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도 쓰십니다 (막10:35-45, )
본문
해 같은 사람은 우유부단 하지만 따뜻하다. 달 같은 사람은 차갑지만 침착하다. 불같은 사람은 상처를 많이 주지만, 열정적이다. 물 같은 사람은 드러나지 않지만, 환경에 잘 적응한다. 나무 같은 사람은 고지식하지만, 밝고 마음이 착하다. 쇠 같은 사람은 날카롭고 무겁지만 듬직하다.
흙 같은 사람은 좀 지저분해도 포근한 사람이다. 사람들마다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떤 기질이 유독 좋다고 말할 수 없다. 각 기질마다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야고보는 복수심이 강한 인물이다. 그의 단점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어부로 부르셨을 때, 아버지와 삯꾼들과 배와 직업을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막1:19-20). 화끈한 성격이 야고보의 장점이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장점은 더욱 살리고, 단점을 덮어야 한다.
1. 불같은 사람은, 자신의 열심을 분별하라.
야고보는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예수님의 으뜸 되는 제자였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가까운 거리에서 항상 함께 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칠 때도(막1:29),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칠 때도(막5:37), 변화산 체험(마17:1)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도(막14:33), 예수님의 사역을 직접 목격하였다. 무슨 일이든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의 사람이었다. 이들은 남다른 열심과, 야망이 있었다(막10:35-45).
예수님의 으뜸 되는 제자들은, 다혈질과 점액질의 사람인데, 이들은 자신이 항상 주도권을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자신들에게 알리지 않고, 무슨 일들을 하면 견딜 수 없어한다. 자신이 모두 다 알아야 직성이 풀리기에, 자꾸 다른 사람들의 형편을 묻는다.
이들은 모두 다 열심히 일하기에 칭찬을 받을 수도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 때 다혈질과 담즙질은 다르게 행한다. 담즙질은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이기에, 잔인해질 수 있다. 뒤끝이 분명하게 있다. 한번 보복하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보복하기에, 친구에게 결국 멀어질 수 있다.
“너 죽여”했을 때에, 다혈질은 그냥 잊어버리거나, 자신이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모른다. 반면에 담즙질은 진짜로 끝까지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바로 담즙질이다. 반면 다혈질은, 보복하려는 마음이 없다. 갱단의 두목, 독재자, 재벌, 등이 담즙질의 유형이다.
다혈질과 담즙질 사람들은, 화를 잘 낸다. 다혈질 사람은 화를 내고는 후회 하지만, 담즙질 사람은 자신이 화나게 만들어 놓고, 다른 사람이 그 일로 얼마나 가슴 아파하는지 모른다. 우울질과 점액질 사람들은, 화를 낼 용기가 없어, 구시렁거린다. 용기가 없기에, 두려워서 새로운 일을 주저한다.
야고보는 무척 성격이 급한, 불같은 사람이다. 오직 했으면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보아너게’(분노의 아들, 우레의 아들)라는 별명을 붙여 주셨을까?(막3:17) 사람의 됨됨이는 이름보다, 별명에서 더 잘 나타나는 법이다. 오늘 본문에 분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먼지 나는 길을 걸어서 왔기에 피로가 겹치고, 햇볕은 매우 따가웠다. 일행은 시원하게 발도 씻고 싶고, 따뜻한 음식이 그리워졌으며, 편안히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 여행자들을 맞아 주지 않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이렇게 말했다.
“주여 (엘리야가 한 것처럼 역시)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9:54). 자신들이 냉대를 받았다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모두 태워버리자고 말했다. 야고보는 불로, 화풀이를 하기 원했다. 이렇게 복수심이 투철한 사람들이, 바로 담즙질이다.
사마리아인은 앗수르와 유대인과의 혼혈족이기에, 유대인은 이들을 아주 무시했다. 이런 자들에게 무시를 당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억울했다. 그래서 불로 태워버려도 된다고 생각했다. 야고보의 자만심과 분노는 복수심에 불타, 불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다 쓸어버리고 싶었다.
야고보는 모욕을 참지 못하는 성미와,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파멸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역사를 보면 이런 일이 종종 있다. 중세 암흑시대의 마녀 사냥과 히틀러와 같은 유대인 학살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이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학살할 때, 자기의 잔인한 행동을 합리화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피 값을 치르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오해하여,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과 헌신을, 종종 잘못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다. 교회와 목사님에게 아주 충성하다가, 자신의 자존심이 상처를 받게 되면, 그 교회가 무너지기를 원하고, 목사님을 죽이려고 한다. 용의주도하게, 엉뚱한 소문을 흘린다. 바로 이런 사람이 담즙질의 사람이다.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힘을 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전에, 자기 열심과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야고보를 부르신 목적은, 사람을 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다. 야고보에게 주신 사명은, 심판자가 아니라 전도자다. 따라서 분별의 영을 달라고 기도하라.
2. 불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힘으로 일하라(막10:35-45).
야고보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은 아무 것도 없지만, 언젠가 큰일을 하실 분이기에,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야망을 실현해 보려는 기대가 컸다.
사람은 누구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어 한다. 예수님을 믿는 중에도, 세속적인 욕구를 가지고 믿는 분들이 많다. 예수님의 도움을 얻어, 자신의 뜻과 야망을 이루려는 사람이 있다. 주님의 뜻과는 너무 다른 야망을 이루고 싶은 사람이다. 야고보가 그랬다.
그래서 주님은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져, 능욕 당하고 죽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자리다툼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세속적인 야망, 높아지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은 다툼을 일으킨다. 높아지려는 마음은 주님의 제자들이라도 분열시키고, 분쟁하게 만든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힘이 있다. 분노도 그 중에 하나의 힘이다. 분노는 엄청난 힘이 있다. 분노가 일어나면 평상시와 다른 힘, 이상한 열심을 가지고 일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결코 분노로 일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행동 근거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 분노가 되면 안 된다.
헬라어의 대가 ‘로버트슨’ 이라는 분이, 요삼9절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를 자신의 마음대로 교회를 지배하려는 사람이라는 글을 써서, 교회잡지에 기고했는데, 전국 각지에서 자신을 어떻게 알고 인신공격하느냐? 나에 대한 모독이라며 항의를 했다고 한다.
글을 취소하지 않으면, 정기구독을 취소하겠다고, 편집자에게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한국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분열과 분쟁의 문제다. 분쟁하는 교회는 특징이 있다.
그 교회의 열심 있는 성도들이, 분노를 가지고 일한다는 특징이다. 어떤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면, 일부가 갈라져 나와서, 그 옆에 다른 교회를 세운다. 이 사람들의 기쁨은, 상대에게 괴로움이 되고, 상대가 부흥이 안 되면,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고 기뻐한다.
이렇게 갈라진 교회가 부흥하는 경우는, 별난 열심 때문이다. 저쪽 교회보다는 더 나아야 한다는 경쟁심에서 비롯된 열심이다. 그래서 보통 때는 열심 없던 사람이 열심을 내고, 헌금 안하던 사람도 앞장서서 헌금한다. 당장 교회를 세워야 하기에, 헌금도 전도도 열심히 한다.
이렇게 교회가 갈라졌을 때, 수적으로 훨씬 더 많아지기에, 싸움도 하나님의 뜻이라면서, 합리화 한다. 하지만 그 뿌리를 바로 볼 필요가 있다. 그 뿌리는 바로, 오로지 저 교회보다 나아져야 한다는 생각뿐인, 시기, 질투, 경쟁심뿐이다.
이렇게 10년 쯤 지나면 미움이 사라지기에, 경쟁심이 사라진다. 이 경우 또 다시 뜨거워지려면, 또 싸워야 한다. 또 하나의 적을 만들어야 한다. 그 교회의 성도들은 이미, 분노해야만 일하는 체질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은혜 받아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분노해야만 움직이는 성도는 문제가 있다.
결국 갈라진 교회는, 다시 분열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또 다시 미움과 경쟁으로 세월을 보내게 된다. 우리 주변에 이런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갈라지고 거기서 또 갈라져 나온다. 한국 교회가 자꾸만 약화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마귀가 던져준 분노의 힘을 가지고 일하려 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교회는 분노로 일하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기쁨으로 일해야 한다. 세상에는 분노를 조장하는 세력이 있다. 마귀는 그 힘으로 일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그 이유도 모르고 분노할 때가 있다. 분노를 자극하여, 그 분노를 이용하는 세력에게 속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를 보라. 이슬람 과격단체인 알카에다를 보라. 데모를 하는 사람들을 보라. 전부 분노의 힘으로 일한다. 그러나 분노로 일하기 시작하면, 결과는 파멸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분노로 일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으로 일하는 존재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10:44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섬기는 인생이 되면, 어느새 분노는 사라진다. 사람은 교만하기 때문에 분노하게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낮아진다면, 분노가 아닌 순종만이 있게 된다.
분노로 이글거리며 명예욕에 강했던 야고보도, 예수님을 따르다가, 철저히 섬기시는 예수님을 보고 섬기는 제자가 변화되었다. 우리도 분노가 아니라, 섬김과 순종을 통해 변화 받는 인생,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종이 되기 바란다.
3. 불같은 사람은, 믿음을 위해 순교한다(행12:1-2).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악명 높은 헤롯왕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는 유대인에게 인기를 얻고, 자기 입지를 굳게 하기 위해 교회를 핍박했다. AD 44년 기독교인을 박해하면서, 교회 지도자들을 치는데, 그 표적으로 야고보를 지목했다. 야고보는 열정적으로 전도하는 사람이었기에, 유대인들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열성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체포당하게 했다. 성경에 기록된 제자들의 죽음은, 가룟 유다와 야고보뿐이다. 야고보는 스데반과 함께, 믿음을 위하여 죽은 자들의 선구자가 되었다. 막10:39절에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했을 때, 야고보는 주님의 잔을 마시겠다고 대답했다.
그때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말했지만, 그는 결국 주님께서 주시는 잔을 마시는 자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마셨던 죽음의 잔을 이어서 마시는, 최초의 제자가 되었다. 야고보는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열심히 전하다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잡혔다.
야고보를 죽이려고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헤롯의 신하 ‘요시아’는 거짓 증거를 대고 야고보를 잡아들였다. 요시아는 야고보가 죽음을 앞두고, 겁에 질려 창백한 얼굴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렇지만 야고보는 오히려, 마치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수처럼, 밝고 기쁜 모습이었다.
결국 요시아는 야고보의 용기와, 그리스도에 대한 굳건한 헌신에 감격하여, 야고보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야고보가 마지막으로 사형 당할 때, 이 사람이 뛰어 올라왔다.
“야고보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당신을 계속 괴롭혔습니다. 당신을 계속 추격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정말로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당신 속에 있는 그 평화, 그 은혜는 세상이 어떻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기 원합니다.”
그때 야고보는 쇠사슬에 묶인 그 팔로 그를 안아 주면서 “주님의 용서가 당신의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하면서 목을 껴안고 기도했다. 손을 내밀어 자신의 형제로 삼았다. 헤롯의 칼 앞에 둘은 죽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 보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질을 아름답게 다듬어 쓰신다. ‘분노의 아들’이라는 기질을 가진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성령의 역사로 최초의 순교자와 사랑의 사도로 바뀐다.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고도, 담즙질의 약점을 드러내며 살았던 야고보지만,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야고보는 예수님과 동행하자, 예수님의 인품과 능력을 통해, 야고보는 변화될 수 있었다. 그래서 주님과의 동행이 중요하다. 주님과 동행하다보면, 우리 성격이 변한다. 태도가 변한다, 삶의 목표도 변한다. 주님과 동행하다보니까, 예수님과 똑같은 심정으로 헌신하는 모습으로 변했다.
사랑하면 통하게 된다. 텔레파시가 통한다. 사랑하면 그가 아플 때 나도 아프고, 그가 그리워지면 나도 그리워진다. 떨어져 있어도 그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순교의 원동력은 영적 체험에 있다. 주님을 만나면 변한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오순절 성령강림의 체험을 통해, 순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 복수심에 불탔던 사람도, 순교할 수 있고 세상 야심을 가졌던 사람도 순교할 수 있다. 인간의 열심이 하나님을 향한 강한 섬김으로 바뀌었다.
결론입니다. 야고보는 성령 안에서 변화를 받아, 열정적으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었다. 세속적인 야망을 가졌던 야심만만한 사람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헌신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삶에 아름다운 변화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조용한 사람도 쓰신다 (요 1:35-42)
안드레는 베드로의 동생이다. 형처럼 고기 잡는 어부였다. 하지만 형과는 매우 대조적인 성격이다. 베드로는 마치 폭죽처럼 여기저기서 터지다가, 금방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가라앉는 성격이라면, 안드레는, 조용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말씀 듣는 일을 즐겨했고,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잘 들었다.
드레는 고기 잡는 일보다는, 영적인 일에 더 깊이 몰두했다. 그래서 침례요한의 제자가 되었다. 또한 본문을 보면, 침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을 하자, 듣고 예수님을 좇는다. 아주 냉정하다고 여겨지지만, 이 결단이 안드레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안드레는 기독교 역사에서, 제일 첫 번째 신자요, 첫 번째 제자요, 첫 번째 전도자, 첫 번째 선교사가 되어서, 초대교회는 안드레에게 ‘프로토클레토스’(처음 제자)라고 영광스럽게 불렀다. ‘안드레’는 “남자답다”는 뜻으로, 남자다움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우리나라 사람은 남자답다고 하면, 허세를 부리면서, 큰 소리 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남자답다고 하는 말은, 용기 있고 결단력 있는 자가 남자답다는 말이다(고전16:13). 남들이 하지 않는 일에, 다른 사람보다 먼저 뛰어들려면, 큰 용기와 도전정신이 필요하다. 안드레는 용기 있는 자다.
이제까지는 요한을 떠났지만, 예수님을 따르려면, 인정에 얽매이지 않는, 큰 결단력이 필요하다. 또 안드레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자, 그의 직업, 재산, 부모를 모두 두고 예수님을 따른다(마4:18~). 이렇게 올바른 용기와 도전정신이 남자다움이다.
안드레는 자기 형의 그늘에 늘 가리어 있었으나, 불평하지 않고 뒤에서 힘써 일했다. 그는 조용히 일했지만, 큰일을 했다. 안드레가 전도한 시몬 베드로는 후에, 하루에 수천 명을 회개시키는 놀라운 전도자가 되었다. 만일 안드레가 없었다면, 베드로도 없었다.
베드로를 예수님께 소개한 사람은, 바로 안드레이기 때문이다(42). 목소리 큰 사람만 쓰임 받는 것은 아니다. 조용한 사람도 쓰임 받을 수 있다. 뒤에서 다른 사람을 세워주면서, 얼마든지 큰일을 할 수 있다. 자신이 드러나지 않아도, 하나님은 위대하게 쓰신다.
교회를 잘 안 나오는 무디를 찾아간 주일학교 선생님이 계셨다. 그는 무디에게 예수님을 전했고, 무디는 그날 회심했다. 그 후에 무디는 미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 전도자 무디는, 한 사람의 숨은 공로자, 킴볼 선생님 때문에 위대한 일꾼이 되었다.
우리가 전도한 사람 가운데는, 하나님의 큰 일꾼이 나올 수 있다. 기대를 갖고 전도하자. 자신보다 능력 있는 사람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다. 강철 왕 카네기의 비문에는 “여기 자기보다 우수한 사람을, 주변에 불러 모았던 사람이 누워 있다”고 적혀 있다고 한다.
자신의 능력만으로 돈을 버는 사람은, 남을 고용하여 돈을 버는 사람 이상의 부자가 될 수 없다. 세종대왕은 직접 측우기를 만들지 않았다. 장영실로 하여금 능력을 발휘하도록 만들었기에 위대하다. 안드레의 능력은 연결시키는 능력이기에, 귀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도 연결시키는 능력을 키우자.
1. 자기 형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전했다.
35절을 보면, 안드레는 침례요한에게 침례 받은 그의 제자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지나가시자 침례 요한이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36)이라고 외친다. 안드레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았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무엇을 구하느냐?”(38)고 물으셨다. 그때 안드레는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라고 하였다. 동문서답처럼 여겨지지만,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과 사귀면서, 배우고 싶어서, 주님 계신 곳을 가르쳐 달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와 보라”하셨고, 안드레는 다른 제자(요한)과 예수님을 따른다. 그리고 예수님과 하룻밤을 보냈다. 예수님과 하룻밤을 보내고 난 다음, 안드레의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예수님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면서 확신이 생겼다.
확신이 들자 아침에 곧장 뛰어가서, 자기 형 시몬에게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복음을 전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감격이 있기에 전도하게 되어 있다. 예수님에 대한 감격이 있다면,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예수님에 대한 감격이 있다면, 누구나 다 전도할 수 있다.
안드레는 전도를 위해서,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학교에 가본 적도 없고, 전도에 관한 책을 읽은 적도 없었다. 단지 예수님을 만났기에, 그의 가족도, 예수님을 알기 원했다. 그래서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다. 전도는 쉬운 일이다. 그런데 악한 마귀는 어렵다고 말하게 한다.
전도를 어렵게 생각하도록 하니까 전도를 못한다. 설교를 어렵게 만드니까, 설교를 통해서 영혼을 얻지 못한다. 마귀가 교회의 능력을 빼앗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말씀을 어렵게 만들어 버린다. 중세 교회는 라틴이로 설교를 했다. 그러니까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다. 교회 와서 졸다가 갔다.
만약 한국에서 히브리어로 설교를 한다면, 알아듣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전부 다 귀머거리가 될 것이다. 그런 모습이 중세의 모습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지 못하니까, 미신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성상을 숭배하게 되고, 성물을 숭배하게 된다.
사람이 만든 떡을 예수님의 몸, 성체라고 하고, 절하며 숭배하게 되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이 나타나서 자국어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설교는 들려야 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하나님은 들리는 설교를 원하시고, 마귀는 들리지 않는 설교를 원한다.
안드레는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의 제자가 된 다음, 가족을 전도했다. 진정한 전도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가족을 전도하기 어려운 이유는, 말이 아니라 생활로 전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말을 잘해도, 평소에 생활을 통해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가족 전도는 어렵다.
안드레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전도하는 본을 보여주었다. 성격 거칠고 기고만장한 그의 형 베드로를 세워주었다. 자신이 먼저 주님을 만났다고, 음에, 베드로가 설교하면 한 번에 3천 명씩 회개시키는 설교자가 되었다. 안드레 없이는 베드로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안드레처럼, 형제를 찾아나가는 정신이 필요하다. 모여서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친교하고 봉사해도, 나가서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모이는 이유는, 나가기 위해서 이다. 나가서 누군가를 데리고 와야 한다.
안드레는 성공적인 어부다. 큰 월척을 잡았다. 베드로가 공중 앞에서 대중전도를 했다면, 안드레는 조용하게 개인 전도를 했다. 베드로가 투망 전도라면, 안드레는 낚시 전도를 한 사람이다. 두 가지 다 필요한 방식이다. 안드레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한 사람이었기에 형을 구원할 수 있었다.
2. 오병이어를 가진 소년을 예수님께 연결시켰다(요6:1-13).
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 모여들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길어져서, 음식을 가져 오지 않은 사람들은, 다들 지치고 허기져 있었다. 마을이 너무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왔기에, 음식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5)고 물으셨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심은, 제자들의 믿음과 행동을 보기 원하심이다. 그러자 두뇌 회전이 빠른 빌립이 계산을 해보자, 조금씩 먹여도 2백 데나리온 어치의 떡도 부족하다고 했다. 빌립은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기에 머리만 굴렸다.
그러나 안드레는 머리를 쓰지 않고, 많은 군중 속에 끼여 있는 아이들까지 일일이 살폈다. 주위를 살피다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진 아이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5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다.
우리는 종종 큰일과 사람에 묻혀서, 어린아이에게 보내야 할 관심과 사랑이, 증발됨을 경험하게 된다. 안드레는 아주 작은 것까지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인간의 계산대로가 아니라, 인간의 계산에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넣어서 계산하였다.
자신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해내실 줄 믿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했다.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안드레만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행동으로 보였다. 작은 것도 크게 볼 수 있기 바란다.
스코틀랜드의 ‘셀콕’이라는 마을에서 큰 부흥회를 일주일 동안 했다. 전도 부흥회였지만, 아무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집회는 실패라고 많은 사람이 말했다. 마지막 날 헌금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한 소년이 헌금은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너무 가난하여 헌금을 드릴 수 없지만, 헌금 대신 저의 몸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겠습니다.” 했다.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헌신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 소년이, 세계 역사에 큰 지각변동을 가져다주었다. 그가 바로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 리빙스턴이다. 바로 이렇게 하나가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안드레는 주일학교 성자다. 유세비우스 교회사에 보면, 안드레는 러시아, 그리스, 소아시아, 터키 등지에서 선교하다가, 그리스 아케아의 페크라스에서 “아멘, 주 예수여 영광을 홀로 받으시옵소서”라는 말과 함께, X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되어 있다.
화가 머릴로는 ‘성 안드레의 순교’라는 그림에서, 안드레의 십자가 앞에, 한 소년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삽입하여 그렸다. 우리 스스로 어린이를 포기하지 말자. 어린 영혼을 구하자. 또 자신에게는 능력이 없을지라도, 안드레처럼 연결하는 자가 되면, 능력이 우리 가운데 나타난다.
안드레는 어디에 써야 하는지를 알았다. 지금은 정보의 홍수시대, 인터넷 시대다. 모든 사람에게 정보가 열려 있고, 전 세계적으로 많은 정보가 공유되고 있다. 어린이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은, 리빙스턴 같은 사람을 키우는 일과 같다. 안드레가 아이 하나를 데려왔을 때, 오병이어가 일어났다.
옛날에는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그 해법을 알아야 풀 수 있는 ‘노하우’(know-how) 공부가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제 그보다 노웨어(know-where),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 빨리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정보는 다 있기에, 빨리 찾아내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3. 이방인(헬라인)도 예수님께 연결시켰다(요12:20-23).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온 사람 중에, 당시 복음의 문 밖에 있던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헬라인들은, 직접 예수님을 뵙기 위해, 예수님의 제자가운데, 헬라식 이름을 가지고 있던 빌립을 찾아가서,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빌립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안드레에게 먼저 상의하자, 안드레는 즉시 예수님께 데려가서 여쭈었다.
안드레가 헬라 사람을 인도하자, 예수님께서 심오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신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12:23). 또 율법을 모르는 헬라 사람에게, 자연의 이치를 통하여, 구원의 도리를 설명한다. 십자가의 도리를 씨 맺는 열매의 이치로 설명하신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 유명한 밀알의 복음을 증거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이때 예수님 앞에 왔던 헬라인 중 하나가 훗날 누가복음,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라고 한다.
안 믿는 자들이 어떤 자든, 예수님을 믿고자할 때, 열린 마음으로 따뜻이 영접하고, 그들에게 맞게 복음을 전해주어, 예수님께 인도하고 구원을 받게 해야 한다.
그 후 헬라인이 어떻게 되었는지, 성경에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안드레의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혼자 품고 끙끙대지 말고, 그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가야 한다. 혼자 문제를 끌어안고 있다가, 나중에 감당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나 안드레는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갔다. 안드레는 선입견을 버리고, 헬라인은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데리고 나갔다. 안드레는 처음에는 가족을 전도하더니, 숫자에 들지 못하던 어린아이까지, 개처럼 취급받던 이방인들까지, 예수님께 소개하였다.
안드레의 모습은 머리 쓰는 신앙이 아니라, 해보는 신앙이다. 머리만 쓰면 역사가 없지만, 해보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다. 전도도 하면 된다. 기도도 하면 된다. 하기 않기 때문에 안 된다. 안드레의 사역은 개인전도다.
전도는 하나님의 명령이며(마28:19-20),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눅15:10),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하는 일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영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소개하는 안드레와 같은 사역을 해야 한다.
제사장이라는 말은 다리를 놓는 자라는 뜻이다. 안드레의 삶은 파이프와 같다.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는 그런 파이프다. 하나님의 온갖 좋은 것을 세상에 흘려보내는 파이프다. 파이프는 수원지와 집을 연결해서 흘려보내는 관이다.
파이프 중의 파이프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는 파이프다. 그 파이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흐른다. 오늘도 저는 예수님을 통해, 흘러내리는 생수를 마신다. 힘과 용기도, 위로와 격려도 예수님을 통해 받는다.
성도는 교회는 파이프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복을 주시기 위해 가설한 파이프다. 교회의 사명은 흘려보내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교회를 통해, 계속해서 하나님의 온갖 좋은 것들이, 세상에 흘러가길 원하신다. 그리고 세상으로 흘려보내고 계신다.
교회를 통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은혜를 맛보아야 한다. 이렇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은혜가, 우리에게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