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감사 지수는 얼마입니까? (엡 5:20-21)
본문
하나님 안에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비밀한 길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길을 찾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미래를 결정함에 있어서 인간처럼 그렇게 까다롭게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시대를 잘못 만나서 몸을 팔며 한 생애를 연명하던 기생 라합이라고 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처럼 까다롭게 따지셨다면 어떻게 약속의 땅 가나안의 주역이 되었겠으며 어떻게 예수님의 족보에 오를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나님 안에는 사람의 판단을 초월한 무궁무진한 사랑의 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이 무궁무진한 사랑을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인가를 채우러 왔습니다. 컬컬한 심정으로 왔습니다. 성전에 지식을 채우러 온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너무 답답해서, “하나님 뭐 좀 주세요.” 당장 사업은 어려움을 당하고, 건강은 잃어서 답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물질 좀 주십시오. 하나님 돈 좀 주십시오. 건강을 주십시오”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영을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만 채워지면, 하나님의 은혜만 채워지면, 그 몸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면 어디든지 하늘 나라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황폐하기 쉬운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인간의 마음입니다. 제일 기갈이 심한 곳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어떤 때는 살맛이 없고 공연히 곤고합니다.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입니다. 전화 한 통화 받고도 깨어지고, 말 한마디 듣고도 깨어집니다. 아무 것도 아닌데 깨어집니다. 자꾸 깨어집니다. 자꾸 황폐해집니다. 이 황폐한 마음으로부터의 자유, 이것이 다급한 문제입니다.
‘호렙산’이라는 말은 ‘황폐한 산’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니까 황폐한 산이 은혜로운 산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함게 하는 산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황폐한 곳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 호렙산의 마음, 황폐한 마음에 하나님의 생기를 넣어야 합니다. 호렙산에 올라 하나님의 돌 비를 받듯이 거기에 하나님의 계명을 넣어야 합니다. 마음이 황폐해지면 미움이 생깁니다. 마음이 황폐해지면 분노가 생깁니다. 마음이 황폐해지면 인생에 두려움과 걱정이 생깁니다. 마음이 황폐해지면 위선이 생깁니다. 마음이 황폐해지면 짜증이 생깁니다. 그래서 뼈를 녹이고 맙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채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일년에 한번씩 지키는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추수감사 주일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감사하고 사는 사람인가를 한번 점검해 본다는 의미에서 굉장히 뜻이 있는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감사지수가 얼마나 높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보는 것입니다.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감사지수가 낮은 사람일수록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은 매우 강한 어조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범사에’라는 말과 ‘항상’이라는 말입니다. 감사하라고 하는 말에 ‘범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으면 우리는 왠지 모르게 부담을 느낍니다. 감사하라는 말 앞에 ‘항상’이라는 수식어가 있으면 기가 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범사에 항상 감사한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범사’라는 말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떤 일을 당하든지 무조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시종일관, 어떤 상황을 만나도 변함없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강도 높은 의미를 가진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에 가책을 받지 아니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 그 가운데는 목사인 저 자신이 가장 많은 가책을 받을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를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항상 감사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때가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려고 무척 노력을 하고 또 감사도 많이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요구하는 선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저 자신이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담을 느낍니다. 누구든지 남의 말을 할 때는 쉬운 겁니다. 자신이 지키지 못해도 가르칠 때는 쉬운 겁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1988년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한창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 중요한 이슈가 사형제 폐지론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라는 후보는 사형제 폐지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사형제도는 없애야 된다면서 전국을 누비며 유세를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CNN의 토크쇼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쇼에는 유명한 버나드 쇼라는 앵커가 담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듀카키스를 앞에 놓고 버나드 쇼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사형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하신다죠?” “네, 그렇습니다.” “참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선생님, 만약에 선생님의 아름다운 그 부인이 괴한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한 후 살해당했다고 합시다. 나중에 그 범인이 잡혔을 때 선생님은 여전히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고서 당황했습니다. 머뭇머뭇하면서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만 명의 시청자들이 보고 있었는데 이 장면에서 그들이 받은 인상이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자기와 상관이 없으니까 사형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지 진짜 자기 일이 되면 그런 소리를 할 사람 아니라는 인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토크쇼 때문에 그가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는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할 때에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하고 설교하기는 쉽습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하고 얼마든지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좀더 진지하게 이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 가는 아내를 쳐다보는 남편이 과연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오랜 지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고쳐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병은 점점 더 깊어 가는 자신을 보면서 과연 그 입에서 감사가 나올까요? 평생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될 어린 장애아인 자녀를 갖고 씨름하는 부모가 그 입에서 정말 감사가 나올까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력서를 수십 통 써 가지고 다니면서 취직을 해보려고 하지만 회사에서 면접 한번 하지 못하고 연거푸 퇴짜를 맞는 젊은이의 입에서 과연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나올까요? 내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정말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이런 입장에서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말하면 이 말씀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비현실적인 말씀입니다. 이상론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은 적당히 보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태도로 이 말씀을 넘겨도 괜찮겠습니까? 결론부터 먼저 말씀 드리자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놓고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꼭 깨달아야 합니다. 왜 범사에 감사를 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항상 감사하라고 하시는지 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름으로’라는 말을 ‘때문에’로 바꾸어도 전혀 잘못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것은 너무 비현실적인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변명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한번 여러분 마음에 되새겨 보십시오. 그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고 저 무지하고 잔인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흘만에 그를 죽음에서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의 옷자락을 믿음으로 붙드는 사람은 어떤 죄를 범했든지, 어떤 과거를 가졌든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기가 막힌 신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그 예수님을 우리는 마음에 모시고 삽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이 예수님 한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이 나에게는 없다고 할지라도 나에게 예수님이 계신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그분 때문에 우리는 항상 감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님 한 분만 소유하고 그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을 찾았다면 그 사람은 언제든지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조건에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찬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없는 사업은 성공같되 실패요
예수있는 생활은 만사유익 합니다.
예수님 내주여 내중심에 오소서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이 찬송을 부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이런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이 말씀이 나와 별로 관계가 없다고 외면하면 안됩니다. 만약 지금까지 예수님 때문에 범사에 항상 감사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면 제가 가슴에 가책을 받고 여러분에게 고백하듯이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시고 고쳐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 영감 있는 시인이 있습니다. 송명희 선교사를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녀는 뇌성마비로 한번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온 몸이 비비 꼬여서,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하면 죽다 살아나는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해야 할 정도로 일급 장애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많은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 시 하나 하나를 읽을 때마다 가슴에 저미어 오는 감동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쓴 시 가운데 ‘나’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못하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보는 것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가만히 음미를 해 보십시오.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까? 뇌성마비로서 남이 가진 것의 90%도 못 가진 자매입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러자 무엇이라고 감사합니까? 남이 갖지 못한 것 내게 있고 내가 가진 것 남이 없는 것을 비교하면서 오히려 “주님, 나는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 없어도 예수님 한분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눈으로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수준에 저 자신이 도달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저만이 아닙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러분들 모두가 이런 수준에까지 올라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많이 가졌다고 감사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건강한 사람들 중에서 감사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자기 뜻대로 다 소원성취 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을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삽니다. 없습니다. 진정한 감사를 하는 사람을 한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진짜 감사는 누구에게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면 진정한 감사가 나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내 곁에 계시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로운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이 찬양이 우리 모두의 찬양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감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명령하시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명령하실 때에는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뒤따라 보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 저는 못합니다.”
“잔소리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해. 내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도록 은혜를 줄게.”
우리는 그저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라.” “어떻게 항상 감사합니까?” “할 수 있어. 내가 네게 능력을 준다.” 믿으십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명을 하면 안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만큼 믿습니다. 누구를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앞길이 막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옵니까?
“하나님, 제 앞길이 캄캄하지만 주님이 제 앞에 있는 구름을 걷어내시고 어둠을 쫓아 주실 날이 올 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시니 이런 고난을 주시는 줄로 압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감사하는 사람의 믿음은 알아줘야 합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어느 정도 믿고 계십니까? 감사하는 것만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100평 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감사가 없으면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열세평 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눈만 뜨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그 입에서 찬송이 나올 정도로 주님 앞에 감사하는 심령을 가지면 그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복을 누가 빼앗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다릅니다. 누구하고 다릅니까? 세상 사람하고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입만 열면 불평이 심합니다. 불평은 하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감사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입에서 계속 감사가 나옴으로써 내가 그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감사가 없습니까? 그러면 그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강합니다. 내 몸에 질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지만 감사하는 사람은 그 질병도 능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에게서 누가 그의 행복을 꺾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감사 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 좋아집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행복해 집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세상 사람 앞에 매력적인 존재가 됩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강해집니다. 할렐루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돌아가셔서 의도적으로 감사하십시오.
“나는 예수님 믿는 사람이다. 예수님 때문에 나는 무조건 감사할 수 있어.” 하면서 감사하면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지금까지 불평하던 것을 감사하면 하나님이 만족의 은혜를 주십니다. 지금까지 남을 원망하던 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지금까지 만족하지 못하던 것을 감사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날보고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나는 감사해야 돼. 아버지에게 순종해야 돼.” 하면서 어떤 형편에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사할 것들을 찾아 하나님 앞에 감사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이 좋아집니다.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강해집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 매력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런 멋있는 자녀가 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여러분은 헬렌켈러를 아실 겁니다. 그녀는 세 가지 장애를 가진 사람입니다. 보지 못했습니다. 듣지 못했습니다. 말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는 이 세 가지 장애를 가지신 분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여러분은 다 듣습니다. 봅니다. 말합니다. 우리가 평생을 그렇게 산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헬렌켈러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도 이런 소원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3일동안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내가 3일동안만 보고 싶었으면 이라고 했겠습니까? 여러분은 30년을 보지 않았습니까? 40년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는 3일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3일만 볼 수 있다면 제일 먼저 나를 가르쳐주고 깨우쳐 준 설리반 선생님을 보겠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만나보고, 하늘에 별들을 바라보고, 꽃밭을 걸어보고….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시간이 다 흘러서 집에 돌아와서 내가 눈을 감아야 할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그나마 3일 동안을 봤는데 3일 동안을 보는 시간이 다 지나서 다시 눈을 감아서 못 보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나는 이 3일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하여준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기도를 드리고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다시 광명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볼 수 있는 곳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가더라도 눈을 감으며 3일간을 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겠다. 여러분, 30년 평생을 눈뜨고 살면서도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허다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한번 없는 게 아닙니다.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 잃어버렸을지라도, 비워졌을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감사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감사, 없어도 감사하고 비워져도 감사하는 이런 감사, 즉시로 드리는 감사, 영광을 돌리며 드리는 감사, 엎드리어 빈손으로 드리는 겸손한 감사, 이 감사가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이 감사가 참된 믿음의 삶에 능력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임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자신을 조용히 되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의 감사 지수는 얼마입니까?
감사 지수가 높은 사람,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감사 지수가 높은 사람, 그는 강한 사람입니다.
감사 지수가 높은 사람, 그는 아주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감사 지수가 높은 사람, 그가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다같이 주보에 있는 복음송 송명희 선교사가 지은 ‘나’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부르시면서 복음송에 있는 ‘나’가 바로 내가 될 수 있는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용히 눈을 감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없음에 원망하거나 불평하지는 않았습니까?
남들처럼 건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짜증내지는 않았습니까?
방금 불렀던 노래의 가사처럼 남이 갖지 못한 것 내게 있고, 내가 가진 것 남이 없는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감사 지수는 얼마입니까?
이 시간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신앙으로의 회복을 위해서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오 주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