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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본문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출1장 1~21절
경향교회/석기현 목사

미국에서는 자동차 스티커나 티셔츠에 ‘NO FEAR (두려움 없음)’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굶주림이나 병 같은 육체적 고통에서 해방 받으
려고 애를 써 왔는데, 이제 산업과 기술의 발달로 이 문제에 대하여 어느 정도 해결을 받게
되자 이제는 정신적 고통 쪽으로 눈을 돌리고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
은 ‘빵을 달라’고 왕 앞에서 데모를 했지만, 요즘은 이렇게 ‘NO FEAR’라든지 ‘공포
로부터의 자유’ 따위의 말을 하고들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송충이처럼 여기면서 그들의 인생에서 무조건 떼어내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는 ‘두려움’에 대하여, 성경은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사람이 반드시 ‘버려야 할 두려움’과 ‘꼭 가지고 살아야 할 두려움’이
각각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사람이 버려야 할 두려움은 ‘다른 사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전혀 다른 사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 보였던 당대 최고의 권력자도
바로 그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출애굽기 1장 8절로
14절의 말씀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 그가 그 신민
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
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
하여 /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 하여 /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고 기록
했습니다.
여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났다」는 말은 연대를 따져 볼 때, 그 전까지 애굽
을 지배하던 셈족 계열의 외국인 왕조였던 힉소스 왕조를 축출하고 새로 들어선 제18왕조를
뜻하는 말이라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즉 오래 만에 본토 출신의 순수한 혈통이 왕권을 재탈
환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 새 왕조의 바로는 소위 정통성의 문제를 따질 때 더욱 권위 있
는 통치자로서 자국민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 당시의 바로는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동시에 신 그 자체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 권위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하늘
을 찌를 듯한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얼핏 보기에는 세상에서 아무 두려워할 것이 없어 보이는 바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전혀 뜻밖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은 곧 자기의 통치 아래에 있는 백성,
그것도 자국민도 아닌 외국인 영주권자에 불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
다. 9절에 보니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적 팽창을 두고 염려를 했습니다. 10절에 보니, 특
히 애굽에 외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역을 일으켜 외적과 손을 잡고
오히려 애굽을 공격해 오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전략적인 판단에서 나온 우려였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이 그의 가족들과
함께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그들은 고센 땅에 살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고센 땅은 나일강 동
부 지역으로서, 애굽 사람들 편에서 본다면 동쪽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강대국들의 침입이
있을 때 바로 최전선에 해당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고센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
들은 실제적으로는 애굽의 본토를 외적의 주요 침입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완충재 내지는 방
패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
성이 만약 등을 돌려 오히려 애굽을 공격해 온다면 사실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
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바로 이 점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본문 10절 말씀 중 「두렵건대」라
고 번역된 말은 원문상으로는 ‘두려움(fear)’이란 단어는 아니고 ‘무엇무엇 하지 않도록
(lest)’ 혹은 ‘이리저리 되면 안 되니까’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표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역시 ‘두려움’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12절에
기록된 대로 그들이 「근심」했다는 말씀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는데, 이 단어야말로 오히려
‘두려워하다 (be afraid of)’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이 됩니다.
하여튼 이 같은 두려움의 결과,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소위 ‘지혜롭게’ 이스라엘 백성들
을 다루는 수단으로서 그들을 더욱 압제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강제 노역을 부
과하여 ‘국고성’ 즉 무기와 식량 등 군수물자를 저장해 두는 보급 기지들을 건축하도록
했으며, 그 중노동을 시키는 방법도 점점 더 엄하게, 괴롭게 만들어 갔습니다.
당대 세계를 호령하던 애굽의 최고 통치자 바로에게, 그리고 그의 중신들에게, 다른 모든 민
족과 백성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바로 그 당사자들에게, 천만 뜻밖에도 이와 같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인생이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달려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외적의 침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 여하에
따라 자기네 국운이 다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자연히 그 사람들이 두려워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지는 대표적인 두려움입니다. 하나님 모르
는 사람에게 남게 되는 두려움의 대상 제1호는 곧 다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
면 하나님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자기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결정적인 힘을 가진 존
재란 다른 사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행복은 오로지 우리 회사 사장이 내게 주는 봉급의 액수에 달려 있다.’라고 생
각하면 바로 그 때부터 그 사람은 그 사장의 눈치만 살피며 그 사장을 두려워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앞의 2년 군대 생활은 오로지 이 고참이 얼마나 날 잘 봐 주느냐
에 달려 있다.’라고 생각하는 신병은 자신의 모든 군생활에서 고참을 겁내며 하루하루 지
새울 수밖에 딴 도리가 없습니다.
이처럼 ‘내 인생이 저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라고 생각이 될 때, 그 때부터 사람은 바로
그 사람으로 인하여 염려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이겠습니까? 과연 이 같은 사람들이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고 결정짓는 절대자이며 전능자
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은 그 어느 날, 그 어떤 장소, 그 어떤 경우에
도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
워하는 이 공포증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제 아무리 높은 권력, 많은 재물을 가
지고 있어도, 아무리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도무지 겁낼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두려움의 중증을 평생 앓게 되는 것입
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코 다른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 않고 오로지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의 뜻과 능력에 전적으로 달려 있음을 분명히 깨달음으로써, 정말 사람 앞에서
는 언제든지 ‘두려움 없음 (NO FEAR)’이라고 담대하게 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람이 가져야 할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앞에 나타난 바로와는 지극히 대조적인 두려움을 가졌던 특별한 사람들을 증
거해 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장 15절로 21절의 말씀에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
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가 어찌 이같이 하여 남자를 살렸느냐 /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
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 하나님
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 / 산파는 하나
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고 기록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단지 중노동에 허덕이게 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까닭에 아예 근본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씨를 말리려고 계획을 꾸몄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산파 두 사람, 십브라와 부아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애가 태어날 때 살펴보아서 남자면 죽이고 여자면 살리라.’고 무슨 청
부 살인이나 조금도 다름없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악랄한 사람이 있
었을까?’라고 생각되십니까? 요즘 소위 태아 감별이란 것을 해서 남자 아이면 낳고 여자
아이라면 유산을 시키는 사람들도 그와 꼭 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남녀 선호의
순서만 바뀌었고 청부 살인 위해 고용한 사람이 산파에서 의사로 바뀌었을 뿐이지 나머지는
꼭 같은 것입니다. 하여튼 그 같은 명령을 받게 된 히브리 산파 당사자들로서는 보통 큰 고
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명령을 내린 사람이 애굽 왕 바로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 바로가
가진 권위라는 것은 오늘날의 대통령 정도로는 아예 비교의 상대도 되지 못할 정도로 절대
적이었습니다. 옛날에 우는 아이 달래기 위해서 ‘울면 호랑이가 와서 잡아 간다.’고 겁을
주었다지만, 바로란 명칭은 애굽 백성들이 아예 입에 올리기조차 싫어할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산파들은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이들을 살렸다고 했습
니다. 그 바로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이 열 개 있어도 모자랄 만큼 위
험하고도 두려운 것이었는데, 그 산파들은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바로의 명령쯤은 코웃음치고 넘길만한 초인간적인 용기가 있어서 그랬습니까? 결코 아니었
습니다. 아마 틀림없이 그들도 정말 간이 조마조마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겁나기는 하지만
멀쩡한 아이를 죽일 수는 없다는 남다른 정의감이 불타서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경 말씀은 단 한 가지 이유를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애굽 왕도 엄청
나게 두렵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는 훨씬 두려운 대상이었
기 때문이었습니다. 명령 불복종이 드러나 온갖 고초를 당하고 옥살이나 사형까지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두려워지는 마음은 그런 애굽 왕이 겁나는 정도에 비하면 도무지 상대
도 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이지 지혜롭게 선택한 올바른 두려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훨씬 더 강하
신 분을 제대로 두려워했던 것이고, 그 결과 애굽 왕이 주는 무슨 사례금이 아니라 하나님
께서 내리시는 상급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0절에 기록된 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라는 진짜 상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21절 말씀은 이상의 모든 내용을 말만 바꾸어서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
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기의 「경외」라는 말은 아까
17절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는 말과 히브리어 원문 상으로는 꼭 같은 단어인 것입니
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세야말로 하나님께 제일 ‘잘 보일 수 있는’ 자세였던 까닭에
그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며, 바로가 명령하는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던 까닭에 결
국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대표적으로 결핍되고 있는 자세가 바로 이
‘경외’ 즉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모시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때 ‘경
외’라는 단어가 점점 사라짐과 동시에 그 자리를 대신해서 독점해 가는 것이 바로 ‘사
랑’이란 단어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의 위치에서 점점 끌어내려져서 이제
사람과 일대일로 평등하게 사랑을 나누는 나란한 자리에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은 그처럼 무섭고 엄한 분이 아니며 우리 인생들이 부담감을 느끼며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
라, 그야말로 마음 좋은 할아버지처럼 쉽게 대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경외라는 개념은 사랑이라는 개념과 전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참으로 엄청난 불경이며 지독한 교만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의심
할 바 없는 사랑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모 편에서 자식을 향한 사랑과 자
식 편에서 부모를 향한 사랑의 질까지 서로 꼭 같아질 수는 없는 법입니다. 무엇이 어찌 되
었든지 간에, 자식 편에서 부모를 대할 때 어른 앞에서 예의를 갖추어 드리고 공경하는 자
세가 결핍되어 있을 때에는, 그 어떤 다른 모습의 사랑이란 것도 불효와 별다른 차이가 없
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공경이란 말과 사랑이란 말은 전혀 다른 것 같지만 부모 앞에 선
자식의 경우에 있어서는 오히려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개념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사람 편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에는,
그 사랑에 경외라는 결정적인 요소가 들어 있지 않으면 다른 그 어떤 아름다운 수식을 동원
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오로지 불경이며 신성 모독 이외에 아무 것도 아
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면에 경외라는 단어가 하나님 앞에서 씌어질 때면, 그것은 어떤
공포의 대상을 두고 벌벌 떠는 두려움이 결코 아니라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진짜 사랑답
게 만드는 ‘사랑의 떨림’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지금 얼마나 경외하며 섬기고 계십니까? 주일을 지키지 못하여 하나님 앞
에서 떨리는 것이 직장에 결근하여 사장 앞에 떨리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어느 쪽이 더 큽니
까? 마땅히 바쳐야 할 십일조를 빼돌리면서 조금 마음에 찝찝한 기분을, 세금 보고를 조작
하면서 ‘국세청 직원에게 들키면 어쩌나?’하고 초조해 하는 마음과 비교해 볼 때는 어떻
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분명히 명하신 것을 저지를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시는 정
도를, 속도위반하다가 뒤에서 교통순경이 ‘왱’하고 사이렌 울리며 따라올 때 ‘아이쿠’
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게 되는 심정과 서로 비교해 본다면, 여러분의 경우에는 어느 쪽의
진동이 더 큽니까?
한 가지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에게서 만만하게 대함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이런 하나님 앞
에 잘못 보이면 그 인생이야말로 진짜 큰일 날 인생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
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이 ‘여호와 경외’의 신앙을 지킴으로써 그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
고 그 대신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누리게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수천 년 전에도 우리와 꼭 같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 애굽왕 바로가 있었고, 한 사람 히
브리 산파가 있었습니다. 우리 눈에 누가 더 잘나 보이는 인생이고 누가 더 못나 보입니까?
누가 보아도 바로는 부와 권력을 한 몸에 모은 최고로 성공한 인생이며 누구에게나 부러움
을 살 최고로 행복한 인생으로 판단되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누구의 눈에도 히브
리 산파란 무능력한 이방 민족이며 애기 탯줄이나 끊어 주는 밑바닥 인생이며 아무 흠모할
만할 거리가 없는 하찮은 인생임에 재고해 볼 여지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결정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결코 이 양자의 인생들을 진짜로 가름하
는 요소는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인생은 ‘과연 누구를 두려워하는가’라는 이 한
가지 문제에서 완전히 진짜 승부가 나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 인생을 좌우할 것이
라 걱정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던 애굽왕 바로는 많은 사람을 죽이는 죄악으로 그 인생을 채
우게 되었고 그 결과는 영벌이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애굽 왕은 무어라 명령하더라도 오
로지 하나님만을 두려워 할 줄 알았던 산파는 사람을 살리는 선을 행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물론 출애굽의 구원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 둘 사이에서 인생 최
후의 승자가 누구인지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8·15 해방’을 맞
이하면서, 바로 우리의 신앙 선조 가운데 이와 같은 최후의 승자가 되었던 분들을 기억합니
다. 일본제국주의가 신사참배를 가지고 우리나라의 기독교를 위협해 왔을 때, 이 나라의 목
사들은 그들이 정말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밝혀야만 할 갈림길에 처하게 되
었습니다. 일본 천황을 두려워했던 목사들은 그 천황이 명령하는 우상숭배의 죄악을 스스로
저질렀으며 자기 교인들 역시 그 죄악에 함께 빠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두
려워했던 자들은, 아니 천황도 두렵기는 했겠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을 훨씬 더 두려워할 줄
알았던 목사들만이 ‘바로의 명령을 어기고’ 교회의 정절을 지켰고 성도의 신앙을 사수했
던 것입니다. 우리 조국이 끝내 일제의 압제를 벗어나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던 진짜 이
유는, 바로 이 소수의 ‘하나님 경외하는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
기 때문인 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두려워하며 살고 계십니까? 몸을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할 사람들
을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불에 던지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고 계십니까? 우리의 인생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한시
라도 잊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섬기는 가운데 그 은혜를 누면서 사는 하나
님의 참된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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