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알의 밀알이 됩시다.(요 12:20-33)
본문
요즘 가을 들판에는 추수가 한창입니다.
가을 벌판에 추수하는 곡식들을 보면서 우리는 작은 씨앗의 위력을 봅니다.
봄에 밭에 뿌린 시앗들은 너무 작고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가을에 그 작은 씨앗들이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비단 자연에만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있는 한 사람의 작은 섬김은 30배 60배 100배 10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밀알의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24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래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합니다.
왜 주님깨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고 잇습니까?
주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것에 대해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들은 이제 주님께서 왕으로서 높아지기 위함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때는 유월절이라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위한 왕이 될 것을알고 수군거리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러 찾아왔습니다. 오늘 본문 밀알의 비유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인자의 영광을 얻을때가 왔도다”라고 하십니다. 여기 영광을 얻을때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생각할때에는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때입니다. 높아지고 인정받고 박수를 받을때가 보통 세상에서 영광을 받을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다르셨습니다. 그 영광의 때는 바로 낮아지는 때요 죽음의 때입니다. 주님이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것은 바로 밀알처럼 십자가에 죽을 때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사람들에게 가장 영광을 얻을 그 순간 우리 주님은 한알의 밀알이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과 같이 십자가에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을때 많이 열매를 맺습니다.이것은 누구나 아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입니다. 누구나 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스스로 밀알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밀알처럼 스스로 자신을 버리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위대함은 무엇입니까? 말로그치지 않고 그것을 삶으로 증명하여 보였습니다. 이론적이고 지식적인 분이 아니라 이론을 생활을 통해 보여주셧습니다. 지식을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그 지식을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우리 주님게서는 밀알의 이론과 지식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증거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우리에게 밀알의 삶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이 친히 경험하고 나타내시니 그 밀알의 삶을 우리에게 살기를 소원하십니다.내 속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풍성한 결과들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스스로 한알의 밀알이 되시고 열매를 맺으면서 우리들을 향하여 그런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시간 우리 주님같은 밀알의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밀알이 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1. 작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한알의 밀알이셨습니다. 밀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크기가 작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한번도 크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작은 자였습니다. 여러분 아래 있는 사람이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로 내려올때 영향려을 미칩니다. 우리 주님은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땅에 오시고 한알의 밀알같이 낮아지졌습니다.
그 작은 자로서 우리에게 본보이신 대표적인 사건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앞절에 소개되었던 예루살렘 입성의 사건입니다.
에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실때에 모습을 가만히 보십시오. 이미 사람들은 에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전국 각처에서 올라온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을 때에 마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다는 소문을 사람들은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문둥병자를 고쳤으며, 어떻게 앉은뱅이를 일으켰는가? 하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거기다 더더욱 바로 몇일 전에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일으킨 사건도 들었습니다. 또한 그들 중에서는 친히 그같은 기적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고쳐주셔서 병이 나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오병이어의 기적에 참여 하였던 사람들도 물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기뻐하며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에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오시는 것은 이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합니다.
여러분 “호산나”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 찬양대 이름도 호산나입니다.
'이제 우리를 구원하십시오! 당신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왕이십니다!'하면서 그렇게 기쁘게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환호에 걸맞게 입장하시지 않았습니다.
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의 요구라하면 승리의 입성을 해야 합니다. 최소한 말정도는 타고 입성을 해야 영광스러운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성경은 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부분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슥9:9절을 보시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새끼니라"
여기서 예언된 말씀 중에서 분명히 그가 구원을 베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그가 나귀를 타고 오는데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올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 되어서 구원을 주실 우리 에수님이십니다. 만왕의 왕이 되어서 세상 나라에 하나님나라를 이루시고 왕이 되실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들어오시는 것입니까?
요한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은 다시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 분이 다시 오실 그 때에는 분명히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며, 이 세상의 역사를 끝내러 오실 것입니다. 그 묘사는 요한 계시록 19장을 보시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계19:11절에;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무엇을 타고 오신다고 되어 있습니까? 백마를 타고 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분명히 정복하러 오시며, 심판하러 오시며, 권세와 영광 중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초림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작은 자로서 이 세상에 평화를 주시는 분으로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오셔야 했는지를 미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큰 사람으로 높일때 한알의 밀알처럼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죄인으로 자기를 죽기까지 낮추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좇아가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때로 다투고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가 크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조차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노상에서 제자들끼리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이유는 이제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주님의 나라가 임할 것인데 그때 누가 주님의 좌편과 우편에 앉게 될 것인가? 그들은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싸웠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주님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무엇이 나를 높아지게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지식입니까? 돈입니까? 명에입니까? 아니면 나이입니까? 무엇이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높아지게 하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쳐서 복종하여 나를 낮추는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평화를 줍니까? 큰 사람이 아니라 작은 사람입니다.이땅에 우리 주님은 밀알같이 작은 자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끝까지 작은 자로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셧습니다.
영국의 신학자 [풀리처]에게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위대한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풀리처는 대답했습니다. "만일 그대가 영국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대를 들어 써 주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주경가 베이커는 "인생은 계단과 같다. 위로 올라가면 하나님을 알게되고 밑으로 내려가면 자신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드보르작]은 민족주의 낭만파 음악인으로 명성을 떨친 사람입니다. 특히 그가 작곡한 첼로 협주곡[신세계 고향곡]은 음악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어느날 드보르작을 존경하는 프라하의 시민들이 그에게 꽃다발을 증정했습
니다. 그 꽃다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에게"라는 리본이 매어있었습니다.
며칠 후 사람들이 드보르작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들이 주었던 꽃다발은 드보르작의 작곡실 한켠에 있는 베토벤의 흉상 밑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보르작이 직접 쓴 찬사도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에게..."
드보르작은 시민들의 찬사와 꽃다발을 받고 몸둘 바를 몰라하며 고민하다가 자신의 음악세계에 결정적 영향력을 주었던 베토벤에게 바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 앞에서 갖아야 할 자세가 무엇입니까? 작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취해야할 겸손한 삶의 태도는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 말미암았으며 주님께 돌려야 하며 주님의 받으셔야 된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이 최고의 겸손인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진짜 신앙은 바로 작아지는 신앙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바다가 모든 강들 가운데 왕이 되는 것은 바다가 가장 아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가장 낮아질때 가장 높아지는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2. 죽으라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십니다.
한알의 밀알이 죽을때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을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시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만약에 우리 주님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여서 죽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가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여서 도망하여 숨었다고 가정하여 보십시오. 종종 우리나라의 경우 죄를 짓고 처벌받는 것이 두려워서 숨어지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이렇게 숨어서 지냇다면 어찌하여 당신 한 사람의 생명은 보존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그럴 경우에 이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죄의 노예가 되고 마귀의 종이 되어서 비참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주님이 한알의 밀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종으로 오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롬5:·19 “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죽으심으로 죄에서 자유하게 되엇습니다. 주님 때문에 마귀에게서 해방되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지옥에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른 봄에 농부가 작은 밀알을 땅에 심을때 그 한알은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습니까? 그런데 그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심기울 때 때가 되어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시간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우리에게 자기에 대한 죽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밀알이 죽을때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우리가 죽을때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구체적으로 죽으라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25절에서 자기를 사랑하지 말고 자기를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여기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인간은 누구나 자기생명을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을 사랑하기에 매일 밥을 먹습니다. 조금 아프면 약을 먹기도 합니다. 옷을 사서 입고 얼마나 미모에 신경을 많이 씁니까?
그런데 여기 자기생명을 미워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우리가 밀말이 되고 그 밀알이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은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중심적인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먹는 것도 자기 중심입니다. 입는 것도 자기 중심입니다. 말하는 것도 자기 중심입니다. 노는 것도 자기 중심입니다. 말하는 것조 자기 중심입니다. 이게 세상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자기 밖에 모릅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먹을 것이 있어도 남과 나누어 먹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말하는 것도 자기 생각 밖에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을 자기에 맞추어 가려고 합니다. 오직 자기가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줍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짜증나게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기에 빠진 이런 이기적인 사람들은 지금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피해를 주고 있는지 상처를 주고 잇는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에수님이 찾아오면 십자가가 중심에 앉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먼저 나보다 남을 배려하게 됩니다. 먹는 것도 남중심입니다. 입는 것도 남중심입니다. 말하는 것도 나중심입니다. 조금 있으면 같이 나누어 주고 베풉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함께 나누고 좋아합니다.말을 하여도 남을 배려하고 남을 이해하고 남의 입장에서 말을 할줄 압니다. 그런데 이것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성령의 소욕입니다.
갈5장 22-23절을 보십시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합니다. 이 성령님이 주시는 성품을 보십시오. 전부 이타적입니다. 주님의 사람들은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주님의 사람들은 화평합니다. 주님의 사람들은 오래참습니다. 주님의 사람들은 자비합니다. 양선이 있습니다. 충성이 있습니다. 온유하며 절제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부흥이 있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풍성함이 있습니다.이런 분들이 있는 목장들이 번식합니다. 이런 분들이 있는 소그룹은 활기가 있습니다. 풍성한 열매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주님께서 교회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주님을 따라가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에 있어서 누가 제일 당황스러운 일을 당하는지 아십니까?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우리 강동교회 속에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많아지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보면 잘 되는 교회와 안되는 교회를 보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너무 세상적으로 말하면 잘 난 사람들,똑똑한 사람들이 많으면 교회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안에서 미련한 사람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 주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 사역할 때 할 수 잇으면 나를 숨기시기 바랍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기를 알아주지 않을때 불안해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를 보고 자기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자기 이름도 드러내려고 합니다. 자기 사역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기를 드러내면 나는 살지만 주님이 죽습니다. 나는 행복하지만 주님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고전15:31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나를 매일 죽이시기를 바랍니다. 끊임없이 나를 드러내고 나를 과시하고 자랑하기를 원하는 나에 대해서 주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죽이시는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2. 따르라는 것입니다.
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한알의 밀알은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그리고 그 열매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섬기게 됩니다. 열매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한알의 밀알로 사시다가 땅에 떨어지는 밀알처럼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버리심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얻게하는 도구가 되었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사 하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시는 영광의 결과를 얻으셧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라는 것은 바로 주님의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범사에 주님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주님을 따라합니다.말을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행동을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향한 우리들의 섬김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처럼 마음을 갖을때 우리가 세상을 섬깁니다.주님처럼 말을 할때 우리가 사람들을 섬깁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행동할 때 이웃을 섬기게 됩니다.
이것은 저도 여러분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땅에서 주님의 뒤를 따라간다는 것은 많은 고난의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타협하고 맙니다. 그리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삶은 특별한 사람들 가령 목사님들 조금 더 적용하면 장로님들같은 분들만 이런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들면, 목사가 '신앙 생활을 이렇게 저렇게 하셔야 됩니다.'하고 이야기 하면, 요즘 교인들은 참 약아서 앞에서는 다 그럴 듯한 감동스런 얼굴을 하고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딱 돌아서기만 하면 마음에 이미 판정을 내립니다. '목사님 목사님이나 그렇게 사십시오. 제가 그래서 목사님을 좋아하고 목사님 교회에 나갑니다. 그러나 목사님 말대로 산다면 사흘도 못 가서 굶어 죽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느 것이 어느 것에 해가 된단 말입니까? 성경은 우리와 달리 현실 생활이 해가 된다고 판정을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우리들은 어떻게 판정을 내린다고요? 현실 생활이 더 주가 되어 있으므로 신앙생활이 해가 된다고 말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힘든 신앙 생활은 목사님께서 좀 대표로 살아 주시고 우리는 여기서 살기로 결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80% 쯤은 현실에다 발을 디디고 있고, 20%만 신앙에다 발을 낳고 있을 뿐입니다. 왜? 20%는 그래도 넣고 있을까요? 죽으면 내세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때 심각해지니까 천국은 가야겠고 그래서 예금 20%를해 놓고 현실 80%는 여기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본받고 따라가는데 무엇이 버티고 있습니까? 세상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로마서12:2 “너희는 이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은 세상에서 살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대로 살지 않기로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신 세상의 가치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는 길은 세상의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사망길이요 죄악의길입니다. 그런데 자꾸 그 길이 우리를 유혹합니다.여러분 주님을 따를때 이 세상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믿음은 세상을 이깁니다. 믿음은 세상의 유혹을 이깁니다.
이 유혹을 이기고 세상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이렇게 세상에서 주님의 길을 따를때 주님께서 저를 귀히 여겨주실 것입니다. (박 춘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