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 1:14)
본문
어느 교회의 직분자로 피택된 분이 지방회(노회)에 시행하는 시취를 보았습니다. 시험 문제 가운데“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대로 쓰시오.”라는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그 후보는 답을 쓰기를“예수님은 4대성인 가운데 한분입니다.”라고 썼습니다. 그는 이 시험에서 불합격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세계4대성인 가운데 한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 세계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이미 오래 동안 교회에 다니며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 더구나 교회의 기둥으로 세움을 받고자 선출된 후보자가 예수님을 4대성인 가운데 한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장로 자격의 심각한 결격 사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7:3에“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올바로 깨달아 아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고, 참된 행복이 있고, 후회 없는 삶의 성공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거지였으나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이었고, 한사람은 돈 많은 부자였으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품안에서 영생의 영광을 누리는데,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부자는 불구덩이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삶은 불행과, 실패와 영원한 멸망으로 끝난다는 것을 가리키는 교훈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 분문입니다. 요한복음 1:14은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고, 요한복음을 한 구절로 요약한 핵심적인 말씀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신양성경 전체의 중심이라고도 할 수도 있습니다. 간단해 보이는 이 한 구절의 말씀 속에는 이처럼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이“말씀”이란, 헬라어의‘로고스’를 번역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이 목회하면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곳은 에베소였습니다. 에베소라는 지역은 헬라 즉 그리스 문화권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그들의 언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이“로고스”입니다. 로고스란 헬라 철학에서“세상을 움직여 가는 이성적 원리”라 했습니다. 사도요한은 헬라인들이 말하는 그 로고스가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사실‘로고스’는 우리나라 말로는 그 의미를 그대로 옮길 수 없는 특수 용어입니다. 옛 성경에는 로고스를 길(道)자로 번역하여“태초에 도가 있었느니라.”고도 표현 했습니다. 단지 로고스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당시 헬라 철학은, 하나님은 높은 분이고 사람은 낮은 존재이며, 정신적인 것은 모두가 깨끗하고 의로운 것이지만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은 다 더럽고 악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정신적으로 깨끗한 이성이, 육체라는 악한 감옥에 갇혀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존재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더럽고 악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러한 이론에 반대하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이 곧 요한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신약성경 빌립보서 2:5~8의 말씀에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시기를“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하나님의 본체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신인(神人)즉 하나님과 인간의 양성을 겸하신 예수님은 하나님도 되시고 인간도 되십니다. 예수님은 영원자이시면서 시간 속에 계시고, 신이시면서 인간이 되신, 참으로 우리 인간의 지혜와 이론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을“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 성육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보좌에 계시면서 인간들에게 그 높은 곳으로 올라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높은 보좌를 내놓으시고 사람으로 우리에게 직접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에 간 어느 선교사가 그곳의 스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실수로 개미집을 밟았습니다. 이것은 본 스님이 많은 생명을 죽였다고 깜짝 놀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선교사는 민망하여 말하기를“내가 밟고 싶어서 밟은 것이 아니라 발가락에 눈이 없어서 실수한 것이니 정말 미안하오. 어떻게 하면 개미에게 사과할 수 있겠소?”라고 물었습니다. 윤회설을 믿고 있는 그들이기에“당신이 죽어서 개미가 되어야 겠소.”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는 스님의 대답을 듣는 순간 정색을 하고“그래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른들이 어린 아이와 이야기를 할 때는 어린 아이들의 언어를 사용하듯,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육신이 되어 인간을 직접 찾아 오셨습니다. 내가 처한 현실, 내가 처한 형편, 이 현실 속에서 나를 만나 주시기 위해 나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옛날 하와이 군도 가운데 한 섬인 모로카이 섬은 문둥병자들만 모여 살던 죽음의 섬이었습니다. 어느 날 벨기에로부터 다미안(Damien)이라는 신부가 찾아와서 전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온몸이 썩어가는 문둥병자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때 문둥병자들은 그를 비웃으면서“자신은 건강한 몸이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살지만, 만약 우리들처럼 죽게 되었으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라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전도의 문은 굳게 닫혀 버렸습니다. 고민에 쌓여있던 다미안 신부는 어느 날 성전에 나아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문둥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저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여 불쌍한 저들의 영혼은 살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그 후 다미안 신부는 자기 몸에 상처를 낸 후 나환자들의 손을 잡고 하는 가운데 그도 문둥병자가 되었습니다. 감각이 점차 무뎌지고, 눈썹이 빠지고, 손가락 마디가 떨어져 나간 문둥병자의 모습을 하고 복음을 외쳤습니다. 그의 전도를 받은 수많은 문둥병자들은 마치 전류가 통하는 것 같은 감동을 받고 일대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는 문둥이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다미안 신부의 사랑이며 희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바로 멸망 받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하기 위한 희생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사랑의 극치가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 많은 세상을 버리지 아니 하시고 인간 역사에 오셔서 역사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연대를 계산할 때,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삼아 기원전과 기원후로 쓰고 있습니다. 모든 국가가 이 연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공산국가까지 이 연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몇 년 전 주체연호를 사용하다가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역사의 중심, 역사의 기준이 되신 것입니다. 판단의 기준, 정의의 기준, 진리의 기준이 되시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과학, 철학, 법학, 행정학, 심리학, 교육학, 예술 등 모두가 근원을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나온 것들입니다. 건물 중에도 세계적인 건물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위해 지은 것이며, 음악, 미술 등 세계적인 걸작품의 내용은 모두가 예수님에 관한 것들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다는 그 사실이 역사의 의미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二.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씀이 육신이 된 까닭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입니다.“거하신다.”는 말은 헬라 원어의 의미로“천막을 친다.”는 말입니다. 천막이란 영구적인 집이 아니고 임시 거처하는 장소인 것처럼, 인간의 육신에 임시로 예수님께서 머물러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 즉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언어 속에, 우리의 생각 속에, 항상 함께 계셔서 내가 당하는 사건 속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혹 실패했거나 건강이 약해졌다고 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겪고 있는 그곳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000년 전 육신으로 오셨다가 가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하셨습니다.
“장막을 친다.”는 말씀의 또 다른 의미는, 사도 요한이 구약성경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장막에 거하셨습니다. 모세로 하여금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그 안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셨습니다. 그들의 행하는 모든 것을 보시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들을 친히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장막을 치셨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즉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셔서 친히 그 가운데 사신 것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고, 그들에게 친히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는 자의 눈물을 닦아 주셨고, 죄지은 자를 용서하셨고, 낙심한 자에게 소망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구약에 있었던 광야의 장막과 의미가 같습니다. 광야의 천막은 낮의 햇빛을 막아 그늘이 됩니다. 밤이면 내려가는 차가운 기온을 막아 줍니다. 즉 보호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보호자 목자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즉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찾아오셔서 그 가운데에서 생활하셨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고 용서하셨고, 상처받은 심령을 싸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위로 하시며 소망을 주셨습니다. 구약의 광야에서 장막 가운데 계시며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의미와 같습니다. 이 장막에 거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장막이란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 중심지였습니다.
장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길을 가다가 잠시 머물며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처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장막은 예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장막(성막)내부에는 지성소와 성소로 나누어지고,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었고, 성소에는 향로와 떡 상, 금 촛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장막을 중심하여 이스라엘 12지파는 세 지파씩 나뉘어 동서남북에 캠프를 쳤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이 장막에서는 레위 지파가 수종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는 이 하나님의 장막이 진행하면 함께 진행하였고, 어느 곳에 머물면 그들도 머물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 되어 광야를 지나 가나안을 향해 가듯, 사악한 세상에서 부름 받아 이제 광야 같은 험한 세파를 해치며 하늘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인 장막을 중심했듯, 오늘의 우리들도 육신의 장막 즉 내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인 교회가 내 마음의 중심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이 장막이 움직임에 따라 이동했듯,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생업이, 생활 전체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이렇게 살다간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역행했을 때에는 무서운 진노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불뱀이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을 삼켰고, 때로는 무서운 질병이 나타났고, 때로는 땅이 갈라져 불순종하는 무리를 삼키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장막 가운데, 내 마음, 내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셔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시기를“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시편 122:6~8)하셨습니다. 하나님 임재의 처소인 성전은 축복의 통로 역할을 하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량역할을 하는 분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예수님은 대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교회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골로새서 1:18)하셨습니다.
2. 장막(회막)에는 법궤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인 장막의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을 기록한 두 돌 판을 담아둔 법궤였습니다. 이는 곧 오늘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가운데 계시고, 말씀에 의하여 내 삶이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안내서입니다. 이 안내를 따라 하루하루 살아가면 그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그곳에 성공이 있습니다. 그곳에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계시자, 말씀의 완성자가 곧 예수님이십니다.
시편 119:105에“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행복으로 인도하는 빛입니다. 승리로 인도하는 빛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빛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64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영국을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만든 위대한 왕입니다. 전 왕인 윌리엄 4세가 죽던 날 밤 전격적으로 차기 왕에 선택된 그녀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주여, 제가 영국의 왕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통치하게 해주시옵소서!”그 기도대로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을 다스리면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후일 인도의 왕자 한 사람이 정치를 잘하는 비결에 대해서 물었을 때 여왕은 가까이 있는 성경을 펴들고는“바로 이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영국이 낳은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어느 날 거리를 지나가는데, 한 길거리의 소년이 새장을 흔들면서 그 속에 든 새를 못살게 굴고 있었습니다.“너 그 새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좀더 가지고 놀다가 싫증나면 죽여 버리죠 뭐.”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습니다.“차라리 나에게 팔지 않으련?”“100달러를 내면 팔지요.”그 당시에 100달러는 굉장한 거금이었습니다. 물론 소년은 농담을 한 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펼전 목사님은 그 돈을 주고 그것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설교시간에 그 새장을 들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새장을 자그마치 100불이나 주고 산 내력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라는 악마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인간들을 어찌할 셈이냐?”“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는 것을 가르쳐 잠시 가지고 놀다가 죽여 버리죠, 뭐”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사고 싶은데 얼마면 되겠느냐?”악마는 웃었습니다.“이것들을 사서 뭐 하시게요? 그들은 당신을 배반하고, 침 뱉고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그래도 사시겠다면 당신의 눈물과 피를 내놓으세요.”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눈물과 피를 내놓으셨습니다. 독생자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성육신이며, 십자가요, 부활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성육신입니다. 이렇게 오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계시는 처소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중심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는 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편 1:1~3)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중심하여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인 성경을 중심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여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삶의 승리가 있습니다. 삶의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익 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