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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빌어주는 사랑 (벧전 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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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빌어주는 사랑 (벧전 3:8-12)


하나님의 목적대로 산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랑을 믿고 그 사랑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주간에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는 인생!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들은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해서 다섯 주에 걸쳐서 사랑의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말로 하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복을 빌어 주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복을 빌어주는 것! 이것은 말로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미국 과학전문매체 라이브사이언스 최근호는 바다, 육지, 하늘 등 지구상의 동물중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동물 ‘탑 10’을 선정 발표했는데, 제일 무서운 것은 연간 200만 명의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으로 모기라고 합니다. 이 모기는 말라리아 등의 질병을 일으켜 사람을 가장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2위가 매년 50,000명 이상의 사람을 죽게 하는 코브라라는 뱀이고, 3위는 60명의 사람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독을 지닌 호주산 박스 해파리가 선정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북극곰, 독 개구리, 백상어, 코끼리, 아프리카 물소라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가장 작은 것이 가장 무섭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삶에서도 가장 작은 것이 무섭습니다. 바로 말(언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있다고 했습니다. 말이 죽이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그 말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8,9절에 있는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면, 불쌍히 여겨지면, 복을 빌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 복을 빌어 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복을 빌어주는 일은 곧 내가 복을 받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복 받기를 원하면 복을 빌어 주는 사랑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혀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 혀가 욕도 할 수 있고 복도 빌어 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좋은 것도 되고 나쁜 것도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을 잘 사용해야합니다. 어떻게 하면 잘 사용하는 것입니까? 어떤 말을 하시겠어요? 욕하면 욕이 돌아옵니다. 복을 빌면 복이 돌아옵니다. 오늘 이곳에 모이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복을 빌어 주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복을 빌어 주는 사랑은 첫번째로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10,11절의 말씀을 한목소리로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을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고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 악한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선을 행하라”는 말씀은 '착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엄마아빠가 자녀들에게 "아이구 착하네~" 라는 말씀을 어떤 경우에 하십니까?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순종하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유를 달지 않습니다. 그것이 착한 것입니다. 음식점에 가서도 얌전히 앉아서 밥 잘 먹어도 "참! 착하네"하시잖아요.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잘 받아들이는 것을 착하다고 합니다.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 즉, 있는 그대로 기뻐하는 것이 착한 것입니다. 선을 행하라는 것은 ‘인정해 주는, 있는 그대로 보는’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돈을 드려서 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인정해 주면 힘이 납니다. 반면에 무시당하면 힘이 빠지고 의욕이 없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시당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 어디 있습니까? “이 바보야, 멍청아 그것도 못해!” 그러는데 좋아 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반대로 “넌 할 수 있어!” 그러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지!” 하면서 의욕이 생깁니다.

요셉은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을 때도, 반대로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의 노예로 팔리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 복을 받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을 인정해 주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호빙 이펙트'(The Hoving Effect)
교육심리학에 '호빙 이펙트'(The Hoving Effect)란 용어가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을 무시하지 않고 인정해 줄 때, 나타나는 교육적인 효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간 평강공주가 하는 말과 같습니다.
“당신은 바보가 아닙니다. 위대한 장군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로 인해서 바보로 불리던 온달이 용기를 얻어 위대한 장군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로만이라도 인정을 해주면 이것 또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한 홀어머니가 아들 6명을 모두 박사학위를 받게 교육을 시켜 장한 어머니상을 받게 되는데 이 어머니는 자녀들이 속을 썩일 때도 욕하지 않고 “너희들은 훌륭하다. 언젠가는 큰 인물이 될 것을 믿는다.”하고 인정을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인정과 칭찬의 미학"
미국의 세계적인 가수 마돈나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불우했습니다. 마돈나가 초등학교 시절에 무용반에 들어갔는데, 아이들은 마돈나가 키도 작고 말도 잘 할 줄도 모른다고 놀려대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보고 있던 선생님은 마돈나에게 "마돈나, 너는 참으로 예쁘구나! 노래도 잘하고, 무용도 잘하고 너는 이 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될거다!"라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마돈나는 친구들의 말에 낙심을 했지만 선생님의 이 말씀에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무용과 노래와 춤 등에 열심을 냈습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시며 "참 잘 하는 구나"라고 칭찬해 주셨고 마돈나는 선생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성장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선을 행하는 것은 돈을 들여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 한마로 천량 빚을 갚는 것처럼 인정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 후 세계적인 가수로 성공한 마돈나는 "지금 나의 성공은 그 선생님의 그 한마디로 인해 오늘의 내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선생님을 못 잊고, 가난한 선생님의 생활비와 병들었을 때에 병원비 일체를 책임져 주었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장례비 일체를 부담하며 가장 슬프게 끝까지 울었습니다. 선생님의 인정해 주신 그 말 한 마디가 놀림의 대상이었던 한 소녀의 일생을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그 선생님의 생활도 책임져 주는 제자가 생긴 것입니다. 이건 복입니다.

마찬가지로 '토마스 호빙'이란 사람도 퇴학을 받을 정도로 부족한 학생이었지만 교수님의 인정을 받고 힘을 얻어 예술품을 평가하는 인정받는 감정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호빙의 이펙트라는 말은 인정해 줌으로 생기는 교육적인 효과를 의미합니다. 이렇듯 호빙 이펙트의 교육적인 효과는 대단합니다.

예수님은 선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베드로가 있습니다. 이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까지 충성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 베드로를 처음 만나는 순간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하셨습니다.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는 뜻으로 '반석'이란 뜻입니다. '시몬'은 '갈대'라는 뜻으로 조석으로 변하는 변덕스러운 성품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장차는 그가 변하여 반석 같은 성품으로 바뀐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베드로는 갈대였습니다. 예수님이 로마 군병들에게 붙잡히자 자신도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거짓말을 합니다. “당신도 저 예수와 한패지요?”라는 말에 “아니다!”고 3번이나 부인합니다. 한마디로 배신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겠다더니 예수님을 뒤로 하고 갈릴리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서 “시몬아 너는 나를 아직도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하시고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대답에 예수님은 다시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을 치라!” 예수님은 한번 인정하시면 끝까지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갈대와 같이 연약하고 변덕스럽던 베드로는 주님의 인정해 주심으로, 처음 만났을 때에는 베드로라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용기를 주시고 인정해 주시더니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배반하고 떠났을 때에도 찾아오셔서 “사랑한다!,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인 것처럼 한번 제자는 영원한 제자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 인정해주시는 그 사랑에 감격하여 베드로는 다시 돌아와 교회의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선한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죄인을 죄인이라 책망하실 수도 있지만, 욕하는 것이 아니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도리어 복을 빌어 주셨습니다. 이 같은 선을 행하시는 분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상을 숭배하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목동 다윗이 왕이 되게 하셔서 간음이나 살인죄를 범했음에도 수 천대까지 복을 받는 위대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죽기까지 헌신을 하는 사도바울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셨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지금도 그 선하신 일을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재능에 있어 그 누구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특한 그 무엇을 각자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자신을 과소평가 하거나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그 무엇이 있음을 인정받으면 인생을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하고 믿음이 적어도 하나님은 나를 믿어주시고 내 부족함을 있는 대로 봐주시고 인내하시고 기다려 주시면서 사랑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잠언3장6절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해 드려 보세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인정을 받으시면 그렇게 좋아하십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내 자신이나 남을 인정해 주는데 인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을 무시하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면 그것이 복으로 돌아옵니다.

특히 사람들은 짝에게 인정을 받기를 원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도 아내에게, 자녀는 부모에게, 부모도 자녀에게, 종업원은 고용주에게, 고용주도 종업원에게, 여기 서있는 오목사는요? 교인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교인들은 목사에게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짝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행복하고 힘이 생깁니다.

잠31장에서는 현숙한 여인, 지혜로운 여인이 나옵니다. 남편을 귀한 존재로 인정해주는 여인을 현숙한 여인,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합니다. 인정해 줌이 좋은 남편을 만들고 아내를 만들고, 자녀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인정에 인색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나도 무시를 당합니다. 그러나 서로가 좋은 점, 착한 점, 훌륭한 점을 찾아서 인정을 해 줄 때, 기쁨이 있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떤 가정사역 연구소에서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세상에서 네가 제일 소중하다.”, “난 너를 위해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어.”, “너만 보면 하나님께 감사해.”, “언제나 엄마는 널 사랑한단다.”, “엄마는 너를 믿는다.”, “네가 자랑스럽다. 엄만 행복해.” 라는 말이었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저희가 전도사 시절에 같이 계셨는데 하루는 목사님을 찾아뵈러 동기 전도사들하고 가는데 빈손으로 갈수 가 없잖아요. 그래서 과자를 사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도 과자 좋아하세요? 과자를 드세요?"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노인도 좋아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아이들이 좋아 하는 칭찬은 어른들도 좋아 한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은 사랑 받는 것만을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들도 자녀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엄마가 최고야. 엄마, 아빠랑 있으면 행복해", "아빠를 세상에서 제일 존경해요.", “엄마 사랑해요.”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복을 빌어주는 말은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인정해 주고 감사해야 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시면 식구들에게 부모님 손을 꼭 잡으시고, 부부끼리, 자식들 손을 잡으시고 "나는 당신 때문에(엄마아빠 때문에, 너 때문에 )행복해"라고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우리 아동부 학생들과 중․고등부 학생들이 자원봉사학교를 했습니다. 토요일에는 행사 마지막으로 자원봉사학교를 하는 동안 만든 포푸리와 도시락, 그리고 과일 바구니를 가지고 사랑의 집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그 곳에는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들과 환자분들이 계시거든요. 그곳에서 아이들이 노래도 하고 바이올린도 연주해 드렸습니다. 또 우리 학생들이 불편한 어르신들에게 식사하는 것도 도와 드렸다는 말을 듣고 정말 기뻤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변하게 됩니다. 자녀들에게 불평을 하지 말고 감사하고 늘 사랑으로 감싸서 하나님의 복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을 빌어 주는 사랑은 두 번째로 화평을 구하는 말입니다.
10,11절을 보게 되면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을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고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화평을 구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관계의 언어를 말합니다.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화평을 구하는 것은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말을 할 때 상대방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이기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을 합니다. 그러면 연예할 때 보다 더 사랑하며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결혼해서 살다보면 더 사랑해 집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 맞추어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화평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때로는 부부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부싸움의 이유를 보면 부시의 경제정책이나 6자회담이 어떻고 대북관계가 어떻고 한국의 외교 정책에 대한 의견이 갈라져서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지극히 사소한 일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갓 결혼한 아내가 식사 시간이 되어서 남편에게 말합니다. “여보, 국시 드세요.” 이 말을 들은
남편: “이것은 국시가 아니라, 국수라고 하는거요!”
아내: “그게 국수예요? 국시지.”
둘은 팽팽하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다가 옆집에 사는 국문학자에게 가서 물어봅니다. 국문학자는 대답합니다. “국시와 국수는 서로 다릅니다.” “국시와 국수가 왜 다르지요?” “국시는 밀가리로 만들고, 국수는 밀가루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밀가리와 밀가루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네, 밀가리는 봉다리에 담겨있고, 밀가루는 봉투에 담겨 있습니다.”
“봉다리와 봉투는 어떻게 다릅니까?”
“봉다리는 손으로 만드는 것이고 봉투는 기계로 만든 것입니다.” 국문학자의 해석의의미를 아시지요?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부지간에는 싸우는 관계가 아닙니다. 화평의 관계입니다.

하루는 아내가 통감자를 삶아서 소금과 함께 내놓으며 남편에게 먹으라고 합니다. 남편은 “아니, 누가 감자를 소금에 찍어먹어? 설탕에 찍어먹어야지. 빨리 설탕을 가져와.” “아니, 어떤 집에서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어요? 우리 집에서는 항상 소금에 찍어 먹어요.” “그거 이상한 집이네. 우리는 대대로 설탕에 찍어먹는다니까!”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느냐, 소금에 찍어 먹느냐 하는 문제가 양쪽 집안싸움으로 번졌습니다. 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전통까지 말하게 되자 그 싸움에 돌아가신 조상들까지 합세하여서 큰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급기야 두 사람은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집은 어떻게 드십니까? 우리 집에서는 통감자를 먹을 때 아무 것도 안 찍고 그냥 먹는데 말입니다. 감자는 그냥 먹는 것도 맛이 참 좋습니다.

사실 국수냐 국시냐의 문제가 아니고, 설탕과 소금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관계의 문제입니다. 화평이냐? 분쟁이냐? 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화평을 구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겸손하셨습니다. 겸손은 무조건 자기를 비하하고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바탕위에 행하는 태도입니다. 나만 옳다고 하는 것은 화평을 깨는 것입니다. 나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 결국 싸움이 됩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죄를 묻기 보다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어떤 잘못도 지적하지 않으시잖아요?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주시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구원을 해 주시는 사랑을 하시는 분입니다. 온유함으로 말입니다.
엡4:29에서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화평을 구하는 대화 방법 5가지가 있습니다.
1) 기대를 낮춰라.
'내 남편은 그래야 한다.'고 고집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드려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규정을 정해 놓고 그 규정에 맞추려고 하니까 상대가 안 맞으면 비난하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 기준을 채워주려고 노력하는 화평을 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듣는 사람이 은혜 받아야 합니다. 덕을 세워줘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잘 될 겁니다!” “하나님 믿으면 반드시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2) 잘 들어라.
'그래서 당신은 문제예요'하고 중간에 비난하려 들지 않고 끝까지 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눈을 주목하면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그렇군요.” 응답을 하면서 경청해야 합니다. 진정한 대화는 상대방의 존재를 존중하고, 상대방의 인격을 소중히 여기며, 상대방의 의견을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 줄 때 가능한 것입니다.

3) 상대가 하는 말을 평가하지 마라.
'그랬겠구나'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달될 것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힘내십시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믿습니다.” “참 잘 하셨습니다.” “조금만 더 잘 해봅시다!”

4) '나 전달법'으로 말을 하라.
'왜 또 늦었느냐?' 하는 비난이나 책망대신에 '당신이 전화도 없이 늦어서 나를 생각하지도 않았나? 해서 서운해요'하는 식으로 자기의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신 밖에 없어요.”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 당신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살아요?”“당신 때문에 든든합니다.”

5) 상대에 대한 요구나 바람을 말하지 말라.
듣는 이는 아무리 옳은 말이어도 저항감을 갖습니다. 반대로 내가 원하는 일을 해 주었을 때 구체적으로 칭찬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감사 합니다.” “주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믿고 행하면 하나님께서 뜻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실망하지 맙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능력 주실 것입니다.” “지혜 주실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덕을 세워주는 말입니다. 은혜를 끼치는 말입니다.

골4:6에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덕이 되지 않고, 은혜가 되지 않으면 - 교회공동체를 해칠만한 일이면, 내 마음에 묻어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화평케 하려면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하세요! 미소 짓는 것이 화평하는 것입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복을 빌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민수기 6장27절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라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언이요, 한번도 당신의 약속을 파기하지 않으신 약속입니다. 그냥 인사치레로 복을 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복을 빌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복을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것을, 그리고 야곱이 자신의 열두 아들에게 축복한 모든 내용을 하나님께서는 다 들어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자녀와 이웃들에게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온전하게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웃을 위하여 빌던 복이 나에게도 돌아온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화니 크로스비'라는 미국의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가 있었습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나의 갈 길 다 가도록'등 약 2천여 편의 은혜롭고 감동적인 찬송시를 쓴 분입니다. 이 분이 생후 6개월 만에 병으로 시력을 잃고 평생 시각장애인으로 92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렇게 은혜로운 찬송을 지을 수 있었는지 물었더니
"나는 늘 만나는 사람에게 당신의 영혼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이라고 복을 빌어 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빌어 줬던 것이 다 내게 와서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찬송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 방법 첫 번째는 말로 하는 것입니다. 복을 빌어 주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고 그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12절을 보면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주간 동안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시고 여러분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시면서 복 내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도 한주간 동안 선을 행하시고 화평함을 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한주간도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다시 한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 창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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