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선한 목자 (요 10:1-16)
본문
성경에서는 양이라는 말이 500번 이상 나옵니다. 양은 성경에서 가장 친근한 언어입니다. 양은 벌써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아담의 두 아들인 가인은 농사를 지었는데 아벧은 양치는 목동 이었습니다. 양은 인류 시초부터 사람과 함께 살아온 동물입니다.
목축을 하는 사람들에게 양은 주된 재산입니다. 생계의 수단이었습니다. 통화가 없던 옛시절에 양은 거래의 수단이었습니다. 양은 그만큼 사람의 생활과 밀접했습니다.
양은 사람들에게 고기와 마시는 젖을 줍니다. 옷감을 짜는데 필요한 양털을 제공해 주고 또 거친 옷으로 만들 수 있는 양피를 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사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요소였습니다. 번제물, 속죄제물, 속건제물, 화목제물 등에 있어서는 빠지지 않는 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에는 지붕 덮개로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양과 염소, 나귀와 노새, 소, 약대 등 4종류의 짐승이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가축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양이 가장 먼저 잘 길들여진 것입니다.
팔에스타인 농가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양 한두마리는 길렀습니다. 족장 시대에는 가축으로 그 재산을 헤아렸습니다. 오늘날 성지인 팔레스타인에서 널리 사육되고 있는 양은 원래부터 길러지던 품종입니다. 즉 꼬리가 굵은 양입니다. 이 양의 꼬리는 보통 4,5Kg, 심지어는 6,8Kg까지 나갑니다. 맛이 뛰어난 일품요리의 재료가 됩니다. 이와 같은 특성 때문에 출애굽기 29장 22절에는 기름진 꼬리가 희생제물로 드려 졌습니다.
먼저 양의 중요한 특성이 몇가지 있습니다.
첫째. 양은 매우 애정이 깊은 동물입니다. 사무엘 하 12장 3절에 보면 양을 기르는 사람이 마치 자식 다루듯이 합니다. 순한 자식이 부모를 따르듯이 양는 사람을 잘 따릅니다. 사람의 손에서 풀을 받아 먹습니다.
둘째. 양은 비공격적입니다. 순하고 복종을 잘합니다. 사자나 이리, 뱀, 시랑이나 곰 같은 억센 짐승 앞에서는 오금을 못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7절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우리 주님을 가리켜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양으로 비유 했습니다.
셋째. 양은 끊임없는 관심과 관리가 필요한 동물입니다. 양은 자기 방어의 힘이 약한만큼 목자의 소리에 잘 따릅니다. 그러나 조금만 방심하면 웅덩이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넷째. 무엇보다도 양의 중요한 특징은 무리를 지어 살기 좋아 합니다. 또한 풍뎅이가 한번 나자빠지면 자기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듯이 양도 마찬가지 입니다. 돌봐 주는 목자가 없다면 결국 죽고 맙니다.
양은 이렇게 쓸모가 많으면서도 연약 합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가 필요 합니다. 인류가 살아 오면서 양만큼 사람의 재산이 되어 떼를 지어 살면서도 사람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양의 특질은 항상 목자와 연관 됩니다.
목자를 히브리어로 [로에]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는 헬라어로 [포이멘]이라고 했습니다. 포이멘을 우리 말로는 목사라고 번역 했지만 목사가 아니라 목자라고 해야 더 적절합니다. 목사는 성경에 없습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 있는 포이멘은 장로를 가리켜 말합니다. 장로는 감독자라고 합니다. 목자라고도 부릅니다. 장로라는 말은 경험이 많은 연장자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경험많고 덕망있는 연장자를 장로로 선출 합니다.
성경은 양과 목자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양과 목자의 관계에 대한 비유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오늘 드리는 본문 말씀에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모든 인류를 양으로 보십니다. 그리고 인류는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유대지방에서 밤이 오면 목자는 양들을 우리 안에 몰아 넣습니다. 우리 안에 있지 않으면 어두운 밤에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벽으로 두르기도 하고 혹은 산나무 울타리로 하는 수도 있습니다.
대개는 두서넛 목자들이 한 울타리를 공동으로 사용합니다. 양들이 우리 안으로 다 들어가면 번갈아서 울타리 문을 지킵니다. 한 사람이 그 울타리 문을 지키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쉬기도 합니다. 아침이 오면 목자들이 울타리 문으로 옵니다. 각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부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주인된 목자를 따라 나섭니다. 목자는 그 양들을 몰고 들로 나갑니다. 주님은 이런 모습을 비유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말씀 하십니다. 선한 목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첫째 선한 목자는 양들을 인도합니다.
1-2 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니라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여기 양과 선한 목자는 인도하고 인도를 받는 관계입니다.
양은 선한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삽니다.먼저 선한 목자는 양을 우리 안의 문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무엇보다도 양이 우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이 필요합니다. 팔레스틴에서 사육하는 양의 우리는 높은 담으로 된 벽이 있고 문은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 문에는 문지기가 있어서 그 문지기는 목자를 알고 그 문을 통과시켜줍니다.목자는 그 문을 알고 양들을 그 문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절도와 강도는 그 문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양들을 그 문안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여기 문은 무엇입니까? 바로 구원의 문입니다. 바로 천국문입니다. 양이 목자의 인도를 받아 우리 문안으로 들어가듯이 누구든지 목자이신 우리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천국문으로 구원의 문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절도와 강도"라는 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격렬한 논쟁을 벌이던, 바리새인 같은 당시의 종교인들입니다.
이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칫 우리는 바리새인들을나쁘게만 매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또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봉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없이 하나님을 믿으려고 한것입니다.그리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구원없는 문으로 인도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찾아오신 분!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를 해결하시고,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하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요, 그 백성이 되게 하고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그런데 하나님을 경배하고 충성을 다하고자 힘썼던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들이 그들을 위해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슬픈아이러니입니까? 오늘 날 교인들 가운데 이런 사람이 없겠습니까? 예수를 빼놓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선한목자이신 우리 주님의 인도를 받는 양이 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오직 구원은 우리 예수님으로만 되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님없는 천국은 없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없이 하나님을 믿는 분들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울이 바울 되기 전에 가졌던 결정적인 결함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이되기전에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것도 열심히 믿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믿는데, 하나님 말고 또 누구를 믿으라고 하는가? 하나님 외에 아무도 신앙의대상이 될 수 없다" 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그 땅에서 척결하기 위해 다멕섹까지 쫓아갔습니다. 그는 그 정도로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문입니다. 요한복음10장 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여기 우리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을때 구원을 얻습니다.
먼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 속에 들어가는 사람은 유대인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님은 이제 모든 사람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아무나 오게." 이 주님의 초청은 우주적입니다.
다음은 "나로 말미암아" 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
이 문은 구원의 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 없이는 그리고 그리스도에대한 분명한 응답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할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 앞에 세울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양의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모든양들에게 문이 되어주시고 그 문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오늘 양된 저와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구원의 문을 통과하는 일입니다. 오직 이 문을 통과해야 우리는 생명을 얻습니다. 이 문을 통과하여 새생명을 얻는 귀한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문은 우리를 풍성함으로 인도합니다. '우리'안에 들어가는 양들에게는 쉼이 있고, 保護함이 있고, 安息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번 들어간 사람에게는 놀라운 自由가주어집니다.
우리 안에 들어간 양에게 풍성함이 있듯이 우리 주님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풍성함을 얻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양을 목자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고 잔잔한 시냇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그 초장에 가서 목자와 같이 있으며 산책도 합니다. 구원은 "내가 건짐을 받았다. 이제 안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풍성한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는 목자되신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그 모든 풍성한 것을 즐기는 풍성한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 분의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까?
매일 매일 그분의 인도를 받는 분입니다. 그분의 인도를 순종하면서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함으로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주님의 인도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선한 목자는 양을 압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선한목자는 자기 양을 압니다. 자기 양의 소리만 들어도 압니다. 자기 양의 모습을 멀리서도 압니다. 자기 양의 체질이 어떤지 습관이 어떤 지 심지어는 생각까지도 압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안다는 것은 목자로서 양과의 관계에서 몇가지 점을가르쳐 준다고 합니다.
먼저 이 안다는 것은 체험적인 앎입니다.
목자가 양을 아는 것처럼 양도 체험적으로 목자를 압니다. 양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자기 목자가 누구인지를 압니다. 그 소리를 통해서 압니다. 그 모습을 통해서 압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압니다. 이것은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단지 지식의 앎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람들은 주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체험적으로 압니다.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진정한 주님의 양은 우리 주님이 우리의 영혼의 구원주이심을 압니다. 그분의 양은 우리 주님을 마음으로 알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압니다. 우리 주님이 나에게 쉼과 평안을 주시는 분으로 압니다. 그 양은 우리 주님이 삶의 모든 복을 가져다주시는 분으로 압니다.그 주님이 나의 친구가 되시고 나의 인도자가 되시고 나를 돌보시는 목자이심을 압니다. 진정한 양은 우리 주님이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심을 압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기도응답을 해주심을 압니다.
다음은 중보의 기능입니다.
목자는 그 양떼를 돌보는 일을 주인에게 부탁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양떼를 돌보는 일을 위임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택한 하나님의 양들을 위해서 끝까지 돌보는 일을 감당하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잘 아십니다.먼저 우리의 약함을 아십니다. 그 약함을 아시는 우리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다루어가십니까? 히브리서 4장:15에 보면 우리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동정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양같아서 여러 가지로 무지하고 부족하고 약점이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육체의 약점이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의지가 약하십니다. 감정이 약합니다. 그래서 실수가 많고 잘 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약점을 아시고 우리를 관계하시면서 그 약점을 고쳐주시고 하나님 앞으로 우리를 중보하여 주십니다.
심지어는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하여 주십니다. 히브리서6장 25절에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깨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잇으니 이는 그가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여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하십니다.
우리를 돕는 기도를 중보기도드립니다. 우리를 온전케하시는 중보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러므로 양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을 의지하는 일입니다. 내가 비록 부족하다 할지라도 낙망하지 말고 주님을 의지하는 일입니다. 내가 약점이 많고 종종 넘어질지라도 주님을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뚜기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넘어지면 또 일어서면 됩니다. 실패하면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백성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면 안됩니다.
종종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다가 믿음에서 떨어져서 실패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유명한 베드로 사도도 3번이나 주님을 맹세하면서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결코 베드로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를 위해서 중보하시고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내양을 먹이라’‘내양을 치라’ ‘내양을 먹이라’하셨습니다. 약점이 있고 부족한 점이 있는 베드로에게 주님이 이런 일을 맡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께서 중보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베드로가 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통해서 우리 주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된 저와 여러분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양이라면 어떤 약점과 문제가 있더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목자이신 주님이 우리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두 번째로 친교 즉 함께 하심을 말해주는 것입니다.목자는 양의 약함을 압니다. 그래서 자기 양을 절대로 떠나지 않습니다. 항상 함께 하여 보호하고 지켜줍니다. 우리 주님게서는 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떠남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28:20에 “볼찌어다 내가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양된 우리는 절대로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십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맹수가 공격하고 위험이 찾아올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할 것은 모든 위험과 고난과 어려움은 주님이 허용된 것입니다. 우리가 동물원에 가서 위험하고 무서운 맹수를 구경할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원의 사자와 호랑이는 반드시 우리라고 하는 범위 안에서 있고 우리는 그 보호망을 사이에 두고 만납니다. 그래서 무섭지만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위험하지만 위험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때 아무리 우리 안에 있다 할지라도 인간 편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주의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 같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그 공격은 모두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범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간의 책임을 요구하십니다. 그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어쩐 지경에 있어도 우리 주님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의 가장 약점은 쉽게 흩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조금만 기회가 잇으면 흩어지려고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스스로 아무 힘도 없으면서 스스로 살 아갈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생각합니다. 만약 양된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교만하게 살아가려고 할때 우리는 거기에서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양은 아무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혼자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 우리 스스로 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을 우리가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째,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5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주님은 양의 목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양들의 생명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모진 고통과 배신의 쓰라린 상처로 주님이 당하신 하중은 아무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깨서 진정한 선한 목자로서 이 세상에서 특별하신 이유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과 비교될 때 도적이며 강도들입니까? 저들은 생명을 준비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이신 이유는 이 세상에서 주는 이익보다 더 큰 이익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목자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목숨을 주어 그 이익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자신을 삯꾼과 비교하여 말씀하십니다.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와의 대표적인 차이가 무엇일까요?
진정한 목자되신 주님의 모습을 보면 진정한 목자의 상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목자의 특징은 바로 사랑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또 무엇입니까? 얼마나 자기를 내어주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양을 위하여 선한 목자는 희생합니다. 자기를 내어주면서 사랑합니다. 그러나 삯꾼은 자기를 위해서 더 이상 희생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 이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주님이 당하신 그 많은 상처들, 그 많은 아픔들 그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양된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려주셨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해서 주님이 죽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나를 주님이 기억하고 죽어주실만큼 귀한 존재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누가 나를 위해서 죽어줄 수 있습니까?
한번은 제자훈련을 하면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저를 위해서 죽어주실 분이 있습니까?’ 그랫더니 없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자기 남편을 위하거나 아내를 위해서 죽으실 분 했습니다. 그런데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죽으실 분이 있습니까?’ 그랫더니 죽으실 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 남편과 아내를 위해서는 아닌데 자식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는가? 그랫더니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어린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엄밀하게 왜 자식을 위해서 죽겟다고 했을까요? 바로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면 목숨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그렇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그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통해서 생명을 건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땅에서 우리 자신의 존재를 가치있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함부로 나의 생명을 버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고전6:19-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십니다.
살기 힘들다고 자살해서는 안됩니다. 요즘 걸핏하면 사람들이 자살합니다. 점점 심각해집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자살한다는 것은 심각한 범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좀 못생겼다고 자기를 학대해서도 안됩니다. 내가 생각하여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나를 못난이라고 멸시해서도 안됩니다. 우울증에 빠져서 신세를 한탄하거나 하여서는 안됩니다.
이제 남은 생애 생명을 얻은 주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의 심정을 갖고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지금도 길을 잃고 헤매는 이땅의 자기 백성들을 찾고 계십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양들만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버려진 양들을 부르십니다.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저들을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한 생명이라도 구원하시려고 합니다. 한마리의 양이라도 우리 안으로 불러서 보호 하시려고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주님의 영원하신 뜻입니다.
오늘 주님은 세상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원하여 관리하고 보호하시려고 우리를 세상에 두셨습니다. 주님이 택하신 귀한 종들을 불러서 거룩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목자장이신 주님은 지금도 주님 명령에 충실한 자기들의 목자들을 세우고 이 시대에 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2천년전에 이땅에 오셔서 주님이 하셨던 그 일을 오늘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일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죄에서 세상에서 한 생명을 건져내는 일은 가장 값진 일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이런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양된 인생이 선한 목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양된 인생이 선한 목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양된 인생이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선한 목자가 되셨습니까?
그분의 인도를 나는 지금 받으면서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시냇물가로 가면서 꼴을 얻고 있습니까? 참된 목표도 없이 방황하던 인생길에 찾아오셔서 예수님이 구원의 문이 되시고 선한목자가 되어주셨습니다. 나의 모든 삶을 그분에게 맡기고 그분의 인도를 받는 평생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박 춘 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