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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설교] 삼손만 같아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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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설교] 삼손만 같아여라

[기독신문 2005-09-07 오후 1:28:23]

옥성석 목사 (충정교회)


삼손만 같아여라(2) (삿14:1-7)


어렸을 때부터 주일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삼손에 관한 설교를 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학생부시절, 어쩌다가 삼손에 관한 설교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들릴라’라는 여인의 꾐에 빠져, 머리가 밀리고 눈까지 뽑힌 채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초라한 삼손이야기가 전부였습니다. 언제나 부정적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삿13:5).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지극히 감정적이고 돌출적이며, 즉흥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여자문제로 시작하여, 여자문제로 막을 내립니다. 이러한 삼손을 실패자로, 손가락질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지극히 정상인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그에 관한 참고도서도 전무한 실정입니다. 그 만큼 그에게서 배울 것이 없다는 뜻일 겁니다.

그러나 삼손에 대한 이런 선입견을 잠시 유보하고, 성경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아니,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주목해 봅시다.

우리가 아는 대로 히11장은 믿음장입니다. 여기에 보면 아벨을 필두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위시한 위대한 신앙의 선진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치열한 삶을 영위했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반열에 삼손이 당당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기드온, 다윗, 사무엘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과 같은 동률에 그가 우뚝 서 있습니다(히11:32).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삼손을 예외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래서 손가락질까지 했던 그의 약점을 특기하면서 그렇기에 다른 믿음의 영웅들보다는 떨어진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삼손을 향하여 ‘회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히11:36) 그런 시련 속에서도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히11:38)으로 승리한 자라고 극찬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삼손을 우리처럼 보거나 평가하지 않으신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삼손에 대한 선입견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삼손을 다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왜 하필이면 이런 삼손을 믿음의 반열에 당당히 올려놓으셨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삿14장은 삼손의 결혼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결혼과 관련하여 삼손의 연약함, 좌충우돌, 여기에 부도덕한 행동들까지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습니다. 그는 이방나라, 그것도 원수인 블레셋의 한 여자를 보고서는 즉시 아내로 삼으려합니다(삿14;1). 이 과정에서 부모의 충고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삿14:3). 사실,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삿14:3)는 부모의 충고는 지극히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백성, 특히 나실인으로 취해서는 안 될 행동입니다.

그러나 이 결혼 사건을 다시 조명해 봅시다. 먼저 결혼하기 직전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삿13:25). 이어서 결혼사건이 진행 될 때입니다.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삿14:6). 그리고 그 이방여인과의 결혼이 끝났을 때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삿14:19). 기이하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그의 결혼과 관련하여 시작, 중간,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신이 그를 감동시키셨다’고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할례 받지 못한 이방여인과 결혼하려는 삼손의 이 이해할 수 없는, 부도덕한 이 행동 속에 누구의 의지가 깊이 개입하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 그분의 의지가 깊이 작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삼손이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이 삼손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삼손 배후에서 하나님이 그를 컨트롤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삼손의 이 행동이 옳았다는 말입니까? 부모를 거역하면서까지, 이방여인과 결혼하고, 또 사람을 죽이고, 아내를 버린 일련의 그의 행동들이 진정 옳다는 말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표면위에 드러난 사건들을 단지 내가 가진 ‘도덕적인 잣대’를 가지고 쉽게 예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예가 있습니다.

창12장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합니다. 그는 애굽의 어떤 사람이 아리따운 자기 아내 사라를 빼앗기 위해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아홉 번째 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 거짓말에 속은 애굽왕 바로가 사래를 아내로 맞아드립니다. 그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후한 보상금까지 챙깁니다(창12:16). 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행동입니까? 그런데 그 일로 바로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재앙을 받습니다(창12:17). 반면에 사건의 원인제공자요, 거짓말쟁이인 아브라함은 거부가 되어 애굽을 유유히 빠져나옵니다(창13:1). 우리가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속은 바로에게는 재앙을 내리시고, 거짓말한 아브라함은 한 마디도 책망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고개를 꺄우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이것은 ‘거짓말이 죄냐? 아니냐?’를 교훈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이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오기는 하였습니다(창12:5). 그러나 그는 아직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대제국 애굽왕으로부터 자신과 아내의 생명을 보호해줄 능력이 있는 분으로까지는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신과 아내의 생명을 보존하려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위대하신 분이심을 깨우쳐주시려는 것이 바로 ‘거짓말’ 사건인 것입니다.

삼손 당시, 사사 시대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제멋대로의 시대”(삿21:2)였습니다. ‘권위’를 인정치 아니하던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모두 다 자신들의 기분, 즉 소견에 좋을 대로 행했습니다. 이들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권위도 인정치 않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유일하게 삼손은 누구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즉 자신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뜻을 쫒아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문맥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삼손이 그 블레셋 여자를 뜨겁게 사랑한 것이 아닌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결혼을 빌미로 원수 블레셋을 징벌하시려는 하나님의 뜻, 그 권위 앞에 삼손은 겸허히 순복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삼손결혼’사건 속에 숨겨져 있는 진정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때문에 ‘삼손만 같아여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대야말로 ‘제멋대로의 시대’입니다. 그 옛날 사사시대와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존중받아야 할 권위들이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조차도 인정치 아니하려합니다. 이미 ‘상황윤리(situation ethics)’나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영향에 깊숙이 물들어 있는 현대인들은 그 어떤 권위 앞에도 무릎 꿇지 않습니다. 이러한 때에 내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쫓아,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감화하심에 순복하는 삼손은 진정 본받을 만한 가치 있는 믿음의 영웅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내 부모의 권위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 어떤 스승, 과학자, 권세자들의 권위보다 더 위에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권위 앞에 삼손처럼 겸허한 자세로 순종하는 자가 믿음의 사람입니다. 삼손이 믿음의 반열에 당당히 설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권위 앞에 무릎 꿇는 자를 귀하게 보십니다.


(설교노트)
오늘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권위’의 실종이다. 어느 누구의 ‘권위’도 인정하려하지 않는다. 각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잣대’들로 상대를 폄하하며, 짓밟으려고만 하고 있다. 더 나아가 너무 쉽게 우리 앞에 펼쳐지는 사건들을 예단해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좀 더 진중한 크리스천이 되면 어떨까.

기독신문 (ekd@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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