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법칙 (눅 16:1-13)
본문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오늘도 큰 사랑과 큰 은혜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날 새벽기도회가 끝나고 개인기도 시간에 슬피 울며 기도하는 나이 많은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권사님의 기도는 너무나 애절하고 긴박했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아버지, 제발 살려주세요. 그냥 죽으면 안돼요. 너무 불쌍해요. 주여, 믿습니다. 살려 주세요"
권사님의 기도소리가 얼마나 크고 절실했던지 목사님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필시 권사님 가족 중에 급환으로 입원을 한 사람이 있거나 사경을 헤매는 사람이 있나보다 짐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권사님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가가서 조용히 물었습니다.
"권사님, 기도 중에 누구를 꼭 살려 달라고 기도하셨는데 위급한 가족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러자 그 권사님은 울먹이면서
"목사님 너무 너무 불쌍해요, 꼭 살아나야 해요. 목사님도 기도해 주세요."
"그럼요 저도 기도할께요. 누가 그렇게 위급한가요?"
그랬더니 이 권사님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목사님은 텔레비젼도 안보세요? '장미빛 인생' 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맹순이가 암으로 죽어가잖아요. 불쌍해요. 기도해주세요." 그 권사님은 맹순이를 살리기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썰렁했습니까?
하여튼 요즘 맹순이 인기가 하늘을 찌릅니다. 그 인생이 불쌍해서, 아니 바로 내가 그런 것 같아서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후회없는 사랑을 해야 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을 바로 알고 바로 합시다.
이 사랑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면 있어야 되는 처음과 마지막을 연결해 주는 마땅한 법칙이 무엇입니까?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은 사랑의 법칙에 대해서 간단히 정의를 내렸습니다.
“사랑에는 한 가지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의 법칙은 한 가지인데 즉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무슨 이유이든지 간에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죄인을 의인으로 하나님께서 신분을 바꿔주십니다.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생이 바뀌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삶의 자리가 바뀝니다. 죽음에서 생명을 얻게 되고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저는 찬송이 절로 나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인도 하시니 내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는 사람에게는 절망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께서 만사형통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세상적인 노래는 부르거나 듣다보면 '죽고 싶다. 떠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 되지만, 찬송은 '내가 더 하나님을 의지해야지, 내가 희망을 갖고 힘을 내야지'그런 마음이 들게 돼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행복하시지요?
우리가 서로 이 사랑을 전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행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같이 본 성경은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일명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청지기의 비유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청지기의 지혜를 배우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랑의 법칙은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성경을 보면 주인은 청지기에게 맡은 일을 그만 두라고 합니다. 해고통지서를 받은 거지요. 이제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시간 동안에 해고당한 이후를 준비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죽음의 시간과도 같습니다. 죽음이후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새는 죽음을 앞두고 구슬프게 울고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가장 진지해 진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 우리의 삶에도 마지막이 온다고 생각을 하고 보다 진지하게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만드는 사랑의 법칙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곧 없어질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입니다.
친구를 팔아서 돈을 벌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입니다.
9절 말씀을 같이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성경에서 불의의 재물이라는 말은 "불의가 개입된 돈" 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보다는 "곧 없어질 재물"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재물, 돈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재물은 영원히 내 곁에 있을 수 없습니다. 붙잡아 놓으려 해도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나는 것이 재물입니다. 그러므로 가지고 갈 수 없는 재물을 손에 움켜잡고 죽는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써야 할 곳에 쓰지 않고 남겨둔 재물은 불의한 것입니다.
또 다른 뜻은 세상의 재물은 "남의 것"입니다.
성경은 나의 소유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긴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것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남을 위해 다 쓰고 가야 합니다. 다 안 쓰면 결국 남의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겨진 재물은 결코 내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잘 사용한 재물만이 하늘에 영원하고 참된 것으로 쌓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먹은 것만 내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늘에 쌓은 것만 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재물은 곧 돈을 의미하는데 없어질 재물입니다. 영원히 소유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다고 다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쓰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또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움으로써 친구를 만든다는 말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 어떤 학자는 전도를 위해서 돈을 쓰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물질을 써야만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진 물질은 가장 값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14절 이하를 보면 바리세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 다음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부자도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소위 내가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지옥 갑니다. 지금은 다 모릅니다.
그런데 거지도 천국에 갈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판단하지 맙시다.
돈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면 그 돈이 없어졌을 때에 친구가 우리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할 것입니다
나사로는 거지입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위로' 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왜 거지가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늘나라에서 위로를 받고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돈으로 친구를 사귀었을 것이다.' 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사용한 그 시간이, 우리가 사용한 그 물질이, 영원한 처소에서 당신을 기다리게 하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투자한 그 자원들이 영원한 처소에서 당신을 영접하고 환영하게 하란 말입니다. 영원한 세계에 가치를 두고 영원한 세계를 위해 투자하며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11월 첫 주일은 우리교회가 총동원 주일로 지킵니다. 총동원 주일은 가족 모두가 함께 교회에 출석하는 날입니다. 그날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족이 다 교회에 나와야죠. 나를 비롯해서 가족구성원 모두가 천국에 가서 만나는 그날로 생각을 하면서 온 가족이 총동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날을 위해서 돈을 좀 쓰셔도 될 것 같습니다. 지옥에 떨어지려고 하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가자고 하는 일인데요. 돈 좀 쓰세요. 그 동안 교회에 나오다 안 나오시는 분들에게 가셔서 교회에 나가자고 돈으로 친구 좀 사귀시기 바랍니다.
또한 11월 첫째 주일 추수감사 주일을 준비하며 은혜로운 감사주일을 보내기 위해 준비하는 주일입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은총을 물질로 드리는 주일이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물질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감사하며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만 드리면 되지!' 하는데 아닙니다.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마음만큼 드리는 게 헌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재물 자체가 불의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불의한 사람들에게 불의하게 악용당하고 있는 이 세상 물질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선용하여 이웃을 구제하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재물을 이용하여 구령(救靈) 운동에 선용하라는 말입니다. 전도비로, 선교비로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이 세상을 떠나 주님 앞에 설 때 주님 앞에서 상급과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더 확실하게 밝혀 놓은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했던 오른편에 있던 양들에게 임금 되신 주님께서 주신 의인들에 대한 보상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 25:35-36에 "저들은 주린 형제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형제에게 마실 물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으며,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임금 되신 주님께서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 25:34)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사실상 재물로 주님을 섬긴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예수 자신에게 행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5:40).
막 10:28-30에서 주님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한 영혼에게라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집을 드리고 땅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백배의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주는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눅 6:38).
잠언 11:24.25절을 보면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했습니다. 요즘 누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때에 참으로 의미 있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 하려니와 못 본체 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잠 28:27).
여러분 강영우 박사를아십니까?
오늘 오후예배때 이 분의 영상 간증집회를 하려고 합니다.
강영우(57)박사는 눈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지만 어려움을 딛고 美 노스 이스턴 일리노이대 교육철학 교수가 되었고, 지금은 동양인 최초로 미국 부시 행정부의 장애인정책 차관보입니다. 한국사람으로, 동양사람으로 미국에서 최고로 높은 자리에 오르신 분입니다.
특히 두 아들을 잘 키워 현재 장남은 아버지의 치료를 해주겠다고 하버드 의대를 졸업해 안과 전문의가 되었고, 차남은 남부의 명문 듀크 법대를 졸업해 변호사 겸 정치가로 미국의 주류사회 속에서 한국인의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아들이 이런 마인드를 갖게 되었던 것이 첫째는 아버지의 교육방법이 그렇게 했고, 두 번째로는 고등학교 교육이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아들이 다닌 고등학교는 필립스 아카데미인데 이 학교의 출신들이 현재 부시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 사회의 저명한 인사들을 가장 많이 배출했다고 합니다. 이 필립스 아카데미의 교훈은 'Non Sibi'입니다. '이기심을 버려라(Not for Self)'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이 학교는 특권의식을 떨쳐버리도록 사회봉사 활동을 강조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남을 위해서 세상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사람이 승리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강영우 박사도 3C를 강조합니다. 능력, 인격 그리고 헌신입니다.
젊은이들은 능력(competence)을 기본으로 하되 인격(character)과 헌신(commitment)을 가지고 - ‘3C’로 - 세계화 시대에 도전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곧 없어질 재물,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는 것이 사랑의 법칙 첫 번째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의 가진 것을 가지고 내 가족을, 내 아내를, 남편을, 내 부모를, 내 자식을, 내 이웃사람을 친구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행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2.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자는 큰 것에도 충성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 한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리라”
작은 것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큰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은 자기가 책임을 져야합니다. 남에게 신세를 지고 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자기 앞가림은 자기가 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어느 마을에 먹고 잠자기만 할 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으른 아들을 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늙고 병이 들어 자리 잡고 눕게 되자 그의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곧 죽을 것만 같은데 아들이라고 하나밖에 없는 놈이 저 모양으로 놀고만 있으니…"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이 죽으면 정신을 차릴런지.... 그나저나, 여보 재산을 그놈에게 물려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내의 말을 들은 남편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아니오. 저놈이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어오기 전에는 절대로 재산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오."
남편의 생각이 확고부동하자 하루가 지나고 그 아내는 걱정한 끝에 남편 몰래 아들에게 돈을 주고 아버지에게는 일을 해서 번 돈이라고 말씀드리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뵙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일해서 번 돈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돈을 화로 속에 던져버렸습니다. 아들은 불에 타는 돈을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다음날도 아들은 어머니가 주신 돈을 또다시 들고 와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 돈은 제가 일해서 번 돈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또 아무 말 없이 돈을 화로 속에 던져버렸습니다. 그제서야 어머니는 남편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밖에 나가서 네가 직접 네 힘으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오너라."
아들은 그길로 집을 떠나 험한 일을 하여 돈을 벌어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은 그가 번 돈을 아버지 앞에 내놓았습니다. 어머니는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으나 아버지는 전과 마찬가지로 돈을 화로 속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깜짝놀라 화로 속의 돈을 꺼내며 아버지께 울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너무하십니다. 제가 이 돈을 버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그제서야 아버지도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진정으로 네가 돈을 벌어왔구나. 그리고 이제야 내 아들을 찾은 것 같구나."
이처럼 자기 힘으로 돈을 버는 것은 내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 우리가 기도할 때 마다 응답을 하시는 이유,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남에게 의존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일하시는 것에 대해 한 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일하시는 직업은 좋아서 하십니까? 아니면 먹고 살기 위해 하십니까?
지난 주간, 한 분을 만났습니다.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을 하시냐? 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을 하기를 “아니 20년이나 다닌 직장을 왜 그만 두려고 하느냐?” 했더니
“적성에 맞지도 않고 힘이 들어서 그만 두려고 합니다.”
직장생활이 힘이 들지요! 그러나 제가 그랬어요.
“물론 직장이 적성에 맞아서 하는 것이 좋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의 사람들도 적성보다는 생존의 의미로 일을 했습니다.”
직장을 다니는 일이나 사업을 해도 성경의 직업관은 생존을 위한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그리고 주를 위해 헌신하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나도 살고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천막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도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제 아버지는 행상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런 아버지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도 처음부터 행상을 하신 것은 아니셨습니다. 사업 잘 하셔서 잘 살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도나고 사기당하고 일에 의욕이 떨어지니까 가난해 졌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행상을 하시겠다고 나가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가시기 전까지,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까지 돈벌러 다니셨습니다.
'내 가족은 내가 책임져야 겠다'
그때는 그게 부끄러웠는데 지금와서 생각을 해보니 얼마나 좋은 아버지세요. 생각만하면 눈물이 납니다.
여러분 자기 일에 충성하는 것이 내가 행복한 일이지만 동시에 가족을 행복하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 중에 하나는 노숙자입니다. 지금도 서울역 지하도는 물론 거리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게중에는 일할 수 있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힘이 있어도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소위 3D업종에는 일군을 구할 수가 없어 외국인노동자들로 넘쳐 납니다. 농촌에는 시집도 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적어도 내가 먹을 것은 내가 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형제지간에도 서로 빚을 지지 않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친척지간에 특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교인들 간에도 돈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렇다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남에게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 도움을 받으려면 교회에 오지도 말라고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자기에게 충성하는 자는 “나는 적어도 내가 먹을 것은 내가 번다'는 책임감을 의미합니다. 남편이 여건이 안되면 아내라도 벌어야 합니다. 이게 행복해 지는 법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 일에 충성하기를 바랍니다.
3. 다른 사람의 일도 내 일처럼 돌봐 주어야 합니다.
남의 것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게 되면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행복해지기 위해서 남의 것에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직장다시죠? 그 회사가 내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회사에 충성을 하셔야 합니다. 나에게 주인이 어떻게 대하시든지 그것은 주인이 대하는 것이지 그 회사가 나에게 하는 게 아니잖아요. 다만 나는 그 회사에 충성을 해야 합니다. 요셉처럼 있는 힘껏 다해야 합니다.
요셉은 주어진 삶의 자리가 사랑받던 아들의 자리에서 애굽의 노예로 팔리웠지만, 그리고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했지만 언제나 충성했습니다.
다니엘도 바벨론 포로가 되었지만 좋은 신하가 되어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행복하게 해주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들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예수님도 남의 것에 충성을 하시잖아요. 물론 이세상이 하나님의 것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것이기도 하잖아요. 예수님의 사명은 하나님의 일을 맡겨진 사람들에게 충성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남의 것에 충성을 해야 합니다.
며느리가 하는 말이 시부모가 누구냐?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나를 낳아 주었냐? 해 준 것이 무엇이 있냐? 하면서 무시한다면 그런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것이고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저 자신도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직장에서 성실히 하고,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성실하게 하고, 교회에서 섬기기를 다하시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동국대학교의 강정구 교수의 발언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검찰총장이 사표를 다 냈습니다. 이분은 "6․25는 통일전쟁이다"라고 발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주적은 북한이 아니고 미국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통일논의를 북한이 과연 할 수 있습니까? 통일을 위해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400만명을 죽였습니다. 400만명을 죽인 것은 미국이 아니라 김일성입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350만명을 굶어 죽게 만들고 그 나라를 거지로 만든 것은 북한입니다. 김일성입니다.
같은 대학의 장시기 교수는 김일성은 "위대한지도자"라고 합니다. 중국의 모택동, 쿠바의 카스트로, 이집트의 낫시르와 함께 위대한 지도자라고 합니다. 아니 300만명이나 굶어 죽게한 사람을, 나라를 거지꼴로 만든 사람이, 전쟁으로 400만명이나 죽게 한사람, 그런 사람이 그렇게 위대합니까?
이철기 교수라고 하는 같은 학교의 교수는 "군대에 가는 것은 총알받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가지고 진실을 규명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에는 사실이 있고 진실이 있는데 그것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학문입니다. 그리고 가치판단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넘어가면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정치라는 것은 주어진 현실을 바람직하게 변경시키는 것입니다. 교수의 말이 다 학문이 아닙니다. 정치적일 수 있습니다. 자기의 논리를 가지고 진실을 밝혀냈다고 합시다.
대표적인 예로 맥아더 동상을 봅시다. 이것은 정치입니다. 인터넷에 올려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은 정치입니다. 이것은 국가보안법에 희생자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 사람을 구속 수사하겠느냐, 불구속 수사 하겠느냐하는 문제도 별개의 문제입니다.
정치라는 것은 주어진 현실을 바람직하게 변경시키는 것입니다. 이 분은 바람직한 것으로 변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 문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동안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서 싸운 그분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사실을 진실로 규명하고 가치판단을 하는 것 까지만 학문이라고 할 수 있고 그 다음에 그것을 가지고 현실을 변경시키는 것을 정치인데 잘못 변경하게 되면 정치를 잘못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분은 학문을 하시는 분의 발언이 아니라 정치가들이 해야 할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잘 사는 방법이 어디에 있느냐는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이 있고, 진실의 규명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가치판단이 있고 그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이 나라에서 문란을 일으키는 것처럼 교회에서도 무슨 얘기를 들으면 그것의 진실규명,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지혜롭게 잘할까?'를 생각해야 하는데 무조건 말한다고 해서 다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들면 가정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그냥 들어도 못들은 채, 보아도 못 본채, 그냥 넘어가는 것이 많아요. 왜? 가정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람은 남의 것에 충성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의 것에는 충성을 하지만 남의 것에는 충성을 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것에 충성을 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남이 행복해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남의 행복해야 내가 행복한 것인데 남의 인생을 망치려고 하는 겁니까? 적어도 남편은 아내의 인생을 책임져 주고, 아내는 남편의 인생을 책임지고,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의 인생을 책임져 줘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의 것에 책임지는 것입니다.
나라가 잘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학문적으로 내 생각이 옳다고 해도 정치적으로 발언을 할 때는 이것을 달리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하나 망하면 되지 왜 남까지 같이 망하려고 합니까? 우리, 나, 우리 교회, 우리 가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잘해야 합니다. 행복의 세 번째 방법은 남의 것에도 충성을 하시기 바랍니다.
똑같은 6․25전쟁을 평가를 해도 장로회신학대학교의 민경배 총장님 같은 분은 6․25전쟁의 피해를 나열한 다음 마지막으로 "우리는6․25전쟁으로 피해를 많이 봤지만 동시에 축복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5천년의 역사속에서 양반과 쌍놈의 신분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6․25전쟁으로 인해 양반과 상민의 신분의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6․25전쟁이 우리에게 준 축복입니다. 6․25전쟁으로 온 나라가 폐허가 되었지만 이 폐허 속에서 우리나라는 힘을 합쳐서 다시 한번 잘 살아보자고 해서 고난이 이 나라를 잘 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평민의 자식까지, 아니 백정의 자식까지도 공부만 열심히 하면 출세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를 6․25전쟁을 통해서 고난도 주셨지만 축복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분의 가치판단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정치를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돈으로 친구를 사시고 둘째로 나의 것에 충성을 하십시오. 나의 일에 충성하는 것, 세 번째로 남의 것에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 줄 아세요? 어느 할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사자가 이긴답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벌써 몇 년 전 이야기입니다. 티.비 프로그램 중에 시골마을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퀴즈대회가 있었는데, 결승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퀴즈프로 진행자가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어느 쪽이 이깁니까?"라고 물었어요. 한 팀은 호랑이, 다른 팀은 사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호랑이가 이긴다고 생각합니까?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을 못합니다. 그래서 사자라고 대답한 팀에게 “왜 사자가 이긴다고 생각합니까?”라고 이유를 물었더니 할머니 한분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사자가 무섭지요. 호랑이든 사람이든 다 잡아 가는 건 저승사자니께... 사자가 더 무섭잖아유."
스튜디오 안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래요 제일 무서운 게 저승사자! 즉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죽음이 제일 무섭습니까?
여러분, 내가 죽는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마지막이라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죽는다고 생각하면 큰집이나 높은 지위도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죽는다고 생각하면 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삶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어가면서 누구나 자신의 삶을 아쉬워합니다. 좀 더 열심히 살걸, 좀더 진실하게 살걸, 좀더 사랑하며 살걸, 누구누구에게 더 잘해 줄걸, 결국은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는데 너무 욕심 부리지 말걸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마감합니다. '다시 한번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로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인생을 마감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아무리 힘센 사람도, 건강했던 몸도, 쌓아둔 재물도 죽음 앞에서는 막아낼 장사가 없습니다. 이 시간이라도 하나님이 나를 이 시간이라도 부르시면 다 소용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죽음 앞에서 다시 한번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기위해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기쁨!! 잘 기억하시고 이 사랑의 법칙이 여러분의 삶이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 창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