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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푯대(목표) / 빌 3: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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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푯대(목표) / 빌 3:12- 14
: 한태완 목사

본문: 빌3:12- 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어떤 소년이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어 농촌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땀을 흘리며 밭을 가시는 것을 보고 그것을 도와드릴 생각이 나서 소년은 소를 몰고 밭을 갈았습니다. 서투른 쟁기질로 한참 갈다 보니 아버지가 간 밭의 고랑은 똑바르나 자기가 간 고랑은 구부러졌습니다. 아버지는 이것을 보고 "처음 보습질을 할 때는 앞에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야 똑바로 갈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소년은 그 말씀을 마땅히 여겨서 둑에 풀을 뜯고 있는 황소에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역시 고랑은 똑바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황소가 자꾸 움직이니까 너의 고랑도 구부러지는 것이니 움직이지 않은 것에 목표를 두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앞에 우뚝 솟은 포플라 나무에 목표를 두고 밭을 갈았더니 비로소 똑바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고 무엇인가를 위해서 죽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는 대상이나 목표를 갖지 못하면 허무주의자가 되고 생의 행복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나의 생명과 정열을 다 바칠 수 있는 목표나 신념을 가질 때 우리는 생의 충실감과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 심령 속에 부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목표나 방향이 없이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이 귀중한 생명이 삶의 목표로서의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만날 때 그것은 더욱 빛나고 힘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와 푯대는 무엇입니까?

스프링 벅이라는 산양은 보통 30마리 정도로 작은 무리를 지어 살지만 어떤 날 갑자기 한 곳에 속속 모여 수천 마리나 되는 큰 집단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도자격의 큰 양이 앞장을 서서 천천히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다른 양들은 몸을 맞대고 그 뒤를 따르며 도중에 있는 풀은 모조리 먹어 치웁니다. 이기심이 많은 산양은 빨리 앞으로 파고 들어가 풀을 더 먹으려고는 하지만, 맹수의 습격이 두려워 결코 대열을 떠나 옆에 있는 풀을 먹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제각기 자기를 보호하고, 게다가 풀을 듬뿍 먹으려고 밀어닥치니 얼마 후에는 친구들을 마구 떠다밀면서 점점 빠르게 전진하게 됩니다. 뒤따르는 양들이 점점 빨라지기 때문에 인도자는 자연히 뛰게 되고, 인도자가 뛰니까 뒤에서도 늦을 쎄라 더욱 뜁니다. 결국 모두가 전 속력으로 뛰게 됩니다. 인도자격인 산양들은 아마 친구들이 늘어났으므로 풀이 많은 새로운 거주지로 데려갈 예정이었을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 목적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다만 뛰는 것 외에는 생각지 않고 그저 앞으로만 돌진합니다. 모래 먼지를 날리며 질주하는 양떼들은 어느새 사막을 건너 해안에 이릅니다. 그러나 앞선 양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뒤에서 밀어닥치는 무서운 힘에 밀려, 냇물이 바다로 흘러내리듯 한 몫에 바다로 밀려들어갑니다. 얼마 후 바닷가엔 가련한 양들의 시체로 메어집니다. 이 양떼의 죽음의 행진은 우리 인생과 너무도 잘 닮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낙오자가 되거나 위험한 바깥쪽으로 밀려나서는 안 된다고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는데는 필사적이지만 질주하고 있는 목적과 목표는 분명치 않고 결국은 죽음의 길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심리학자 말쯔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인간은 목표를 추구하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인간이 삶의 목표를 상실하면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와해되어 죽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종종 젊은 사람들이 사업에 크게 성공해서 더 이상 일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일찍 은퇴를 하였다가 불치의 병에 걸려 죽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매일 매일의 삶에 분명한 목표를 잃어버리고 어제의 사람으로 전락해 갔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면 모든 육체의 기관이 더 이상 오늘과 내일에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하므로 다 같이 죽어 버리자하여 스스로 퇴화하기 때문에 결국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삶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모두 어제의 사람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어제의 사람이란 육체적인 나이가 많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사람이든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현재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시세에 따라 이리저리 요동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그가 바로 어제의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이미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죽어가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내일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함께 창조적으로 생산적인 삶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삶의 분명한 목표를 의식하고 그것을 힘차게 추구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혹은 국가적으로 실패하는 까닭은 인생을 아무런 계획성도 없이 살아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의와 목표를 분명히 설정하고 그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는 사람은 늙지 않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내일의 사람이란 이 땅에서의 삶에 분명한 목표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셔서 지혜와 창조의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목표가 정해졌어도 그 삶의 목표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면 모두가 우매하고 허탄한 것에 불과합니다.

한 영국 귀족이 부모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 귀족은 그 돈을 가지고 뭐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많은 돈을 돌연변이 쥐를 만드는 일에 모두 투자했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후 마침내 돌연변이 쥐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무익한 일이었습니다. 귀족은 수많은 돈과 시간과 노력과 재능을 돌연변이 쥐를 위해 바쳤고 뭔가 특별한 일을 했다는 만족감에 빠졌지만 그 돌연변이 쥐는 인류에게 아무런 유익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들도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일하다 보면 이 귀족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을 내고 계십니까? 당신이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은 진정 가치 있는 일입니까?

과거 러시아의 수도인 페체르부르크에 아까끼에비치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노인에게 “당신의 평생 소원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기라도 하면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매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인생의 목표는 아주 고급 외투를 갖는 것이오.” 그 노인은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평생 동안 일하고 저축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80 루블의 돈을 저축하여 꿈에 그리던 그 외투를 샀습니다. 그 날은 노인에게 성공한 날이자 목적을 이룬 날이었기에 큰 기대감과 흥분된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외투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만 강도를 만나서 비싼 고급 외투를 강탈당했습니다. 그 노인은 매우 절망했습니다. 단순히 고급 외투를 강탈당한 것이 아니라 그는 그의 성공을 강탈당하고 그의 행복을 강탈당했습니다. 그 날 이후 그 노인은 좌절의 늪에 빠졌고 너무 속상한 나머지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골리라는 사람이 쓴 단편소설 「외투」라는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노인의 목표는 고급 외투였지만 좋은 아파트, 고급 승용차, 사회의 높은 자리 등 소유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리히 프롬이라는 심리학자는 “소유에 행복이 없다. 행복은 존재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소유가 결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데도 우리는 계속 속고 사는 것입니다.

1923년 시카고의 에지와트 비치 호텔에 당시 미국 최대 부호였던 9명이 자리를 같이했을 때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들이 '20세기의 신화'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때는 황금 만능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돈만 번 것이 아니라 큰 회사의 사장들이었기 때문에 교육도 많이 받았고 명성도 있는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표준으로 볼 때 스타이고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25년 후인 1948년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하나는 미치고 셋은 파산해서 빛에 쫓겨 도피 생활을 하다 죽었으며 둘은 출옥해서 자살 직전에 있었고 셋은 자살했습니다. 한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인생의 궁극 목표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애의 기로 어디에선가 주님의 내게로 오라는 음성을 거부하고 다른 것을 목표로 상아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비참한 최후를 마쳤거나 허무주의로 살고 있습니다. 동양 최대의 성자이고 인도인의 태양이었던 간디도 죽기 전에 자신은 괴로운 사람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부지런히 뛰어 보았지만 그것은 궁극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사람은 창녀가 되었든지 세리가 되었든지 구두닦이가 되었든지 간에 자기의 길을 또박또박 걸어갈 줄 압니다. 푯대가 있고 초점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는 목표가 있는, 인생의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5)

아더 밀러의 희곡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윌리 로만은 삶의 목표가 장사를 크게 하는 것,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 자기 자식들이 자기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꿈은 하나 하나 깨어지게 됩니다. 먼저 직장을 잃게 되었고, 다음에는 매우 실망스럽게도 자기 자식들을 하나같이 믿지 못 하게 되었습니다. 윌리는 마침내 절망에 빠져 자살을 합니다. 이 희곡은 그의 무덤가에서 한 아들이 하는 말로 끝납니다. "아버지는 잘못된 꿈을 가졌습니다. ....
그분은 자신이 누군가를 끝까지 몰랐습니다."

잘못된 삶의 목표, 헛된 꿈들은 삶을 절망으로 이끕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 무관한 것일 때 다 헛되고 무익한 것입니다.(전2:11) 우리 크리스천은 세상사람처럼 헛되고 무익한 것을 좇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고, 세월을 아껴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요10:9-10, 딤후4:7-8)

개미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개미떼들은 무엇인가를 얻고자 그토록 부지런히 왔다갔다 하고 있었던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는 그 개미떼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숱한 세월이 흐른 지금, 잠시 사무실 창가에 서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개미떼처럼 저 많은 사람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저렇게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는 것일까? 위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일을 위해서 일까? 그렇지 않으면 썩어 없어질 헛된 것을 위해서 일까?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4-25)

많은 재산을 쌓아둔 채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그 재산의 위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휘두르다가 세상을 떠나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남기고 간 복잡한 문제들과 그로부터 파생된 갈등을 겪는 유가족을 대하면서 "과연 그 사람은 자신의 죽음 뒤에 이 같은 복잡한 문제들과 갈등이 뒤따를 줄 알면서 죽어간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전혀 알지 못한 채 죽어간 것일까"하는 의문이 생기곤 합니다. 그 사람이 평생동안 달음질하여 얻은 것, 그것은 결국 "썩을 면류관"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사람은 불쌍하고 무책임한 사람이요, 몰랐다면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니, 어느 쪽이든 불쌍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창밖에 보이는 저 많은 사람들이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저렇게 분주하게 달음질하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것 즉,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 의와 생명과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달음질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생활을 보면 칠십 년을 아무 목표도 없이 삽니다. 그런 사람의 생활은 마치 산 위의 풀과 같이 바람이 부는 대로 요동합니다. 지조를 찾을 수 없고 의리와 절개도 없게 됩니다. 이런 생활이 실패로 돌아갈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또 목표를 정하기는 정하지만 잘못 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령 학생들은 지식을 탐구하며 열심히 공부하지만 지식이 방패는 될 수 있어도 일생의 목표는 될 수 없습니다. 일류대학입학, 결혼, 돈, 세상에서의 출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일시적이요 헛된 것이며,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가 썩을 면류관에 불과합니다.

어느 날 장사꾼들이 큰 바다를 항해하게 되었습니다. 바다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훌륭한 길잡이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사람의 길잡이를 구해 바다로 나갔습니다. 바다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 심한 파도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사람을 죽여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야 이곳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습니다." 이에 장사꾼들은 회의를 열었습니다.
"나에겐 처자식이 있네. 내가 죽으면 우리 노부모는 누가 모시겠는가 ?"
장사꾼들은 각각 살기 위해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들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닌가. 그러니 어떻게 우리중의 누구를 죽이겠는가. 차라리 저 길잡이를 죽여 제물로 쓰도록 함세"
그들은 곧 길잡이를 죽여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요행히도 파도는 멈추고 바다는 잔잔해 졌습니다. 그러나 길잡이를 죽인 그들은 얼마 안 가서 길을 잃고 헤메다가, 방황과 굶주림으로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길잡이 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출발도 중요하고 과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결과입니다. 아무리 출발을 잘 했어도 결과가 좋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지나버린 과거에 얽매이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결산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는 자입니다.

바울은 푯대를 분명하게 한 자신의 삶을 빌립보 성도들에게 네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바울의 삶은 쉬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현재 진행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은 미완성이며 신앙의 완성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는 전진을 해야 합니다. 계절이 바뀐다고 모든 것이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결산을 출발로 바라보는 지혜는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인생을 결산하는 때까지 흔들리지 않는 푯대를 향해 전진하는 믿음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과거의 유익되지 않는 일이나 상처받았던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 은혜입니다. 쓴 과거를 오래 기억하는 것은 인생뿐만 아니라 영적 생활에도 큰 장애물이 되어 결국 자신의 영혼과 정신 그리고 육체까지 병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의 좋은 기억은 잊지 않고 기억하여 용기를 얻고 감사하며 과거의 쓴 기억은 빨리 생각과 마음속에서 지워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라고 권면합니다.

셋째, 미래지향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미래지향적으로 사는 사람은 미래를 향한 꿈과 인생의 목표를 분명히 갖고 신앙의 푯대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시며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신앙은 앞을 바라보며 전진하는 것입니다. 앞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며 진취적인 사람이요,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넷째, 삶의 푯대가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달음질하는 선수가 방향 없이 뛰지 않는 것처럼 흔들리지 않는 목표를 가져야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사람을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보면 인생은 흔들리게 됩니다. 이제 변함 없는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달려감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상급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해바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향해 자란다고 해서 해바라기입니다. 옛날 인도의 왕이 중죄를 지은 사형수에게 "기름이 가득 담긴 그릇을 주면서 이 그릇의 기름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온 성을 한 바퀴 돌고 오면 죄를 사면하리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죄수는 온 정신을 그릇에 집중하며 복잡한 성 밖 목표 지점을 돌아왔습니다. 왕은 죄수가 정말 다녀왔는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어디에서 무엇을 보았고 어디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물어보았습니다. 죄수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왕은 그것도 모르면서 갔다 왔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냐고 다그쳐 물었습니다. 그때 죄수는 분명히 말하기를 "왕이여, 나의 생명이 이 그릇에 달려 있는데 어찌 한눈을 팔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직 그릇만 보고 다녀왔나이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때야 임금은 죄수의 성실함을 인정하여 죄를 사면했다고 합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 길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곳곳에서 다가오는 유혹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믿는 우리들은 오직 주만 바라보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합시다. 오직 성경이라는 그릇만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주바라기가 됩시다. 자신이 목표한 일,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의 푯대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초점을 맞추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유혹의 손짓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참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된 삶의 목표, 헛된 꿈들은 결국 삶을 절망으로 이끕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 무관한 것일 때 다 헛되고 무익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34절 등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이루는 것" 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저의 삶의 목표는 '많은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단12:3)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매일매일 기도하고, 노력하고 수고하고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이 목표를 하루 빨리 달성하고 싶어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제 오른 손에 치유의 능력을 주시옵소서. 지금 많은 환자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많은 의사들이 돈만 알아, 병원의 문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많은 환자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능력이 많으신 주님, 아무런 대가 없이 주님의 능력으로 많은 병든 자를 치유할 수 있게 이 오른 손에 치유의 능력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영육간에 죽어가는 많은 영혼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고 구원 할 수 있게 하옵소서"

여러 차례 기도했는데 며칠 전에 주님께서 제게 "네 은혜가 이에 족하다 " 하시고 아직까지 치유의 은사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변함 없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죽는 것'(막8:35)이 제 삶의 목표입니다. 링컨 대통령은 소년시절 고통받는 흑인들을 보고 일생의 목표로 "노예해방"을 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정치계에 투신하여 여러 번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달성하여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간디도 어린 시절 고통받는 인도인들을 보고 '나는 커서 인도인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분투 노력하여 지금 인도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삶의 목표를 정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 '남을 구제하는 일'을 목표로 삼겠다. 남을 가르치는 일, 즉 교육, 아니면 사랑, 또는 '전도의 왕'이 되겠다. 평생을 남을 위해 기도하는 일에 누구보다 힘쓰겠다. 또는 찬송하는 일 등을 정하고 오직 그 일을 위해 전심으로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달려갈 최종목표와 길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주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제가 군대에서 장교로 복무할 때 장군 되는 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 그것이 허탄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역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얻은 후 지금까지 세상에서 최고로 생각했던 가치와 지식을 해(害)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빌4:7-8) 우리도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것들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여겨야 삶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 사람처럼 헛되고 무익한 것을 좇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고, 세월을 아껴서 주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로마서 14장 8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 기도: 사랑의 주님, 나의 달려갈 목표와 길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달려갈 길이 향방 없는 자처럼 내 달음질과 수고가 헛되지 않게 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적극적인 마음으로 살도록 해주소서 목표를 향해 서두르지 말고 거기서 돌아서지도 말고 희미한 과거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슬퍼하지도 말고 숨겨진 미래를 두려워하거나 물러서지도 않고 내 몸과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기쁨에 찬 마음으로 주님을 푯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해주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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