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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인의 두가지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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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인의 두가지 소원
김덕신목사

[성경본문] 눅16:24-28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16:24)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16:27,28)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 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16:24)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16:27,28)

당신의 소원은 당신 자신이다

여러분 마음속 깊은 곳에는 바라고 원하는 소원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소원을 안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아는 비결입니다. 왜냐하면 소원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공개하기 때문입니다. 소원 속에는 가치관과 인격과 그 사람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 소원을 말하는 것은 나라는 사람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킨 솔로몬의 소원(왕상3:5-15)

어느 날 솔로몬은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꼬?”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때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솔로몬이 구한 소원의 내용과 그 소원을 구하게 된 동기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뿐만 아니라 부귀 영화도 함께 주셨습니다. 솔로몬의 소원에는 이기적인 요소가 없었습니다. 솔로몬에게는 지혜를 구하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바디매오의 소원(막10:46-52)

소경으로 태어나 구걸로 연명하던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예수님으로부터 엄청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바디매오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예, 보기를 원합니다.” 보는 것은 바디매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으며 소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소원과 고백을 믿음으로 인정했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10:52)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꼬?”

만일 오늘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꼬?”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렵니까? 무엇을 구하시렵니까? 지금 저는 여러분의 소원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대답이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배경 및 내용설명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살아 생전에 날마다 잔치를 하며 호화롭게 살다가 죽게 되자 음부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반면에 생전에 거지였던 나사로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신경을 쓰고 보아야 할 부분은 예수님께서 본문의 말씀을 하게 된 배경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말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왜 그 말을 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배경을 알려면 본문을 향해 다음 질문을 던지면 됩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 그리고 왜 이 말씀을 하시게 되었는가?”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누가복음 16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하늘나라의 영적 교훈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의 내용은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말씀으로, 결론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 섬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눅16:13)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말씀했지만 옆에서 바리새인들이 그 말을 들었습니다.

14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기에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던 눈을 바리새인들에게 돌려, 바리새인을 대상으로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눅16:15) 본문말씀도 역시 일차적 대상이 돈을 좋아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속에 등장하는 부자는 누구를 상징합니까? 바로 돈을 좋아하여 말씀을 거부하는 바리새인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경고와 위로

본문 말씀의 일차적 대상은 돈을 좋아하고 말씀을 비웃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목적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지금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는 두 무리의 청중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비웃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은,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제자들에게는 위로의 말씀이었지만, 말씀을 거절하고 비웃는 바리새인들에게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자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영적 의미

그렇다면 본문 말씀은 오늘을 사는 나에게 어떤 영적 의미를 가지고 다가옵니까? 그것은 우리가 돈을 사랑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물질과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물질과 하나님의 말씀 역시 동시에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과 배경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좀더 본문 속으로 깊게 들어가,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풍성한 음성들을 들어보길 원합니다.


1.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찾아오는 죽음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눅16:22)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아주 이상한 신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하는 일이란 아침에 일어나서 알렉산더 대왕 앞에 나아가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대왕이여, 당신도 죽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습니다. 본문을 보면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죽음의 사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성서는 말하길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증거합니다.(히9:27) 어느 누가 감히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찾아오면 아무리 권력이 있고, 돈이 많아도 권력으로, 돈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나에게 찾아오는 죽음의 사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삼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여러분이 자랑하는 미모, 건강, 젊음, 물질, 명예 등 모든 것을 삼키는 불가사리입니다.

저는 지금도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한때는 씨름 선수로 황소도 타셨던 분입니다. 건장하시고 힘으로는 동네에서 당할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당당하셨던 분입니다. 그러한 아버님에게 죽음의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3일 동안 저는 아버님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실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위력을 본 것입니다. 그렇게 건장하시고 당당하시던 아버님이 죽음 앞에서는 상대적으로 너무나 초라해 보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사형수입니다

우리는 사형수라고 하면 어떤 선입견들이 있습니다. 먼저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생각, 그리고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생각, 또한 아주 측은하고 불쌍하다는 생각들이 앞섭니다. 교도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한 책들을 보면, 사형수들에게는 곧 죽을 사람이라고 많은 배려를 해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 보면 모든 인간은 사형수입니다. 인간 법정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나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사형수입니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사형 언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가 이 엄연한 사실과 현실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사단의 말에 속았습니다. 사단의 이 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작전은 지금도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상하리만치 사람들은 이 부분에 속고 있습니다. 결혼은 준비를 합니다.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찾아오는 죽음에 대해선 준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갑자기 찾아온 죽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산에서 내려오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죽었다면 나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과,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해 준비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는 죽음이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전혀 죽음에 대해 준비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사단의 작전이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게, 죽음에 대해 준비하지 못하게 갖은 방해를 다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한다면 절대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언제나 갑자기 방문하는 불청객입니다.

죽음은 공개된 비밀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누가 감히 이 말을 반박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리고 공개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은 비밀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공개된 비밀”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 “나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진실해 질 것입니다. 더 경건해질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

이상한 어느 모임

어느 모임이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서로 반가워 인사들을 하고 축제 분위기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임을 주선한 사람은 모인 하객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어느 한 방으로 지나가게 합니다. 그 방을 들어가기 전에는 그렇게도 기뻐하던 사람들이 그 방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만 하면 웃음을 잃어버리고 숙연한 모습을 하기에 모든 사람들은 궁금해 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 방에는 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관에는 시체가 들어 있는 대신 바닥에 거울을 붙여 놓았고, 그래서 관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거기서 자기 자신을 보았던 것입니다.

만일 한 달밖에 살 수 없다면?

“당신이 만일 한 달밖에 살 수 없다면?”이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이 질문을 각자에게 하고 자기의 답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 가지 답들이 나옵니다. 아주 심각합니다. 마지막 결론은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을 준비하자

그러면 무엇이 죽음을 준비하는 것입니까? 유언장을 만들고 재산을 정리하고 묘지를 준비하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것입니까? 물론 그러한 것들도 죽음에 대한 준비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준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다른 모든 준비가 다 되었다 할지라도 이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면 그 사람은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

누가복음 12장 16절 이하에 등장하는 부자를 아실 것입니다. 부족할 것이 없는 부자였지만 몇 시간 후에 자신에게 찾아올 죽음에 대해선 전혀 준비가 없었습니다. 추수할 곡식을 위해서는 창고를 지어 준비했지만, 더 중요한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는 준비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 역시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가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았지만 늦었습니다. 그는 지옥에 가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할지라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나사로는 비록 거지로 불쌍한 인생을 살았지만 죽음을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2. 천국과 지옥

모든 사람은 다음 질문에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즉 성경적인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누구든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다음 3가지 중 하나를 말할 것입니다.

(1) 분명히 존재한다. (2) 존재하지 않는다. (3) 잘 모르겠다.


당신의 답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지옥은 없다”고 자기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살아갑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정말 지옥은 없습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아무리 지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지라도 지옥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지옥은 없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분명히 존재하는 지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 자신이 그것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한번은 택시를 타고 가다가 예수님을 전했더니 그 택시 기사분이 하는 말이 자기는 지옥을 믿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지옥이나 가시오”했더니 화를 내기에 제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정말로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제가 지옥에 가라는 말에 화를 내서는 안된다”고.

지옥과 소원

부자는 살았을 때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던 자였습니다. 물 가지고 잔치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날마다 산해진미를 만들어 잔치하던 그 사람이 손가락 끝에 떨어지는 물을 사모합니다. 손가락에 물을 찍어 보았자 몇 방울이나 떨어지겠습니까? 그러나 목마름의 고통으로 인해 감히 한 그릇의 물을 소원하지 못하고 손가락에 적셔진 몇 방울의 물을 소원합니다.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소원이 바뀌는 곳입니다. 또한 지옥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입니다.

혜영이의 소원

뇌성마비 딸을 둔 어머니가 딸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고 『우리 다시 만날 때』라는 작은 책을 만들었습니다. 딸이 뇌성마비로 몸을 가누지 못하며 불과 23년이라고 하는 짧은 생을 살다가 간 것을 어머니가 수기처럼 기록한 책입니다. 방에만 누어있는 혜영이가 옆집 아줌마를 통해 예수님을 소개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갈 수 없고 집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혜영이는 어머니에게 자기의 소원을 말합니다. 그것은 교회에 한번 가는 것이었습니다. 딸의 소원을 들은 어머니는 혜영이를 들것에 실어 교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가장 뒷좌석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예배를 드리지만 혜영이의 눈에는 감격과 감사의 이슬이 맺혔습니다. 그렇게 소원하던 교회에 온 것입니다. 그러던 혜영이가 어머니를 향해 말합니다. “엄마, 한번만이라도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는 강단을 내 손으로 닦을 수 있다면...” 그러나 혜영이의 두번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혜영이는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교회 한번 가는 것이 소원이 될 수 없고,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목사님께서 설교하는 강단을 닦는 것이 소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뇌성마비 환자로서 자기의 고개도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던 혜영이에게는 너무나도 큰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절박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거룩한 소원, 불타는 소원이 없습니다.



지옥에 간 부자의 첫 번째 소원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16:24)

지옥은 목마름의 고통이 있는 곳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지옥은 목마름의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지옥에 간 부자에게 목마름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지옥의 고통, 목마름의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 목마르다”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여러분을 대신해 목마름의 고통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지옥에 간 부자의 두번째 소원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 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16:27,28)

이 부자는 지금 지옥에서 세상에 살고 있는 남은 다섯 식구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왕에 이렇게 되었지만, 그들만은 이곳에 제발 오지 말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 장소가 바로 지옥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제발 오지 말았으면 하는 장소가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먼저 간 어머니의 소원

아주 오래 전 일입니다. 한 여고생을 전도했습니다.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셨기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에 사무친 학생이었습니다. 전도를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그 여학생이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예수를 믿지 않고 돌아가셨는데 그러면 지옥엘 갔나요?”

순간적으로 당황하였지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믿지 않고 돌아가셨다면 그렇겠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학생은 “그러면 나는 어머니 있는 지옥에 가겠어요”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만일 너의 어머니가 지옥엘 갔다고 한다면 그 지옥에 있는 너의 어머니의 소원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지옥은 후회함이 있는 곳

지옥에 간 사람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실을 후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왜 내가 그때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 하며 모두들 후회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부자 역시 후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늦었지만 남은 식구라도 이곳에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후회하였지만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언

한 아버지가 아들 며느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하면서 무엇인가 어떤 말을 하려다 표현을 하지 못하고 그만 “껄”하고 운명을 했습니다. 아들로서 아버지가 과연 어떤 말을 하려고 하였는지 얼마나 궁금했겠습니까? 그러나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날이 되어 아내는 남편에게 장에 가는 길에 이것저것을 사오라고 부탁을 합니다. 알았다고 장에 간 그는 자신의 일을 보고 아내가 부탁을 한 것을 사 가지고 집으로 오던 중 아내가 자기에게 부탁한 아주 중요한 것을 사지 못한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다시 장에 가자니 이미 장은 파했고, 집으로 가자니 실망할 아내의 얼굴이 생각 속에서 떠나지를 아니합니다. 그때 아들이 중얼거립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종이에 적어올 껄” 그 아들은 비로소 아버지의 유언을 생각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술을 적게 먹을 껄, 이렇게 허무한 것이 인생이라면 좀 더 사랑하며 살껄” 지옥에 간 사람들은 한결같이 “껄 껄 껄”할 것입니다. 지옥이 좋아서 웃는 것이 아닙니다. 후회하는 말들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예수를 믿을 껄”


3.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흔히들 가장 큰 차이를 말할 때 “천국과 지옥의 차이”라고 합니다. 정말 천국과 지옥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천국과 지옥의 차이에 대한 놀라운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본문 24절과 25절, 그리고 28절 보면 천국과 지옥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천국과 지옥을 결정 짓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위로”와 “고민”이라는 단어입니다.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16:24)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 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16:25)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16:28)

천국은 위로가 있는 곳

천국은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 곳이며, 격려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갈 때, 주님은 우리를 영접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며, 그 동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느라고, 제자의 길을 가느라고 얼마나 수고를 하였느냐? 이제는 하늘의 안식에 동참하라고 우리를 위로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지불한 모든 고난, 환난, 눈물, 슬픔 등에 대하여 충분히 보상을 받으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에는 하늘나라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서 구원을 받음으로 인하여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계시며,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그러기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위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위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요, 또한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옥은 고민이 있는 곳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지옥은 위로가 없습니다. 고통과 후회만 있을 뿐입니다. 위로가 없는 가정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남편이 아내를 위로하지 않고, 아내의 위로를 받지 못하는 남편, 그 관계를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많은 소유가 있은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부모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지 못하고 자라난 아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가난해도 위로가 있으면 견딜 만합니다. 힘들어도 따뜻한 격려가 있다면 인내할 수 있습니다. 따뜻한 격려, 위로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 합니까? 어느 누구도 위로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동일하게 필요합니다.

천국과 지옥을 한번만 볼 수 있다면?

때로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천국과 지옥을 한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지옥을 한번만 구경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을 한번만이라도 구경할 수 있다면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믿음의 법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의 법칙이 아닙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의 법칙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보여 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치고 믿음이 좋은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충만한 사람에게는 천국과 지옥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능력이 있기에 그러합니다.

무엇이 이들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었는가?

부자는 왜 지옥엘 갔고 나사로는 왜 천국엘 갔습니까? 부자였기에 지옥엘 갔고 거지였기에 천국엘 갔나요? 아닙니다. 그것이 진정한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이 단순히 부자라는 사실만 가지고 그 사람을 정죄하고 있지 않습니다. 부를 사랑하고, 부를 의지하고, 부를 하나님으로 섬길 때 성경은 그러한 사람을 정죄하고 책망을 하지만, 부 자체는 정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부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우리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

우리는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를 그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눅16:30)

부자는 본문 30절에서 회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선행으로 지옥을 면제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남은 식구들에게 가서 이야기 좀 해 주십시오. 나는 착한 일을 하지 않아 지옥에 왔으니 너희들은 이곳에 오지 않으려면 선행을 많이 하여라”라고.

회개의 중요성

부자는 자신이 왜 지옥엘 왔는지 알았습니다. 부자는 너무나 중요한 영적 원리를 너무나 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좀더 일찍 알았어야 했는데, 이 땅에서 그 사실을 알았어야 했는데 그는 지옥에 가서야 회개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입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설교합니다. 설교의 제목은 “회개의 중요성”이며, 청중은 본문 말씀을 읽는 모든 사람입니다.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내가 천국에 도달하는 그날 나는 천국 문에서 하나의 현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현판에는 ‘오직 회개한 자’라고 쓰여 있을 것입니다”

유명과 무명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거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의 이름은 “나사로”입니다. 그러면 부자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본문은 부자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과연 우리 중에 “정주영, 이건희, 김우중”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부자는 이 땅에 살 때 날마다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를 베풀었던 사람입니다. 유명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이 땅에 살았을 때 누가 이 거지의 이름을 알아 주었을까요? 여러분 중에 거지 이름을 한 사람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거지의 이름이 “나사로”라고 분명하게 기록한 반면, 부자에 대해서는 그의 이름을 함구합니다. 그냥 “한 부자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요즘 사람들 이름 한번 날리려고 얼마나 노력합니까? 유명한 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듭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유명하다 할지라도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무명한 자입니다. 죽은 후에는 영원히 무명한 자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70명의 제자들을 세워 전도를 하라고 둘씩 짝을 지어 보냈을 때,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귀신들을 제어하고, 귀신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은 다음과 같이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10:20)

신비주의의 허

지옥에 간 부자는 우리에게 복음전도의 아주 귀한 영적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부자는 생각하기를 만일 죽었던 사람이 지옥을 경험하고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복음을 전하면 다 믿을 것이라 오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만일 나사로가 가서 자기의 남은 형제들에게 말한다면 다 믿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 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16:27,28)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 으면 회개하리이다”(눅16:30)

이 부분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모세와 선지자에게 들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모세와 선지자에게 들어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주의자들의 문제점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벧전1:23) 말씀이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눅16:29)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31)

동명이인

정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복음을 증거하면 사람들이 다 믿을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기적이 없기에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은 것을 성경이 증거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라는 본문에 등장하는 거지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장사되어 무덤에 있다가 “나사로야 나오너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 사람입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사실을 알고 본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따랐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면 아무리 놀라운 기적도 기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서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믿지 아니할 것입니다. 지옥을 경험한 사람이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못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기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드럽고 단순하며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결 론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 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7)

위 말씀에 등장하는 사람은 분명히 한 사람인데 그에 대한 평가는 둘입니다. 평가가 같지 아니합니다.

(1)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있습니다.
(2) 예수님이 알고 있는 내가 있습니다.

스스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 부자라고 평가하며 만족해 하는데 주님의 평가는 전혀 다릅니다. 부자가 아니라 가난하다고 합니다. 나는 본다고 말하는데 주님은 눈이 멀었다고 말합니다. 나는 입었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벗었다고 증거합니다. 나는 스스로를 보며 행복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주님은 그런 나를 보며 불쌍하고 가련하다고 합니다. 내가 보는 내가 맞을까요? 아니면 주님이 보는 내가 맞을까요? 누가 옳은 것입니까? 누구의 판단이 정학한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자신에게 스스로 속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알고 있는 나는 누구입니까? 어떠한 상태에 있으며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물질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히 여기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생애 속에 항상 이 말씀을 기억함으로써, 물질보다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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