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가 아닌 선한 일 (잠 29:4, 몬 13~14) > 설교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설교자료실 >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억지가 아닌 선한 일 (잠 29:4, 몬 13~14)

본문

억지가 아닌 선한 일 (잠 29:4, 몬 13~14)


프랑스의 행동하는 신부 피에르 신부가 있습니다. 이 분은 신부이지만 국회의원도 하고 사역도 잘한 신부입니다. 그의 책 ‘단순한 기쁨’에는 “동물들도 사랑한다. 하지만 자유가 없이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자유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유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죄에서 자유하게 합니다. 신앙은 인간관계에서 자유하게 합니다. 신앙은 세상적 규범에서 자유하게 합니다.

저는 법적 용어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흔히 듣는 ‘집행유예’라는 것은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있지만 단지 집행을 유예하는 것입니다. ‘구속정지’는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있지만 구속만 정지된 것입니다. 이 모두가 아직 죄인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보면 죄가 있지만 유예하거나, 구속을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없다고 합니다. “무죄”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죄 값을 다 치렀다는 선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제는 “죄 없다”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고 외칩니다. 완전히 죄 없는 자가 되었다고 선포하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의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몸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아직 신분은 빌레몬의 종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합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종인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한 빌레몬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주인의 입장을 배려하고 있습니다.
마음껏 즐기고, 구속받지 않고 사는 것 같지만 신분은 종인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신분은 누구나 종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대단하게 사는 것 같아도 종외의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네시모가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길은, 자유인이 되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인인 빌레몬이 용서하고 이제 자유인이라고 선포해 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주인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주인의 은혜는 종이 자유하게 됩니다.
주인의 은혜를 받게 하기 위하여 바울은 다시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바울은 “너의 선한 일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토 아가톤 수”라는 말인데 너에게서 일어난 선한 일(the benefit arising from you)이라는 말입니다. 빌레몬에게서 일어난 선한 일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종을 용서하고 자유케 하는 선한 일입니다. 이 선한 일이 억지가 아닌 자의가 되게 하려는 것이 바울의 의도입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은 결코 억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의 자의적인 선입니다. 하나님의 자의적인 선으로,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선한 일이 항상 자발적이기를 바랍니다. 이런 선한 마음이 날마다 우리에게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첫째, 억지로 하는 선한 일이 있습니다.

바울은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돌려보내고 다시 바울에게 오게 하여 함께 일하게 하고자 합니다. 돌려보내지도 않고 용서하라고만 하면 억지 선이 된다는 말입니다.
‘억지’로 번역한 말은 ‘아나그케’입니다. 이 말은 ‘필요에 따라서’, ‘강요에 의하여’란 말입니다. 억지로 한다는 것은 자기 필요에 따라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은 타인의 강요에 의하여 하는 것을 말합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떼를 써서 얻은 자신의 돈을 다 탕진했습니다. 돈이 떨어지니 친구도 떨어졌습니다. 먹을 것도 없어졌습니다. 그는 결국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선하지 못합니다.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것이 그가 돌아온 동기였습니다. 그의 동기는 자기필요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순전히 이기적이었습니다. 그가 돌아온 동기에는 아버지의 입장이 전혀 없습니다.

주로 억지는 이기적입니다. 자기 필요에 의하여 하는 것이 억지입니다. 억지로 하는 일은 이기적인 동기가 많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내 이름은 김삼순”이 끝났습니다. 신문에는 사람들이 “이제 삼순이도 끝나고 무슨 재미로 사나?” 그런다고 합니다. 얼마나 세상이 재미가 없으면 그 재미로 살았을까요. 시청률이 50% 이상 올라간다고 야단이었습니다. 저는 드라마를 잘 안보지만 시청률이 높은 까닭이 무언가 궁금해서 두 번 봤습니다. 지난 목요일의 마지막 장면도 중간부터 봤습니다. 그런데 삼순이가 삼식이를 목을 조르면서 “사랑한다고 말해”라고 하더라구요. 버티다가 목이 조여서 “사랑해”라고 했습니다. 하기 싫어하는데 억지로 강요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기 전에 자의로 하면 좋을 걸 목 졸리고 하니 괴롭지요. 목 졸리기 전에 사랑한다고 하세요. 사랑한다는 말은 많이 할수록 좋습니다.

어느 영성수련회에서 있었던 일을 읽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부인들 세미나에서 얘기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바다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썰렁해입니다”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면 가장 따뜻한 바다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역시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사랑해’입니다. 가장 쉽고 듣고 싶은 이 말이 가장 따뜻한 바다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한 부인이 집에 와서 남편에게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줍니다. “여보, 재미있는 얘기 해 줄게. 이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바다가 뭔지 알아?” 남편이 알 리가 없었습니다. 한참 쳐다보고 있으니 “썰렁해야, 그런데 가장 따뜻한 바다는 뭔지 알아?” 다시 남편은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부인은 남편에게 “그거 있잖아, 내가 당신에게 제일 듣고 싶은 말”. 남편은 한참 만에 얘기했습니다. “열바다”. 강요하면 열 받아요.

마태복음 21장의 ‘두 아들의 비유’에는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밭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큰 아들은 가겠다고 대답은 멋지게 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는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뉘우치고 갔습니다. 첫째 아들은 억지 대답이었습니다. 가지도 않았습니다. 큰 아들은 적어도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속였습니다. 큰 아들은 바리새인과 제사장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억지로 선을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선은 율법적입니다. 문자적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선한 일을 하였지만 내면적으로는 선하지 않았습니다.

‘억지 춘향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리에 맞지 않아 되지 않을 일을 억지로 함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원래 ‘억지춘양’에서 온 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일이 순리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거의 강제로 이루어지거나 억지로 갖다 맞추는 것을 말합니다. 춘양은 경상도 어느 동네 이름입니다. 춘양에서 나오는 소나무가 좋은 재목이어서, 개나 소나 춘양목이라고 억지를 쓰는데서 나온 날이라고 함합니다. 억지는 참 선이 아닙니다.

“억지가 사촌보다 낫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일을 하는 데 있어 꿋꿋하게 고집을 세워 하는 것이 사촌이 도와주는 것보다도 좋다는 뜻입니다. 이 때 억지는 긍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억지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좋다는 것입니다. 고집스럽게 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는 억지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억지로 졌지만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의 아들 루포가 교회의 훌륭한 일꾼이 되었던 것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모든 것을 억지로가 아니라 원해서 하게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삶의 길을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침반의 바늘이 항상 북극을 가리키듯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점차 자연스럽게 성령의 인도하심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억지가 아닌 삶이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게 합니다.
영광이란 말은 본체적 영광과 효과적 영광으로 나눕니다. 본체적 영광은 본질적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보통 영광이라고도 합니다. 해나 달은 의지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영광은 억지 영광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효과적 영광은 고등영광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의 하나님께 대한 영광입니다. 인간이 자발적 의지를 가지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영광이 진짜 영광입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햄을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차피 햄을 먹을 바에야 맛있게 먹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차피 먹게 되면 억지로 먹지 말고 재미있게, 맛있게 먹으라는 말입니다. 억지가 아닌 삶을 살아야 즐겁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자의로 하는 선한 일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빌레몬의 선한 일이 자의로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의로 하는 선한 일이 되게 하려고 바울은 빌레몬을 설득합니다. 자의로 하는 일이 영광되고, 쉽고, 자신에게 기쁘고, 일의 능률이 오릅니다. 자의로 지는 십자가가 가볍습니다.

베드로전서 5:2에는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라고 합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이 자의적이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9:7에는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봉헌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가 아닌 자발적인 봉헌이 참 봉헌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보세요. 사마리아인은 반드시 해야 할 사회적 책임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과는 다릅니다. 그냥 좋아서, 그냥 원해서, 그냥 사람이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에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줍니다. 이것이 자의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이 자의적인 선한 일입니다.

비바람이 치는 어느 늦은 밤이었습니다. 미국의 어떤 지방 호텔에 노부부가 들어왔습니다. “예약은 안했지만 혹시 방이 있습니까?” 호텔은 만원이었습니다. 호텔에는 방이 없어 프런트 직원은 다른 호텔에 연락을 했지만 근방의 모든 호텔에 방이 없었습니다. “객실은 없습니다만 새벽 1시가 되어 오고, 비가 오는데 누추하지만 괜찮으시다면 제 방에 묵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 때 노신사는 “당신은 미국에서 제일 좋은 호텔 사장이 되어야 할 분 같군요. 제가 당신을 위하여 언젠가 호텔을 하나 지어 드리도록 하지요”라고 했습니다. 2년 후에 그때의 노신사가 뉴욕 행 왕복 비행기표와 함께 자기를 방문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뉴욕에 도착하자 그 신사는 뉴욕 중심가로 가서 대리석으로 만든 궁전 같은 호텔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호텔은 당신이 경영하도록 내가 지은 것이지요.” 그래서 조지 볼트는 미국 최고급 호텔, 월도프 아스토리아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이 노신사는 윌리엄 월도프 아스토리아였습니다. 억지가 아닌 자발적인 호의가 노신사를 감동했고 약속대로 호텔을 지어 주었던 것입니다.

지난 화요일(19일) 신문에 아주 감동적인 기사가 났습니다. 한 아름다운 젊은 여성의 자의적인 결단, 너무 아름다운 결단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여류 국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조혜연 6단입니다. 그녀는 이제 20살이 된 앳된 처녀입니다. 그런데 제4회 정관장배 세계여자바둑최강전 출전의 포기 선언을 한 것입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조 6단은 지난 5월에도 주일에 마스터즈배 여자부문 결승전에서 대국을 포기했습니다. “몹시 출전하고 싶었지만 일요일엔 예배 외에 아무 일도 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깰 수가 없었습니다. 융통성을 발휘하라는 많은 분들의 조언에 따르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신 평일 대국 때는 과거보다 더 집중해 좋은 바둑을 둘 생각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다. 대국을 하면 돈도 벌고 명예도 얻고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 때문에 자발적으로 포기했습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잘 되게 기도해야 합니다. 조혜연 6단을 응원합니다.

교회는 자의적 기관(voluntary institution)입니다. 교회의 모든 일들은 자의로 하는 일들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많은 교회 가운데 우리 교회에 나오는 것도 다 자의적입니다. 교회에 봉헌하고, 봉사하는 것도 다 자의적입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자의적으로 나오고 섬기는 곳입니다. 억지로 시켜서가 아닙니다. 어차피 교회에 나올 바에야 즐겁고 재미있게 나오고 섬기시는 것이 좋습니다. 더욱 자의적인 교회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협동과 협력은 다릅니다.협동은 동의 하에 일하는 것입니다. 협력은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의적으로 협력하여 자의적인 교회를 잘 일구어 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몇 년 전 유명한 골프 선수가 사우디아라비아 왕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왕은 전용비행기를 미국에 보내 초청하였습니다. 며칠 동안 골프를 함께 치고 돌아올 때 왕은 말했습니다. “귀중한 시간을 내서 저를 찾아주셨으니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아닙니다. 이렇게 환대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왕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꼭 선물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선수는 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골프채를 하나 해 주십시오.” 그리고는 선수는 어떤 골프채를 선물 받을까 궁금했습니다. 순금으로 된 골프채, 다이아몬드 골프채, 그는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우편함을 확인해도 좀처럼 골프채가 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왕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그는 실망하면서 봉투를 열었습니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아십니까? 그 안에는 미국의 커다란 골프 코스를 선물로 한다는 기증서가 들어있었습니다. 왕의 생각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억지가 아닌 선한 일에 대하여 과분한 선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의 선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왕의 차원에서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자발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일이 억지가 아닌 자의적 선한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의적 은혜처럼 자의적인 선행을 베푸는 한 주간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선을 행함으로 한 주간의 삶이 은혜롭기를 바랍니다.





고객센터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기독정보넷공식트위터 Copyright © cjob.co.kr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