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가다라 (마 8:28-34)
본문
‘웰컴 투 동막골’이란 영화가 올해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지금 관객 800 만 명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이 영화가 성공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동막골은 강원도의 평화로운 마을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화목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동막골에는 여일이라는 정신지체장애인이 있습니다. 이 여일이 여자 주인공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여일이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활에 활력이 되고 있습니다.
조용한 동막골에 전쟁에서 낙오된 병사들이 찾아옵니다. 국군과 북한군과 연합군이 모이게 됩니다. 마을을 배경으로 이들은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웁니다. 그러나 여일이의 천진난만한 행동은 병사들 사이에 긴장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결국 전쟁의 위협 속에서도 동막골의 평화는 깨지지 않습니다. 동막골은 망가지지 않는 스스로의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그러진 세상에서 사는 현대인들에게 동막골은 마음속의 천국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가다라 지방은 동막골과는 정반대의 동네입니다. 여기에도 여일이 같은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그는 귀신들린 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귀신들림으로 인해서 동네에서 쫓겨나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풍랑을 겪으면서 갈릴리 호수 동편으로 갔습니다. 건너편에 도착한 동네는 가다라 지방입니다.
그런데 마을에 들어서기도 전에 귀신들린 사람 둘을 만납니다. 이 사람들은 무덤 사이에서 나왔습니다. 이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사납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비교적 자세하게 이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들은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밤낮 무덤과 산을 왔다 갔다 하면서 괴성을 질렀습니다. 또 나중에 고침을 받고야 제 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고침받기 전에는 옷을 벗고 뛰어 다닌 것입니다. 이렇게 날뛰면서 지나가는 행인을 위협했기 때문에 고랑에 채워 쇠사슬로 묶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귀신의 힘으로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습니다.
마가복음 5:5 에는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무덤에 묶어 놓았지만 사슬을 끊고 산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묘지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산과 묘지 사이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산과 묘지를 왕래한 것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했다는 증거입니다.
무덤은 죽은 자의 자리요 산 자의 자리가 아닙니다. 무덤에 있으면서 산 자로써가 아니라, 자기를 포기하고 죽은 자로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있기에는 아직 생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모진 목숨은 삶을 갈망해 다시 산으로 갑니다. 산 속을 헤매고 다녀 보았지만 산에 있기에는 너무도 자신이 죽음에 가깝습니다. 산에 있기엔 자신의 자리가 죽음에 가까워 다시 묘지로 갑니다.
그는 날뛰며 다녔습니다. 돌로 제 몸을 자해를 했습니다. 온 몸이 상처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고, 미워했기에 돌로 자기 몸을 쳤습니다. 이것은 죽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러다 지나가는 사람을 만나면 으르렁 대면서 달려들었습니다. 이것은 산자를 증오한 것입니다. 자기들을 동물처럼 버린 사람들에 대한 원망입니다.
그들의 몰골은 귀신 그 자체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이 사람을 더러운 귀신들린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다가 귀신이 들렸는지 모릅니다. 귀신들림이란 자아가 귀신에게 제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귀신이 사람 속에 들어가 그 사람의 자아를 누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그의 정신과 몸을 마음대로 주장합니다. 이들을 제압하고 있는 귀신은 하나가 아닙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과 귀신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름을 물어보셨습니다. 그 때 귀신들은 많기 때문에 군대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군대는 레기온이라는 로마식 군대 조직입니다. 삼천 명에서 육천 명 단위입니다. 나중에 그 귀신들이 돼지 떼 이천 마리에게 옮겨갑니다. 그것은 귀신의 수효가 엄청나게 많음을 보여줍니다. 정말 끔찍하게도 많은 귀신들에게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행한 삶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버려진 인생입니다. 그것도 산 사람을 공동묘지에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그들이 빨리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에게 가정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사실 가정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그가 예수님을 통해 정신을 찾았을 때 주님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보면 그에게 집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 식구들은 그를 포기했습니다. 그를 없는 식구 취급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는 가정도 없고, 친구도 없고 이웃도 없습니다. 쓸쓸한 공동묘지 외딴 곳에서 지냅니다. 만남도 교제도 없는 쓸쓸한 인생입니다.
그들은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이미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죽음에 보다 가까웠던 그는 짐승처럼 울부짖었습니다. 이런 아픔의 소리 외에, 달리 자신의 처지를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밤에는 무덤으로 낮에는 산으로,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며 지냈습니다. 쉼이 없고 부르짖음만 있는 사람. 살아 있기에는 죽음에 가깝고, 죽음에 있기에는 아직 모진 생명이 붙어 있던 사람입니다. 그들이 있는 자리는 바로 이 세상에서의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이런 더러운 귀신들린 이들에게 관심을 보인 첫 번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가다라 동네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인 관심은 귀신들린 자를 가망 없이 보고 포기한 무의미한 관심입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이들을 쇠사슬로 묶어두었습니다. 쇠사슬은 비인격적인 도구입니다. 그것은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증세를 더욱 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고치려 들지는 않고 내다 버리려고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어쩌면 귀신들보다 동네 사람이 더 무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신병자나 귀신들린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관심과 사랑입니다. 그러나 냉혹하게 버림을 받을 때 그는 더 이상의 희망을 잃게 되며, 자신까지도 한없이 미워 제 몸을 돌로 치며 학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의 주된 관심이 어디 있었는지는 이 사람이 고침을 받고 난 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귀신들렸던 사람이 맑은 정신으로 돌아와 옷을 챙겨 입고, 말도 또박또박하면서 정상이 되자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일행을 향해 이 마을을 속히 떠나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한 생명의 소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 속에 빠져 잃어버린 돼지 2,000 마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에 연이어 더 큰 물질적 손해를 볼지 몰라 겁을 먹었습니다.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것이 허물어질 새라,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는 소시민의 무리들이었습니다. 이웃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만을 알며 자기 몫만을 열심히 챙기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미친 사람은 이런 사회가 만들어 냅니다. 개인적인 안일과 행복, 이득이 되는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챙겨 먹는 도박의 사회. 그곳에서 빼앗기고, 잃고,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진 사람들은 미치거나 귀신들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는 어떻습니까? 가다라라와 다른 것이 있습니까? 제 정신 가지고 살아가기가 퍽 부담스러운 세상입니다. 누가 와서 미쳐 보라고 안 해도 가만있으면 정말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은 험한 세상입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하나같이 현대인들은 노이로제나 약간의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모두 자기만 위하고, 자기만 알아 달라고 하고, 자기 것만 챙기는 사회에는 귀신들이 판치게 됩니다.
우리는 요즘 흉악범들이 판을 치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그들의 가정이 불우하고, 사랑이 결핍되었을 때 우리는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사회적 멍울을 치유하지 못했고, 단지 그들을 쉽게 포기했을 따름입니다.
이 귀신들린 이들에게 두 번째로 관심을 가진 이는 귀신들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에게 가장 큰 관심을 가진 것은 귀신들입니다. 그는 지금 귀신들려 있었습니다. 이들은 생명의 적대자들이요, 인간의 인격을 파괴시키며 거기서 희열을 느끼는 악의 존재입니다. 인간을 아프게 하며, 괴롭게 하고, 악한 것에 맹종케 하며, 자꾸 자신을 미워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화도 잘 내고 사는 맛을 잃게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귀신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렇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8:31에도 이 사건을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이 귀신은 예수님에게 “제발 자기들을 지옥에 보내지 말아 주십사”하고 애원을 하고 있습니다. 귀신들도 자신이 갈 곳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옥은 귀신들도 가기를 무서워하는 곳입니다.
여러분 ! 귀신이 지옥을 말한 것은 지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지옥이 있으면 천국도 있는 것입니다.
세상 종말에 지옥이 있다는 것을 비웃는 사람들. 죽으면 그걸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막 삽니다. 죄에 대한 엄청난 대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사는 것입니다.
귀신들도 자기들 본거지인 지옥을 겁내 했습니다. 지옥은 귀신들도 가기 싫어하는 곳입니다. 귀신들은 지옥보다는 인간 사회 속에서 지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인간을 희롱하고, 서로 원수 되게 싸우게 만들며 장난치는 것을 훨씬 재미있어 합니다.
마태복음 12:43-45 말씀을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이야기 있습니다.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합니다. 그러다 얻지 못하면 나온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습니다. 그러면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됩니다.
이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귀신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귀신도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소개되어 있는 귀신은 더러운 귀신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들리면 나타나는 현상이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옷매무시를 흩트리고, 더러운 몰골을 만듭니다. 가다라의 귀신들린 사람도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옷을 벗었고,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였고, 쇠사슬을 끊을 정도의 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귀신이 나갔을 때 물 없는 곳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싫어하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이 물을 영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문자 그대로 읽어봅시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기 위해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광야는 물이 없는 곳입니다. 물 없는 광야에 가면 귀신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광야로 나가신 것입니다.
물은 더러운 것과 상극입니다. 물은 깨끗케 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싫어하는 것은 깨끗한 것입니다. 세례란 물로 씻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러운 귀신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가다라의 귀신들린 자에게서 나온 더러운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로 옮겨갔을 때 비탈길을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몰사했다고 했습니다. 돼지 떼를 물로 뛰어들게 한 것이 바로 귀신들에게는 치명적인 처방이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 귀신이 쉴 곳을 못 찾고 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데 그것을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연약한 사람을 쉴 집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거룩한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 3:16 말씀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했습니다. 성전이란 귀신의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신 거룩한 집입니다.
귀신이 들어가려는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다는 말은 사람의 편에서 본 것이 아니라 귀신 편에서 봤을 때입니다. 귀신이 거하기에 좋도록 소제되고 수리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그 사람의 정신적 상태가 매우 심약해져 있고, 귀신이 빠져나간 빈자리에 성령을 모시지 못해서 비어 있기 때문에 귀신이 탐을 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채우되 충만하게 채워야 합니다. 귀신 충만이 아니라 성령 충만입니다. 이 성령 충만의 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또 귀신도 종류가 있습니다. 다시 돌아오면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덜 악한 귀신이 있고, 더 악한 귀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은 군대 귀신이 들어갔다고 했으니 별의 별 귀신이 그에게로 들어가서 괴롭혔을 것입니다.
귀신은 귀신들린 사람을 통해서 말을 합니다. 이 귀신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놀랍게도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멀리서부터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하나님의 아들이여”하며 찬양을 했습니다. 이렇게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봅니다. 그리고 귀신도 찬양을 합니다. 그러나 이 찬양은 우리의 찬양과 다릅니다. 우리의 찬양은 감사와 기쁨 중에서 하지만, 귀신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악과 선이 함께 사이좋게 지내자고 타협을 청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귀신도 때가 되면 예수님이 자기들을 멸하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귀신은 자신들도 시한부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까 멸망되기 전에 온갖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악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악을 분쇄하고, 악의 세력들을 우리에게서부터 내쫓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주님은 이미 즉각적으로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귀신들린 자에게 관심을 가진 세 번째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처음에 이 가다라 지방에 오시기 위해 배를 탔을 때, 제자들에게 확실한 목표 지점을 지적하시며 “바다 저 편으로 가자” 하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오직 가다라의 이 버림받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사나운 풍랑 뱃길을 뚫고 밤새 노 저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신과 귀신들린 자와 구별하고 계십니다. 귀신을 향해서는 분노하시고 엄히 꾸짖고 계시지만, 귀신들린 사람을 향해서는 한없는 긍휼하심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2,000 마리의 돼지 떼에게 쫓으셨습니다. 그 돼지들은 가파른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모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돼지 이천 마리는 요즘 시세로 한 마리 당 이십오만 원으로 잡을 때 오억 원이 넘습니다. 이것은 귀신 들린 사람의 값어치가 돼지 이천 마리보다 더 값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 하나님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더구나 귀신 들린 자라도 너무나 귀한 생명입니다.
귀신들렸던 사람은 이제 옷을 찾아 입고 맑은 정신으로 앉았습니다. 옷을 입은 것은 잃어 버렸던 자신을 다시 찾았다는 증거입니다. 앉은 것은 이제 더 이상 무덤에서 산으로, 산에서 무덤을 왕래하며 안식하지 못하던 삶이 이제 쉼을 얻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 분을 만나면 벗겨진 몸에 옷을 갖춰 입게 됩니다. 무덤 사이를 방황하던 사람이 죽음에서 생명의 자리로 바꿔 앉게 됩니다. 산을 헤매며 삶의 목표를 잃은 사람이 내가 왜 사는 것인지를 확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희망 속에서 새 삶을 살게 됩니다. 무덤과 산을 쉴 새 없이 왕래하던 사람이, 무덤에서 산에서 소리 지르던 사람이, 그 부르짖음이 변하여 주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그 분을 만나면 자신을 꽁꽁 묶고 있던 쇠고랑이 풀립니다. 악에서 벗어나 완전히 해방됩니다. 자유인이 됩니다.
여러분 ! 이 귀신들렸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맑은 정신을 찾은 다음 어찌되었는지 아십니까? 마가복음을 보면 그는 예수님을 좇아 함께 배에 오르기를 바랐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네게 있었던 일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귀신들렸다가 나은 것보다 더 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기를 버렸던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행하신 이 큰 일을, 이 놀라운 사랑을 가족들에게 전했습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무덤에 내버려두었던 가족에게 말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자기 동네에, 그리고 더 넓은 지역 온 데가볼리스에 이 기적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사실 가다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을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다시 배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가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못다 하신 일을 이 사람이 남아서 대신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우리가 보는 가다라는 어둡고, 자기 이익만 계산하는 차가운 동네입니다. 잃어버린 돼지 값에만 관심이 있지, 죽어 가는 이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랑이 메마른 동네입니다. 그래서 그 동네에서는 그만 이런 귀신들린 이웃이 생긴 것입니다. 병든 도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을로 들어오시려고 하자 입구를 막아서며 참 구세주를 거부한 도시였습니다. 주님도 들어가지 못한 그 동네에는 떠도는 더러운 귀신들이 상주하는 곳입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동네는 귀신들이 판을 치기에 좋은 동네가 되고 맙니다. 이렇게 귀신이 판을 치는 동네는 사랑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 계산에만 열중해 서로를 속이고 이웃의 등을 후리는 냉정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가다라를 귀신 들렸던 이가 바꾸어 놓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외부 사람이 들어오면 으르렁 대며 달려들던 마을이었습니다. 웰컴 투 가다라가 아니라 언웰컴 투 가다라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그 마을은 바뀌었습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가다라로 변해갑니다. 그 이유는 귀신들렸던 사람이 복음에 헌신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웰컴 투 가다라!
혹시 우리의 도시가 가다라와 같이 점점 따뜻함을 잃어 가고 있지는 않은지 둘러봅시다. 가다라에 떠도는 귀신들은 사람 속에서 싸움을 일으키고, 극한 대립으로 서로를 불신하도록 만들어 사회를 몰락시킵니다. 만약 우리의 도시가 가다라처럼 귀신들이 판을 치고 있다면, 그래서 거리에는 광란이 넘실대고, 정신병원이 만원이 되어 가고 있다면 이 귀신들의 장난을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은 이런 악의 세력에 판을 치는 세상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귀신들렸던 사람은 주님께로부터 오히려 귀신을 물리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대신 그는 마을에서 희망의 메신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가다라를 동막골로 만드는 기적의 사명입니다.
삭막한 우리의 가정을 바꿀 사명이 나에게 있습니다. 어지러운 우리 동네를 환히 밝힐 사명이 나에게 있습니다. 교회가 냉랭하다면 따뜻하게 바꿀 사명이 나에게 있습니다. 일그러진 직장을 활력있게 바꿀 사명이 나에게 있습니다. 어디서나 내가 거하는 자리를 언웰컴에서 웰컴으로 바꾸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황 금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