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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말고 찬양하라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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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말고 찬양하라 (눅 7:11~17)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니라" (누가복음7:13-14)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생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뿐 아니라, 그 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얻고 그 분께서 만들어 주시는 변화의 삶을 창조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을 헛되게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삶이 아프거나 슬프고 파괴되거나 수치스러운 것이 되도록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을 아름답고 귀하고 가치 있고 복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과제는, 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을 어떻게 찾고 소유하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사렛 남동쪽에 있는 나인이란 성에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불행하게도 남편은 한 아들을 남겨놓고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남편을 잃은 아픔 중에도 어린 아들에게 꿈을 두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과부가 된 여인은 어떤 어려움이나 힘든 생활 중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녀에게 힘들고 고달픈 고생이 오히려 행복이었습니다. 그녀의 모든 고생은 희망이자 꿈인 아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혼자 사는 과부로서 뭇 남성의 유혹의 손길에도 절대로 굴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깨끗하고 정직하며 희망차게 살았기에 이웃의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 여인이 이렇게 살아온 것은 바로 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은 그녀의 인생에 소망이자 가치이며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소망대로 잘 자라서 의젓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청년은 어머니의 자랑이자 보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죽고 만 것입니다.

청년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존경해왔던 불쌍한 과부를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과부의 불행이 그들의 큰 민망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장례의 행렬은 나인성 밖을 나오는 길을 메웠습니다. 당시의 장례관습대로 여인은 관 앞에서 슬피 울며 걸어갔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걸어가는 이 여인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큰 슬픔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례의 행렬에 예수님이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슬픔의 행렬을 기쁨과 찬양의 행렬로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어떻게 하십니까?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큰 슬픔을 가지고 눈물 흘리는 여인에게 불쌍히 여기시면서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울지 말라는 것은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슬픔은 인간의 고통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픔은 육체의 아픔만이 아니라 마음의 아픔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슬픔은 사랑하는 외아들의 죽음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아픔은 죽음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생명의 문제에 있어서 큰 기쁨도 생기고 가장 큰 슬픔도 생기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처럼 기쁜 일이 없는가 하면, 한 생명이 죽어 가는 일처럼 답답하고 아프고 슬픈 일이 없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여인의 꿈이자 소망인 아들의 죽음입니다. 아들의 죽음은 바로 그 여인의 유일한 꿈과 소망이 없어진 것입니다. 여인의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 죽음의 아픔이 만들어낸 슬픔 속에서 여인은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슬픔과 아픔으로 울고 있는 여인에게 불쌍히 여기시면서 슬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슬픔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슬픔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십니다. 그리고 그 슬픔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함이십니다. 예수님은 울지 말라고 하심으로 슬픔의 장례 속에 찾아오신 구원의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 자신의 슬픔은 무엇입니까? 그 슬픔을 만들어내는 아픔은 무엇입니까? 나의 꿈, 나의 소망, 나의 목적과 가치가 무너져 버렸습니까? 내가 기대하고 열심히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려 허망한 것이 되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슬픔을 안타까워 여기시며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픔과 눈물의 자리에서 울지 말라고 다가오시는 예수님께로 고개를 돌려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눈물을 멈추게 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울지 말라는 것은 죽음의 세계만 바라보지 말고 생명의 세계를 보라는 것입니다. 곧,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슬픔과 다른 기쁨의 세계를 보게 하시는 그 예수님을 만나고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장례행렬을 멈추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장례행렬에 가까이 다가오셔서 관에 손을 대시고 그 죽음과 슬픔의 행렬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장례행렬을 멈추게 할 때에 '왜 멈추게 하느냐?"' '왜 장례를 방해하느냐?'고 역정을 냈다면 슬픔과 죽음의 행렬로 끝을 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행렬이 멈추어 짐으로 그 행렬은 기쁨과 생명의 행렬이 되었습니다. 저는 어려운 과정가운데 있거나 질병가운데 있는 분들을 심방 할 때마다 당혹해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을 의지합시다.' '용기를 가지십시다'. '힘을 냅시다.' 고 권면하고 위로해도 '그렇게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계속해서 불신과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기보다는 자신의 아픔이나 괴로움만 바라보며 절망하는 것입니다. 불신과 절망의 행진을 멈추어야 하는데도 계속해서 그 행진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위로하며 용기를 갖자고 해도 계속 슬픔과 괴로움의 행진을 계속하겠다는 듯이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길에서 만나 '평안하시지요?'라고 문안하면 '목사님, 뭐 죽지 못해 사는 것이지요'. '늘 고렇고 그래요.' '매일 똑같아요.' 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 분은 죽지 못해 살고, 늘 그렇고 그러며, 매일 똑 같은 불행한 생활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례행렬을 멈추라고 강요하십니다. 그러므로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 당시 구약성서의 규정에 보면, 시체를 만진 사람은 칠일동안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되었습니다.(민19:11,16) 칠일이 지난 후 이 부정을 씻는 데에는 복잡한 결례절차가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시는 이런 부정을 감수하시면서 까지 장례행렬을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과 슬픔과 절망의 행진을 멈추어야 합니다. 불신과 의심의 행동의 멈추십시오. 부정과 원망적인 말의 행진을 멈추십시오. 비난과 비판의 소리를 멈추십시오. 주님은 멈추라고 하십니다. 멈추라고 하시는 주님의 뜻대로 멈추어야 나인성으로 되돌아가는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시체로 운구되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향하여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청년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살아난 아들을 어머니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꿈과 소망과 삶의 가치와 보람과 목적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내가 네게 말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모든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능력을 빌려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일어나라'는 말 '에게르테티( )' 는 어법이 수동형으로 '일으킴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능력이 일으키시는 그 역사를 받아드리라는 것입니다. 일으키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그분의 능력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능력이십니다.

성경은 믿음은 하늘로서 오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지식이나 의지나 신념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경험도 아닙니다. 단지 믿어지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큰 선물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마음이기보다 받아드리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자기 지식에 기초한 확신이 아니라 영접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요한 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에 영접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가질 때에 예수 안에서 새롭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어나라고 하실 때 그 말씀을 영접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의 능력을 받아드리면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죽어 돌무덤에 넣은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요11:43)고 하심으로 살려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에게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5-8)고 하심으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시체는 깨끗한 천으로 싸서 좋은 나무 관에 넣습니다. 관을 운반하는 상여는 꽃으로 장식하기도 하고,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집니다. 그러나 관 안에는 냄새나는 시체가 있습니다. 상여의 행진에는 죽어 썩는 시체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 시대의 인생의 행렬은 장례의 행렬임을 봅니다. 겉은 깨끗하고 화려할지 몰라도 속은 썩어있기에 냄새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면에 죽음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화려하게 살아가는 것 같아도 그 속이 죽어 있으면 공허함과 절망의 냄새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에서 살리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살아나는 것입니다. 죽음의 역사가 생명의 역사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일으킴을 받아 일어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말씀으로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일으켜 주심을 받아드림으로 살아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외아들이 살아남으로 나인성 과부의 절망과 죽음의 인생이 생명과 소망으로 살아나듯, 우리도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사람으로 새롭게 살아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의 가치와 목적과 의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절망 속에 나인성을 나와 묘지로 향하는 장례행렬의 발걸음을 돌이키게 하십니다. 새로운 희망으로 나인성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딛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눈물과 아픔의 길이며 죽음의 길을 웃음과 평안의 길로 그리고 생명의 길이 되게 하십니다.

울음을 멈추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울지 말라고 하시면서 우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죽음의 행렬을 따라가는 우리를 멈추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울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절망 속에 우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소망과 웃음의 세계가 있음을 알고 울음의 세계 속에 살기를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되심으로 새롭게 살아나시기를 바랍니다. 우는 자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 성 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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