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믿음대로 되리라 (히 11:1-2)
본문
올인(all-in)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 전 이병헌과 송혜교가 주인공이 되어서 많은 시청자를 냈던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올인 이라는 말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는 말입니다. ‘~에 올인 한다’는 말은 ‘~이것이 100% 그것이라고 확신한다’는 그런 표현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만한 것이 세상에 있을까?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농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밭을 갈다가 보물이 묻힌 것을 발견하고는 그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샀습니다. 진주 장사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는 아주 값지고 훌륭한 진주를 발견하자 그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샀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야말로 ‘올인’한 사람들입니다. ‘이거다’라는 확신이 설 때, 거기에 모든 것을 다 건 그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런 거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 다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모든 것 다 걸어야만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것을 만드신 분,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 그렇게 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분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내가 살고, 죽고, 내가 당하는 화와 복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내가 화를 당하거나, 내가 복을 받는 것도, 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고 믿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얼마나 그 하나님께 올인 하고 있는 겁니까?
많은 경우, 신앙생활이 하나님께 올인 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적당한 선들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조차도 내가 생각하는 선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가능하고, 여기까지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는 그런 생각을 지레 가집니다.
사업하는 사람이 사업 때문에 새벽마다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기도합니다. 그래도 그 사업이 더 나아질 기미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한 일년 열심히 새벽기도 하다가 그만 둡니다. 그렇게 새벽기도를 그만 두고 나서, 만일 여전히 사업이 안 되면, “기도하나 안 하나 똑같다.”고 할 겁니다. 만약 기도하지 않았는데 사업이 잘 되면 “기도해도 헛일이다. 기도 안 하니 더 잘 되네.” 그럴 겁니다.
가정의 문제를 놓고 새벽마다 새벽기도회에 참석해서 기도합니다. 몇 년을 했는데도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온 식구가 다 새벽기도회에 참석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합니다. 그래서 새벽기도회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랬는데, 여전히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기도하나 안 하나 똑같다.” 할 겁니다. 만약 기도 안 했는데 문제가 해결되면 “기도해도 헛일이다. 안 하니 더 잘되네.” 그럴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문제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기도하나 안 하나 똑같다.” “기도해도 소용없더라.” “안 하니까 더 잘 되더라.” 이런 생각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꺾어버립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해도 소용없다고 생각되어 그만 두던지, 신앙생활 해도 적당한 선에서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냥 내 삶에서 좀 도와주시는 분 정도입니다. 이때 ‘돕는다’는 것은 조금 보탬이 되는 정도를 말합니다. 이 일은 전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기에 내가 열심히 하고, 하나님은 그 일에 조금만 도와주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 정도의 하나님이 되시니까 올인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를 감히 기대조차 못하는 겁니다.
신앙의 두 가지 본질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어떻게 구원 받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가능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의 방법뿐입니다.
또 하나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각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보통,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이야기하면, 착하고, 선하고, 사랑이 많고 등등 윤리적인 것에 치중합니다. 물론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윤리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나에게 있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도 보면,
윤리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윤리적 기준은 우리가 생각하는 윤리적 기준과 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 그러나 그분은 도적질 한 사람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그러나 그분은 간음한 사람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윤리적 기준은 도적질 하거나 간음한 사람은 벌을 주어야 합니다. 혼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그분이 하신 일들을 보면, 또 다른, 그러면서도 중요한 것을 발견합니다. 기적입니다.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앉은뱅이, 맹인, 듣지 못하는 사람 등등의 병자들이 고침 받았습니다. 바다의 풍랑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하나의 사건으로만 봅니다. 그 사건 하나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그 옛날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은 그 일에만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암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예수님이 암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병을 고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친 비유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에 예수님께서 누구의 사업을 크게 번성하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까? 성경에 예수님이 누가 운전하는데 지켜주셨다고 되어 있습니까? 그래서 사업은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운전 또한 내가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어쩌다 큰 일이 날 뻔 했는데 다행히 큰 일이 아니면 그 때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셨다고 그리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그것도 사람들이 고칠 수 없는 그런 병을 고치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하게 하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님은 우리의 삶에 조그마한 도움 자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주인이라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의 직장이나 사업을 도와주는 분이 아니라, 그 직장과 사업의 주인이시라는 겁니다.
‘도와주시는 하나님’ 그 정도밖에 안 되니까 돈만도 못한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의 삶, 직장, 사업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 아닙니까? 그렇기에 돈이 큰 힘이 되는 거지요.
보세요. 누가 여러분에게 돈 1, 2천만 원 주는 것 하고, 목사나 교인들의 기도를 비교할 때 무엇이 더 고맙고 감사한 생각이 듭니까? 좋은 일 생기면 돈이나 도움을 준 사람에게는 감사합니다. 그런데 목사나 교인들에게는 어떠합니까?
말은 ‘전지전능하시 하나님’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러면서도,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호주머니 안에 있는 만 원짜리 하나만도 못하게 여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서부터 잘못된 겁니다. “믿는다.” 그러면, 대부분이 “내가 믿는 믿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도 그들의 삶의 믿음은 자기가 믿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믿는 겁니다.
조엘 오스틴이라는 목사님이 쓴 책이 있습니다. 우리 말 번역은 “긍정의 힘‘입니다. 그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유명한 골프선수가 사우디아라비아 왕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왕은 자신의 전용 비행기를 미국까지 보내 그를 데려왔습니다. 둘은 며칠 동안 골프를 즐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골프선수가 돌아갈 때가 되자, 왕은 비행기에 오르려는 그를 세워놓고 물었습니다. “귀중한 시간을 내서 저를 찾아주셨으니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골퍼는 “아닙니다. 이렇게 환대해 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제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왕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꼭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야 선생님이 이 여행을 평생 기억하실 테니까요.” 골프선수는 왕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골프채가 좋겠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내내 골퍼는 왕이 어떤 골프채를 보낼까 궁금했습니다. “내 이름을 새긴 순금 골프채? 다이아몬드 보석이 여기저기 박힌 골프채? 세계 최고 갑부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이 보내는 선물을 얼마나 대단할까?” 골퍼는 궁금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골퍼는 날마다 우편함을 확인 했지만 골프채는 좀처럼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몇 주 후에 사우디아라비아 왕이 서명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아니, 기대하던 골프채는 어디가고 달랑 편지 한 장이라니!” 그는 실망하면서 봉투를 열었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안에는 미국에 있는 커다란 골프코스를 선물로 주는 기증서가 들어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조엘 오스틴은, “왕의 생각은 우리와 차원이 다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왕 중의 왕이시다.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섬긴다. 그렇기에 우리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꿈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크고 넓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큰 꿈을 그렇게 꾸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말합니다.
오스틴은 큰 꿈이기를 이야기 했지만 그러나 우리가 꾸는 꿈의 크기가 먼저가 아닙니다. 먼저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자기의 수준에서 믿는 겁니다.
내 수준에서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은 골프채입니다. 거기에, 금으로 내 이름이 새겨있다면, 혹은 다이아본드 보석이 여기저기 박혀있다면 이 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며칠 함께 골프 친 것에 대한 선물이 이 정도라면 이건 굉장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우디아라비아 왕의 입장에서 보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적어도 큰 골프장 하나는 주어야 선물했다는 생각에 드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렇습니다. 고작해야 우리의 생각입니다. 우리의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믿음은 내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겁니다. 믿음은 현재의 내 수준에서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수준에서 미래를 보는 겁니다.
금으로 이름 새긴 골프채도 대단한 겁니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골프채도 대단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보다 더 큰 골프장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여러분의 작은 생각 속에 넣으려 하십니까?
여러분의 믿음, 여러분의 기도를 보세요. 누가 하나님 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노릇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삶, 여러분의 직장, 사업 등등 그 모든 것에 엄청난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기도하는 내용들은 어떠합니까? 겨우 하나님을 여러분의 심부름꾼 정도로 여기고 있는 거 아닙니까?
만약, 여러분이 홍해 앞에 섰다고 생각해 봅시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바로의 군인들. 그래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 기도하겠지요. 뭐라고 기도했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 배를 보내 주세요. 기왕이면 큰 배” “하나님, 저 바로 군대들이 우리에게 못 오도록 막아주세요.”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을 계획하고 계셨습니까? 홍해를 가르실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이건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어떻게 바다를 가르고 건넌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누구는 그것을 알았습니까?
그래요. 모세. 그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팡이를 바다를 향해 내 밀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불가능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불가능 한 게 없는 겁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절망이지만 하나님의 힘으로는 뭐든 가능 합니다.
열왕기상 18:41이하,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을 바라보며 몸을 굽히고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시종에게 올라가서 바다 쪽을 살펴보라고 하였습니다. 시종은 올라가서 보고 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엘리야가 다시 그의 시종에게 일곱 번을 그렇게 더 다녀오라고 하였습니다. 일곱 번째 되었을 때에 그 시종은 마침내 사람의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바다에서부터 떠올라 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아합에게 사람을 보내어서 비가 와서 길이 막히기 전에 어서 병거를 갖추고 내려가라는 말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바다에서부터 떠오르는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고고서 아합왕에게 비가 올 거라 얼른 내려가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랬다가 비가 안 오면 어떻게 합니까? 좀더 신중을 기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엘리야는 보았습니다. 그 손바닥만한 구름에서 엄청난 비가 올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영안이 열렸다고 하는 겁니다. 영안이 열렸다는 것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본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어떤 신비적인 것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엘리야가 그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고도 큰 비가 올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8:1에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아합을 만나거라. 내가 땅 위에 비를 내리겠다.” 그래서 엘리야는 아합을 만나러 갔습니다. 영적인 눈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보는 겁니다.
시골 조그마한 우물에서 태어난 개구리가 있습니다. 이 개구리는 이 우물에서 살면서 마음껏 헤엄치고 놀았습니다. 더 할 나위 없이 만족스런 삶입니다. “이 보다 더 좋은 삶은 없을 거야. 내게 부족한 것은 하나도 없어”
그러던 어느 날 고개를 들어보니 우물 꼭대기에서 할 줄기 빛이 흘러 들어왔습니다. 개구리는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저 위에는 뭐가 있을까?” 개구리는 우물 벽을 타고 천천히 기어올랐습니다. 그리고 꼭대기에서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이럴 수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연못입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연못은 자신이 살던 우물 보다 수백 배나 큰 겁니다.
과감히 앞으로 더 나아갔더니 이번에는 커다란 호수가 보았습니다. 개구리는 놀라움에 입을 떡 벌리고 호수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개구리는 더 큰 희망을 품고 바다까지 나아갔습니다. 세상에! 온통 물 천지인 겁니다. 개구리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비좁은 생각 속에서 살아왔는지 한심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복에 비하면, 자기가 우물 안에서 누렸던 모든 즐거움은 양동이 속의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꿈이 있을 겁니다. 비전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 하십시오. 여러분의 꿈보다 하나님의 꿈이 더 큽니다. 여러분의 비전보다 하나님의 비전이 더 큽니다. 여러분의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비전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고 광대합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무얼 주저하십니까? 그런데 무엇 걱정하십니까? “왜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나는 안 된다고 나는 글렀다고 생각하십니까?”
지난 날, 여러분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난 날, 여러분이 어떤 실패를 경험했는지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늘 새로운 날 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른 게 있다면 뭡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착하게 삽니까? 더 선하게 삽니까? 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 삽니까? 물론 그리해야겠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겁니다. 구원 받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산다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왜 쩔쩔 맵니까? 그런데 왜 실패 할까 싶어 염려합니까? 그런데 왜 뭐가 잘 안 풀린다고 투덜거립니까? 그런데 왜 나는 안 된다고 포기 하십니까?
다윗. 그는 간음에다 그것을 감추려고 부하를 일부러 죽음에 내 몰았습니다. 이건 우리가 보아도 용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자비를 내리시고 새로운 출발을 허락 하셨습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시 23:6)하고 찬양 합니다.
룻의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극심한 가뭄까지 찾아오는 바람에 그녀는 시어머니와 함께 굶어 죽을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좌절하지 않고 매일 밭에 나가, 떨어진 곡식을 주웠습니다. 성경은 룻이 그런 고난의 한 가운데서 밭의 소유자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말합니다.
잘 아는 요셉도 그렇잖아요. 어렸을 때 이집트로 팔려가 종살이 했습니다. 심지어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강간 미수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 가운데서도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 합니다.
성경은 위대한 사람들은 잘 난 사람, 똑똑한 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 등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의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 입니다.
그들은 환경 때문에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환경조차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고 그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9:27이하에 눈 먼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인데,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여러분은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이일이라니! 도대체 뭐가? 눈 뜨는 거? 그건 있을 수 없고. 그러니 먹고 사는 거나 넉넉했으면 좋겠다.” 뭐 대충 그런 대답이 아니겠습니까?
내 눈으로, 내 입장으로 보면 그렇잖아요? 어떻게 눈이 떠져서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무슨 재주로?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물으셨어요.
“너희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누가?” 할 수 있다고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누가?”
그래요. 예수 입니다.
사람의 눈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보라는 겁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눈 뜨는 건 불가능 하지만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얼마든지 가능한 겁니다.
그것이 믿음 입니다.
그래서 두 소경의 대답은 “예! 주님”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의 손을 잡고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어라”
때로 너무 힘들어 사람들에게 손 내밀 때 있지요?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소리로 도와 달라 할 때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는 왜 손을 못 내 밉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한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그분께 손 내 밀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 “난 이제 글렀어.”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난 왜 하는 일마다 안 되는지?” “이게 내 한계야. 나 같은 사람이 뭐 하겠어?”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그럴 때, 오히려 하나님께 올인 하십시오.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반석에서도 물이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때로는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 드십니까? 그런 생각이 들 때 오히려 하나님께 올인 하십시오.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더 크게 쓰실 계획을 갖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가망이 없다고요? 차라리 기대하지 않는 것이 덜 실망한다고요?
오늘 본문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바라지 않은 좋은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늘 똑같은 수준을 바라는 사람은 영원히 제자리만 맴돌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십시오. 하나님은 능력을 바라십시오.
힘들고 어렵다면 오히려 주변이 모든 것 끊고 하나님께만 올인 하십시오. 하나님께만 모든 것 거십시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리라” 아멘!
(이 영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