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무엇을 즐거워하십니까?
본문
오 소 희
계명은 지킬 수 없는 것인가?
만일 크리스천들에게 "당신은 의를 행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으레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의를 행하다니요? 저는 날마다 죄 짓고 사는 걸요. "만일 그들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계명이란 나약한 인간으로서는 지킬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다 아시므로 지킬 것을 기대하지도 않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계명이 십자가에서 다 폐하여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의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성경을 연구해보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는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채 단순히 남들에게서 들은 대로, 또 그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 올바른 지식을 정립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지킬 수 없는 것일까요? 만일 지킬 수 없는 것이라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걸까요? 많은 크리스천들이 생각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고상한 계명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인간이 얼마나 악한 죄인이며 그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목적일까요?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일차적인 목적은 그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만일 계명이 지킬 수 없는 것이라면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지키라고 명령을 하시겠습니까? 지킬 수 없는 것을 주고 지키라고 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정하신 분입니다. "나의 짐은 가볍고 나의 멍에는 쉬우니라."(마태복음 11:30)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킬만한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 쉽고 가벼운 것입니다. 그가 주신 계명은 우리에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닙니다(신명기 30:11).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명을 지키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몸소 그 계명을 행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거짓말하지 않으시며 우리에게서 무엇을 빼앗아가지 않으십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듯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자신이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우리에게 대접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는 예수님의 육체적인 삶을 통하여 눈으로 보았습니다.
계명은 영생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고 하는 단순한 도덕률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생각을 드러내는 심오한 것입니다. 계명은 하나님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의 뜻을 가르쳐주고, 우리로 하여금 의와 불의를 판단하도록 인도해주는 지침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계명은 사람을 억압하는 올무가 아니라 사람이 의를 행하고 악을 피하여 죄에서 온전한 자유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영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2:50). 누군가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간단히 "계명을 지키라"고 대답하셨습니다(누가복음10:25). 그는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하는 것이 그가 날마다 섭취해야하는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 '오늘 우물가에 가서 만나는 여인에게 복음을 전해주어라'고 하는 영혼구원 사업을 무엇보다 먼저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혼구원보다 더 우선적으로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각자가 일상생활 속에서 그가 하라고 하신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효과적으로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날마다 화를 내고 남들을 비판하는 습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당신이 가족이나 직장 동료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전도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다고 해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한편 당신이 만일 정직하고 성실하며 남에게 친절하다면 당신은 남들에게 호감을 얻고 그들은 당신이 하려고 하는 전도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계명을 지켜야 하는가?
많은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계명을 지켜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명을 지켜야 하는가를 묻는 의문 자체가 '계명을 지키고 싶지 않다' 고 하는 불의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태복음 7:24-27)
예수님께서는 그가 하시는 말이 그의 말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말씀만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의 계명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선전을 하고 다니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예수님의 질책을 받았습니다. "너희들은 왜 나를 '주여, 주여' 라고 하며 내가 하는 그 말을 행하지 않느냐?" 만일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가 주신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도 이와 똑같은 꾸지람을 들을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의 시대에 살지 율법의 시대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요." 크리스천들은 성경의 다른 부분은 잘 모른다고 해도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교리에 관해서는 자신 있게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고 구원을 받을 육체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은 크리스천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날마다 불의를 행하는 대신 의로운 계명을 지킬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계명은 지켜도 되고 무시해도 되는 그럴듯한 제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목적
대답은 간단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이방종교를 섬기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듯 계명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에게 수백 가지 계명을 주어 그들을 복종시킴으로써 그의 위엄을 드러내려고 의도하셨다면, 그는 인간으로부터 그다지 존경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를 악에서 보호할 수 있는 수단으로 계명을 주셨습니다. 계명은 전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은 인간이 공의를 행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고 불의를 행하지 않음으로써 악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지침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계명 중에 인간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부모님께 순종하면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올바른 길로 갈 것이고, 남의 것을 도적질하지 않으면 감옥신세를 면할 것이며,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정직성을 인정받아 승진과 성공의 기회를 얻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에게 순종하면 이방신을 섬기는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악을 저절로 피하고 순탄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예로부터 지금까지 복 받고 형통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때로는 특정한 계명을 왜 지켜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를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자녀가 왜 부모에게 순종해야하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특히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부모가 하는 말이 시대에 뒤떨어진 말처럼 들리고 부모를 거역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님 말씀이니까’ 라고 하며 고지식하게 순종하는 자녀는 하나님 말씀대로 복을 받습니다. 부모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한 자녀는 방탕한 길로 접어들고 인생을 낭비하고 결국은 후회를 하게 됩니다. 비록 그가 어렸을 때는 왜 부모에게 순종해야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으나, 그가 어른이 되면 왜 그런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명도 이와 같습니다. 지금 현재로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성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무조건 순종을 하면 결과는 매우 긍정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서 우리보다 더 똑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지식은 매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성경에 기록된 계명들을 왜 지켜야 하는지 이성적으로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하나님에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고 믿고 준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수천년 동안 사람들의 지식이 증가하고 지혜가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하신 계명들에 그럴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음을 하나하나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는 왜 성경에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을 세밀하게 나열해 놓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종교적인 의식정도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의학과 영양학이 발달한 덕분에 지금은 왜 그것들이 과학적으로 인체에 해로운지를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어려운 부담이었습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안식일에는 일을 할 수가 없고, 생활비는 쪼들리는데 십분의 일을 떼어놓아야 되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경건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형통하며,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들이 재정적으로 훨씬 더 성공한다는 것을 시간이 흐르면서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반면 거짓말을 하거나 남의 것을 훔치거나 혹은 이웃이 잘되는 것을 탐을 낸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하며 행복이 없겠습니까? 그러한 사람은 육체적으로 건강을 누릴 수가 없고 마음에는 평화가 없으며 재정적으로도 복을 받을 수 없음은 조금도 불합리한 논리가 아닙니다.
계명을 지키는 두 가지 마음
계명을 지키는 마음은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날마다 불의를 거부하고 부도덕한 유혹이 올 때마다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죄를 혐오하여 아예 불의를 행한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과거에 술에 탐닉하였다가 구원을 얻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과거에 그와 같이 방탕한 삶에 빠져있는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알콜중독자들을 회복시켜주는 수용소에서 책임을 맡아 일했습니다. 십여년이 지난 후 그는 다시 술에 노예가 되었고 그가 책임 맡았던 수용소에 감금되었습니다. 그는 십여년간 술을 마시지 않으려는 유혹과 싸우며, 때때로 조금씩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그는 술을 제어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며 그것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는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동안 술의 노예로 살았던 또 다른 사람은 구원받은 이후 성경 말씀을 읽으며, 술이 얼마나 악한 것임을 알고 난 이후로 술을 끊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고, 집안에 있는 모든 술병을 제거하였으며 같이 술을 마시던 친구들과 관계를 모두 단절했습니다. 그는 술의 유혹과 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유혹을 던질만한 모든 조건을 뿌리 뽑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것에 대하여 불순종할 생각이 조금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드릴 때 돈 쓸 곳은 여기저기 많은데 십분의 일은 떼어놓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한숨을 쉬면서 드립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계명은 무거운 것이 되기 쉽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 공급해주시고 복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기쁜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면서, 그들의 십일조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것을 기대하며 부푼 마음으로 드립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계명은 진정 가볍고도 쉬운 것입니다.
깨어 의를 행하라
위에서 우리는 계명은 지키기 위한 것이며, 우리는 계명을 지킬 수 있다는 진리를 배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날마다 넘어질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며 좌절에 빠져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일상생활 중에서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까?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린도전서 15:34)
영어 성경에 보면 "의에 대하여 깨어 죄를 짓지 말라"(Awake to righteousness and sin not)고 되어 있습니다. 의에 대하여 깨어나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의에 대하여 잠을 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들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걸핏하면 그들 자신을 "이 못난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결국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의인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고린도후서 5:21). 한 사람이 동시에 의인도 되고 죄인도 될 수는 없습니다. 비록 크리스천이 죄를 짓는 순간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죄인이 되었다가 의인이 되었다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인은 죄를 행하는 사람이고 의인은 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된 우리의 지체를 더 이상 죄를 짓는데 내어주지 말고 의의 병기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로마서 6:13).
크리스천들이 그들이 의인임을 깨닫고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부르면 의인의 행동을 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을 의인이라고 부르면 교만한 자가 될까봐서 두려워합니다. 성경을 알지 못함으로써 크리스천들은 그들이 의인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으며 남들의 눈이 무서워 의인이라고 인정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의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쓸데없는 죄인, 일주일 내내 죄짓고 살았노라'고 스스럼없이 고백합니다. 그들은 남들에게서 들은 말을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보지 않은 채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의를 행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비결은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의인,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데에 있습니다. 스스로 무능력하고 나약하며 어리석은 자로 보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 자긍심을 가지고 자신을 존엄한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만일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왕자와 거지에게 옷을 바꾸어 입혀 놓는다고 해도, 왕자 옷을 입은 거지는 그를 수종하는 신하들 앞에서 거지와 같은 천박한 행동을 할 것이며, 거지 옷을 입고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 왕자는 남들에게 조롱거리가 될지언정 왕자와 같은 품위 있는 행동을 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세계적인 전도자이거나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부유한 자선가, 정의로운 재판관, 혹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당신은 쉽사리 불의하고 비열하고 비천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큰 인물들은 모든 상황에서 자신을 제어하고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고 그들의 지위에 합당하게 행동합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모습을 입은 존귀한 인간으로 본다면 쉽사리 부도덕한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은 곧 불의를 행하는 것이며, 모든 불의는 고상한 데라고는 없는 부도덕하고 비열하고 비천한 것입니다.
계명을 행하는 것, 곧 의를 행하는 데에는 남달리 특별한 은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일반적인 사고방식은 '하나님께서 해주셔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계명을 지키는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지킬 수 있는 은혜를 주셔야 하는 것이지 내가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고 주장합니다. 옳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이미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담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죄를 멸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영으로 거듭난 크리스천은 죄를 거부하고 의를 행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계명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은 절대적으로 개인의 의지와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가 되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모든 사람이 그들의 육체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힘을 주는 덕목 중에 잊어버리기 쉬운 것이 절제입니다. 애석하게도 크리스천에게 절제란 환영받지 못하는 덕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절제라고 하면 아예 부정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고 억지로 참는 것은 건전하지 못한 율법주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음식을 절제하여 먹는 것은 사람을 심리적으로 억압하는 구속이며 음식은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어서 만족을 얻는 것이 더 건전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원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과 구분하셨으며, 탐식을 제어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가족보다도 더 사랑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텔레비전은 그들을 안목의 정욕의 노예로 만들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비롯하여 비디오, 컴퓨터 게임, 인터넷, 핸드폰과 같은 오락은 그 자체로서 악한 것은 아니지만, 분별과 절제가 없이는 사람을 쉽게 탐욕의 노예가 되게 하는 도구들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바빠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도 그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와 같은 도구에 사용하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먹고 싶은 대로 다 먹고 보고 싶은 대로 다보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것을 자랑이자 특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크리스천들을 구분하는 성품중의 하나가 절제입니다. 절제는 예수님의 성품이며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중의 하나입니다. 사도바울은 장차 오는 심판과 의를 행하는 것과 절제를 연결하여 강론하였습니다(사도행전 24:25). 오늘날과 같이 분주하고 복잡하고 유혹이 많은 종말의 시대를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절제는 부도덕한 유혹를 다스리고 의를 행하게 하는 요긴한 미덕일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 때문에 계명을 지켜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먼저 다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완벽하게 지키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계명을 지키셨고,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셨습니다(요한복음14:21).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동기는 오직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의 계명을 지킵니다(요한1서 1:5). 사람이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요구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다 들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그가 요구하신 계명은 실로 가볍고 쉬운 것이며, 그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한 수단입니다. 당신이 만일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조건 그의 계명을 지키기로 선택한다면, 당신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악한 자가 감히 건드리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공의를 행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잠언 21:15). 당신은 무엇을 즐거워하십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죄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편 1:2)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편 119:1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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