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에 가서 보고 들은 이야기 (마 28:9-10,16-20)
본문
갈릴리는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역입니다. 특히 부활하신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에게 제일 먼저 분부하신 말씀이 “제자들에게 가서 갈릴리로 가라”고 하신 분부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형제들에게 가서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28:1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14:27,28).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갈릴리에 집착하셨는지 오늘 아침 그 이유를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을 세 지역으로 나누는데 남부 지역이 유대 지역이었고, 중부 지역이 사마리아 지역이었고, 북부 지역이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이방과 같은 지역이었고 이방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갈릴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멸시를 받는 사람들이 살던 소외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주 관심은 갈릴리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그의 사역의 대부분은 갈릴리에서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 받기를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분부하셨지만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만나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열 한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만나시고 마지막 선교 위임령을 부여하신 곳이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 가서 주님을 마지막으로 뵈옵고 주님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들었습니다.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를 뵈옵고.” 이제 갈릴리의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갈릴리에 대한 관심이 선지자 이사야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 탄생을 예언하면서 메시야 탄생을 통한 큰 빛이 이방의 땅 갈릴리에 비췬다고 예언했습니다. 사9:1,2을 읽습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여기 스블론과 납달리는 모두 이방의 땅 갈릴리 지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남방의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실 것이지만 조만간 그 빛이 이방의 땅 갈릴리에 비췰 것을 미리 예언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에 주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땅에 머물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이 비록 예루살렘에서 일어났고 성령 강림의 사건이 비록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 강림의 복음이 예루살렘에 머물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만간 구원의 복음이 사마리아는 물론 사마리아보다 더 북방인 갈릴리를 통해 이방의 세계로 퍼져나갈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이방을 향한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향한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과 천민들과 멸시를 받는 사람들을 위한 종교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복음을 전하신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내신 곳이 바로 갈릴리였고 제일 먼저 복음을 전하신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애굽에 피난 갔다가 오셔서 사신 곳이 바로 갈리리 나사렛이었습니다.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마2:22,23).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가난한 자들과 천민들과 멸시를 받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가서 사셨습니다. 아마 그래서 미국 유학에서 갓 돌아온 한경직 목사님이 서울이나 평양에 머물지 않고 평안북도 신의주로 가서 목회를 시작하셨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신 후에는 갈릴리 북쪽인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셔서 사시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2-16).
그리고 그곳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서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마4:17). 그리고 바로 그곳 갈릴리에서 안드레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가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4:18,19).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전하신 곳도 가장 중요한 이적을 행하신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산상 설교를 하신 곳도 갈릴리였고,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곳도 갈릴리의 가나였고, 백부장의 하인과 베드로의 장모와 가나안 여자의 딸과 야이로의 딸을 고치신 곳도 모두 갈릴리였습니다. 오 천 명을 먹이선 곳도 갈릴리의 벳세다 광야였고 물 위를 걸으시고 폭풍을 잔잔케 하신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의 모든 가르침과 거의 모든 이적과 거의 모든 사역을 갈릴리에서 하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이시고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열 한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마지막으로 뵈온 예수님의 모습은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멸시와 저주를 당하시던 약한 모습이 아닌 높이 들림을 받으신 영광스런 모습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영광스런 모습이었습니다. 도마처럼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라고 경배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지극히 영광스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자리를 옮겨(감람원으로) 하늘로 올리워 가시는 주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놀라움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는 지극히 영광스런 모습이었습니다. 열 한 제자들이 정신을 잃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천사들이 나타나서 그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열 한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본 예수님의 모습은 땅에 속한 분이 아닌 하늘에 속한 분이었습니다. 저들이 따르던 예수님은 베들레헴에 속한 분도 아니었고, 나사렛에 속한 분도 아니었고, 예루살렘에 속한 분도 아니었고, 이스라엘에 속한 분도 아니었습니다. 저들이 마지막에 본 예수님은 온 땅에 속하신 분이었고 하늘과 온 우주에 속하신 분이었습니다. 아니 온 땅과 온 우주를 손에 쥐시고 온 땅과 우주를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셨습니다. 저들은 이제 민족주의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회복이 저들의 관심사가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저들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열 한 제자들이 주님으로부터 마지막으로 들은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는 말씀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땅 끝으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세계 선교의 사명을 부여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선교대위임령’이라고 부릅니다. 땅 끝으로, 모든 족속으로, 이방을 향하여, 복음을 들고 달려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왜 갈릴리에서 하셨습니까? 갈릴리는 이방이었고 이방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갈릴리 저 넘어 북쪽에 안디옥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리고 그 너머에는 갈라디아와 소 아시아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쪽으로 가면 마게도냐의 빌립보와 데살로노니가와 로마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복음을 들고 먼저는 천민들이 사는 갈릴리로 가고 그리고 안디옥을 지나 소 아시아와 마게도냐 각지로 달려가야 할 것으로 미리 보여주시고 싶어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행11:19에 보면 예루살렘에 살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스데반의 일로 박해를 당했을 때 서북쪽 베니게와 구브로를 거쳐 안디옥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전하는데.” 그리고 후에는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해서 소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갈릴리의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창12:1-3에 나타난 성부 하나님의 관심이 아브라함에게만 있지 않았고 “땅의 모든 족속”에게 있었던 것처럼, 부활 승천하시는 성자 예수님의 관심도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에게만 있지 않았고 이방의 땅 갈릴리와 갈릴리 저 너머에 자리 잡고 있던 땅끝의 모든 이방 족속에 있었던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도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관심이 갈릴리와 갈릴리 저 너머에 있는 이방의 모든 나라들과 족속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평생 선교사의 삶을 한 번도 살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고 이스라엘에만 머물러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갈릴리로 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천사들의 말씀에 제대로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의 가슴에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서 지금이라도 갈릴리와 갈릴리 저 너머에 있는 이방의 모든 나라와 민족들에게로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서 살지 못한다면 그들을 자주 찾아가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오늘의 갈릴리와 갈릴리 저 너머의 이방은 어디입니까? 우리 나라 선교의 초기에 하디 목사를 통해 회개와 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함경도의 원산과 길선주 목사에 의해서 회개와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평양과 한경직 목사에 의해서 사랑과 봉사와 구원 운동이 일어났던 평안도의 신의주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함경도와 평안도에 머물지 말고 저 너머 중국과 러시아와 동남 아시아와 저 멀리 중앙 아시와와 아프간까지 가라고 분부하시는 줄 압니다. 저는 오늘의 땅끝은 공산권 지역과 모슬렘권 지역과 불교권 지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과 중국과 동남 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이방의 모든 민족을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목사와 선교사들이 태극기 뺏지를 달고 다니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난한 사람들과 멸시를 받는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과 외국인들을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과 따뜻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인즈 워드에게 주신 소외된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과 착한 마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갈릴리와 이방을 품으신 주님의 마음과 생각과 눈물을 품고 주님처럼 살다가 주님처럼 죽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가 기도한 다음에 “갈릴리 마을 그 숲 속에서”를 다 같이 부르겠습니다. 1절은 성가대원들만 2절은 교역자들과 교사들만 부르고 그리고 다시 1절과 2절은 다 같이 부르겠습니다. (김명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