말고 마치 예수님께 대하는 듯한 태도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에게 하듯 행동하는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22절에 나온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입니다. 사람만 기쁘게 하려고 사람 눈치만 보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눈가림으로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있는 곳에서만 잘 하는 척 하고, 안 볼 때는 딴 짓을 합니다. 앞에서는 웃으며 친절하게 대하지만 돌아서서는 욕하고 비난합니다. 옛날 학교 다닐 때 선생님 계시면 열심히 청소하는 척 하면서 선생님 가시면 노는 친구들 있지 않습니까? 마치 그런 사람들처럼 눈가림으로 일하는 종은 어떻게 될까요? 주인이 모를 것 같지요? 모르기는 왜 모릅니까? 다 압니다. 손님을 마음속으로부터 진심으로 대하지 않고 앞에서만 감언이설 하다가 뒤돌아서서는 딴 소리 하면 손님이 모를 것 같지요? 다 압니다. 가게를 하나 해도 손님을 진심으로 대하면 그들의 마음이 감동을 받는데 직장이나 무슨 일이나 다 마찬가지 원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실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결코 사람을 두려워해서는 참된 성실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그 앞에서만 잘 하려고 하지 상전이 안 보면 딴 짓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상전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분입니다(시 121:4). 언제나 나를 지켜보시고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엄위하신 주님 눈앞에서 어떻게 감히 딴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성실하게 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노예제도를 극복하는 그리스도적 윤리 : 주인들의 자세

사도 바울이 이번에는 4장 1절로 들어가서 크리스천 상전들에게 권면합니다. 함께 읽습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상전들은 종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의와 공평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종을 내 재산이나 물건처럼 생각하지 말고 사람으로 생각하고 인격적으로 대해주라는 말입니다. 종이라도 의롭고 공평하게 대해야지 편파적으로 대하거나 억울한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바울은 노예제도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노예제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비인격적인 관계를 그리스도의 질서로 바꾸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당시 노예제도 속에서 일반적인 주인과 노예관계는 무엇이었는가? 노예는 22절에 나온 대로 어떻게든 눈가림으로 주인을 속여 일을 조금만 하려고 들고, 주인은 이런 노예를 어떻게든 더 닦달하고 못살게 굴어 일을 시켜먹어야 하는 그런 관계였습니다. 그러니 주인과 노예 관계는 언제나 비인격적이고 서로 못 믿는 불신감에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잘못된 관계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기독교의 정신으로만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이 제일 잘 드러나는 성경이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서는 성경에서 드물게도 사도 바울이 빌레몬이라는 한 개인에게 보낸 편지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빌레몬은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인데 많은 종들을 거느린 꽤 부유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오네시모가 주인의 재산을 훔쳐 로마 혹은 에베소로 달아난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도망한 노예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 바울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일을 맡게 된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잘 돕던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언제까지나 도망한 노예로 숨어 살 수는 없다는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 편에 한 통의 편지를 써 보내는데 이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이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혹시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끼친 물질적 손해가 있다면 그것을 자신이 갚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오네시모를 이후로는 종과 같이 여기지 말고 사랑 받는 형제로 여겨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생각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물론 오네시모가 끼친 손해를 자신이 배상하겠다는 바울의 생각도 참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오네시모를 종이 아닌 형제로 대해주라는 말입니다. 당시 노예제도 속에서 주인이 노예를 형제처럼 여긴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물론 당시 노예제도 자체를 거부하거나 없애기는 어려웠겠지만 그 제도를 뛰어넘어 재산이나 가재도구의 하나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노예를 사람취급 해주고 나아가 내 형제처럼 여기라는 것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정말 용서하고 형제처럼 대해주었는지는 빌레몬서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골로새서 4:9에 보면 오네시모가 다시 바울에게 돌아와 바울의 사역을 돕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빌레몬은 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고 오네시모를 해방시켜 바울에게 돌려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노예제도는 없어졌지만 모든 상하관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윗사람과 아랫사람,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는 존재합니다. 그런데 세상적인 질서로만 친다면 아랫사람은 반드시 윗사람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부려먹고 얼마든지 비인격적으로 취급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든 내가 돈 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본전을 뽑아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랫사람에게 심하게 대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랫사람을 일하는 기계로 보아서도 안 되고, 내 마음대로 부려먹는 종처럼 생각해서도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을 형제로 생각하고 인격적으로, 올바로 대해 줄 때 그들의 마음이 감동을 받아 진정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며 나아가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질 때에만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통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직장인의 원칙

오늘 본문은 직장에서 크리스천 아랫사람은 어떻게 윗사람을 대할 것인지 두 가지로 가르칩니다.

첫째, ‘나는 종이다’라는 정신으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특히 사업을 시작하는 분이나 가게를 개업하는 분들에게 반드시 강조합니다. 당신이 만나는 손님이나 고객은 나와 동등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꾸 동등하다고 생각하니 더럽고 치사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요 내가 이런 꼴까지 당해가면서 꼭 이 일을 해야 하나 고민도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저 사람과 내가 동등하다고 생각하니 생기는 일입니다. 하지만 내가 저 사람 종이다 생각하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종이니까 내가 낮아지는 것, 섬기는 것이 당연하고 욕먹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쉽게 풀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윗사람을 대할 때나 손님을 대할 때 반드시 ‘내가 저 사람 종이다.’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둘째, ‘직장이나 사업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눈가림으로 일하지 말고 그 사람 앞에서만 잘 하는 척 하지 말고, 그 사람을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난다면 내가 정말 모든 정성을 다 하고 최선을 다해 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자세로 윗사람을 대하고, 손님들을 대하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뀌고 내 직장과 사업장이 바뀌게 됩니다. 이러한 자세가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본문은 직장에서 크리스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두 가지로 가르칩니다.

첫째, 직장에서 크리스천 상사가 부하를 대할 때, 믿음을 가진 경영주가 직원들을 대할 때 무엇보다 ‘의와 공평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공평하게 대하면 그들도 윗사람을 존중하게 됩니다. 지난주 설교에서 남편은 아내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존경하고 순종하게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마찬가지로 윗사람은 아랫사람이 진정으로 존중하고 따르도록 반드시 의와 공평으로 대해야 합니다. 사적인 감정으로 흐르거나 편파적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무엇보다 그가 내 아랫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 형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감동을 받고 변화됩니다. 아랫사람을 감동시키면 그는 나를 위해 무엇이든 다 하는 사람이 됩니다.

둘째는 무엇보다 내가 상전이 아니라 하늘에 진짜 상전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니 모든 책임을 내가 져야한다는 부담이 너무 커지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니 모든 성패가 나 한 사람에게 달려있고, 내 밑에 딸린 입이 도대체 몇 개인데 하는 부담감이 나를 짓누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회사의 사장이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라고 생각하면 이 모든 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직장을, 이 사업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제가 아는 한 사업가가 이런 간증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제 회사 사장 자리에는 제가 앉아 있지만 저는 절대 제 책상에 ‘사장 아무개’라는 명패는 만들지 않았습니다. 우리 회사 사장은 제가 아니고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장님은 날마다 출근하면 제일 먼저 진짜 사장이신 주님을 만나 결재를 받고 업무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기도로 하루 업무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무슨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정말 주님이 사장 되셔서 그 기업을 책임져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주님이 친히 개입하셔서 해결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또한 내 상전이 주님이라고 생각하니 더 이상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업이나 직장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주님도 반드시 만 배나 갚아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직장생활 하고, 사업을 운영하면 손해 보기 딱 알맞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약속해 줍니다. 세상적인 기준, 사람의 기준으로 직장생활이나 사업을 하지 말라, 그렇게 되면 당장은 이익을 볼 것 같으나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반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직장생활과 사업을 해가며, 무엇보다 누구를 만나든지, 그가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아니면 나의 고객이든 사람에게 대하듯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 대하면 틀림없이 그의 마음이 움직이게 된다는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성경의 방법, 그리스도의 방법이 우리의 직장과 사업을 변화시키며 나아가 우리 가정도 변화시킬 줄 믿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단순한 직장인, 사업가가 아니라 내 직장, 내 사업체로 파송 받은 주님의 선교사입니다. 나 자신의 직장생활을 위해, 내 남편의 직장생활을 위해 기도로 나아갑시다.(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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