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주의보 (마 7:15-20)
본문
며칠 전에 5만 원짜리 손가방을 보았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생긴 손가방이었는데, 진품은 100만원이 넘는다고 하더군요. 소위 말하는 짝퉁이어서 그나마 싸다고 했습니다. TV에 선전하는 비싼 장난감도 학교 앞 문구점에 가면 싼 값에 살 수 있는 짝퉁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값비싼 진품을 살 수 없어 짝퉁으로 위안을 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비싼 값을 치르면서까지 진품만을 고집하는 것은 허영심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결코 짝퉁을 택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진품을 가려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15)고 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엉터리로 분별하고 엉터리로 가르쳐서, 멸망 길로 인도하는 짝퉁 선지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과 연관해서 생각한다면, 거짓 선지자들은 좁은 길을 가르치지 않거나, 넓은 길로 가면서도 생명에 이르는 특별한 비법을 알고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거나, 겉보기에는 좁은 문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미의 좁은 문이 아닌 문으로 들어가도록 제시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15절에 나타난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양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나아오는데, 겉과는 달리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로 묘사 됩니다: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15b) 그들을 먼저 자기를 위장합니다. 처음부터 본색을 드러내고 접근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겉모습은 거부감이 생기지 않는 “양의 옷”을 입습니다. 다음에는 효과적인 노략질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하나님 백성에게 “나아옵니다.” 상대방의 경계심을 무장해제할 만큼 그들은 사교적이고 붙임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양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신비함과 매력으로 양들을 끌어들입니다. 그런 후에 “노략질”하는 본성을 드러냅니다. 강한 카리스마로 노략할 수도 있고, 부드럽게 꼬이는 방법으로 노략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자기 손아귀에 넣은 다음 목을 쥐고 좌지우지합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그 시대에 어떤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였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거짓 선지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하셨고, 그들을 “삼가라”고 경고 하셨습니다. 만약 일반 상품의 문제라면, 짝퉁인 줄 알고서도 싼 맛에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 문제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결코 짝퉁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삼가는 마음으로 그들을 분별해야만 합니다. 양의 탈을 쓴 이리는 시대가 바뀌어, 목자의 탈을 쓴 이리가 될 수도 있고, 목사의 탈을 쓴 이리가 될 수 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들을 분별하여 삼가지 않는다면,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항상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있었고, 신약 시대에도 있었고, 교회사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독자들은 거짓 선지자라고 하면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을 쉽게 떠올 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 백성다움을 잃어버리고 살 때, 이방인의 침략을 통해 징계하셨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한 순간에도 언제나 ‘평강’만을 외쳤습니다(렘 6:13-15; 8:8-12).
그들은 결코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니까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전쟁이 나더라도 반드시 승리할 것이므로 아무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도록 돕지 않았습니다. 제사만 지내면 이전의 죄가 모두 사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뻔뻔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나 임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백성들의 신앙은 피상적이 되었습니다. 회개도 마음으로 하지 않고 예배도 마음으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습관적이고 형식적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참 선지자들은 ‘비관적’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들은 죄를 결코 간과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 백성답지 못한 삶을 돌아보고, 두려워 떨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회개치 않는 완고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혹독한 징계가 임박했음을 선포했습니다. 이모든 가르침 후에서야 징계 속에서도 절망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을 기다리도록,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도록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모든 환란에서 건져 주신다고만 말했습니다. 그들은 듣기에 좋은 말만 했습니다. 백성들에게 피상적인 처방만 내리고,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도록 돕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망했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역시 거짓 사도와 궤휼의 역군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에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1-15). 교회사에도 교회 안에 많은 거짓 교사들이 난무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너무 피상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값싼 은혜’ 곧 ‘짝퉁 은혜’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만사형통한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 진리를 신중한 의미로서 사용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믿기만 하면 된다는 피상적 의미로 사용합니다. 참으로 구원받은 자는 그 삶의 열매가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기보다, 긍정적인 메시지만 선포하려 합니다. 가능한 ‘믿쑵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축복을 난발합니다. 교인들도 죄를 지적하면 싫어하고 축복을 많이 해줘야 좋아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숫자는 불어났지만, 도덕성은 오히려 떨어지고, 한국 교회 전체가 지탄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않으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않으면서 회개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얼마나 당당하고 뻔뻔한지 모릅니다.
가짜는 언제든지 비싼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비싼 값 치르지 않고 몇 푼주면 살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값진 은혜의 복음을 값싼 은혜로 만들어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그저 주셨으나, 그 은혜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다 쏟으신 후에야 마련된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는 결코 싸구려처럼 짓밟고, 마음대로 해도 좋은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까닭은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눅 1:75)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빌 2:12).
거짓 선지자는 어느 시대에나 항상 있어왔고, 겉모습은 의의 일꾼이나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할 수 있기 때문에, 분별하기 위해서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말씀을 받고서도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행 17:11). 예수님께서 심판장으로 오실 그 날에, ‘주님, 짝퉁 선지자인줄 몰랐어요’라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분별하게 된다고 하십니까? 16절에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라고 했고 20절에도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16절과 20절 사이에 내용은 열매로 그들을 분별하게 된다는 말씀의 부연설명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를 분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두 나무는 외관상으로는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열매가 맺힐 때에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좋은 나무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고, 못된 나무에는 나쁜 열매가 맺힙니다. 열매가 나무의 좋고 나쁨을 판가름해줍니다. 그런 후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거짓 선지자도 나름대로의 열매를 맺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 열매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니라 나쁜 열매들입니다. 성경, 좀 더 좁게 말한다면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신 복 있는 자들에게 보이는 그런 열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쁜 나무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심령의 가난, 애통, 온유,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 마음의 청결, 화평케 함, 의를 위하여 핍박 받음 등이 그의 삶에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좋은 나무는 개인에게 있어서나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나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힙니다.
간혹 기질적으로 기독교가 좋아서, 혹은 어떤 기독교의 어떤 사상과 정신이 자기와 맞아서, 혹은 다른 여러 이유들로 스스로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 동안 도덕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열매로 드러나게 됩니다. 참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팔복의 열매들로 공동체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는 결코 팔복의 특성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믿음을 무너뜨리고(딤후 2:18), 분쟁과 훼방을 조장하고(딤전 6:4-5; 딤후 2:23),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게 해서(딤후 2:16) 하나님의 백성을 노략질합니다.
하나님은 아무 열매나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나쁜 열매는 결단코 받으시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나쁜 열매를 맺는 그 나무 자체는 찍혀 불에 던져지게 하십니다. 좋은 나무라는 것을 실증하는 것은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지 않는 모든 나무는 예외 없이 찍혀서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는 말씀은 참으로 무겁고 엄중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늘 이 말씀 앞에 신중하게 자기를 점검하면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열매를 확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최 동 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