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길
본문
골로새서 4장 2-4절
<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
존 스타인백의 ‘진주’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느 바닷가에 진주조개를 잡으며 사는 한 가난한 부부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 부부는 바다 속에서 값비싼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꿈에 부풀어 말했습니다. “이제 이것만 있으면 결혼도 화려하게 하고, 자녀들도 훌륭하게 키울 수 있고, 좋은 집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 소식이 퍼지자 병원 치료사는 병이 오래가도록 이상하게 투약을 했고, 동네 사람들은 자꾸 그 부부의 집을 기웃거렸고, 밤에 강도가 침입하는 일도 생겼고, 먼 친척들이 찾아와 도와 달라고 떼를 썼고, 성당의 신부님도 큰 헌금을 기대하면서 부담을 주었습니다. 결국 그 진주 때문에 점점 기쁨도 사라지고, 밤마다 엄습하는 불안과 공포를 이기지 못해 그 부부는 상의 끝에 그 진주를 다시 바다에 던져 버렸다는 것이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행복은 진주를 찾고 로또에 당첨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부귀영화는 편안은 주지만 평안은 주지 못합니다. 행복의 원천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행복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겨울은 눈이 있어 좋고,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것 같아서 좋고, 여름은 초목이 우거져 있어서 좋고, 가을은 열매가 있어 좋다.” 복된 사람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겨울은 추워서 싫고, 봄은 황사 때문에 싫고, 여름은 더워서 싫고, 가을을 고독해서 싫다.” 이런 사람은 겨울이 되면 여름을 생각하고, 여름에는 겨울을 생각하니까 행복할 틈이 없습니다.
흔히 부자들은 “옛날에 고생할 때가 좋았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사실 행복은 환경과 상관이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환경과 상관없이 행복하고, 불행한 사람은 환경과 상관없이 불행합니다. 아담처럼 에덴동산에서도 타락할 수 있고, 요셉처럼 차디 찬 감옥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때로 사랑하는 자녀에게도 부족함을 주십니다.
완벽한 외적인 축복은 오히려 마음을 타락시키고 믿음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완벽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도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이 있었고, 예수님에게도 가룟 유다를 두셨습니다. 그처럼 훈련용으로 무엇이든 부족한 것 하나는 남겨 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실 위대한 성자들에게도 다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몸에 가시가 있어 하나님께 그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 작정 기도를 했지만 그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처럼 인생에 가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주사 한 대 맞고, 침 한 대 맞으면 병이 낫는 것처럼 인생의 가시는 마음의 병과 신앙의 병을 낫게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가시를 극복하고, 가시밭의 백합화처럼 사는 것입니다.
< 행복을 위해 필요한 생활 >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활을 해서 어떻게 우리의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느냐에 따라 우리는 지금의 환경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1. 기도생활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은 ‘응답받는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가장 선한 모습으로 응답됩니다. 그 사실을 사단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단의 제일 과제는 성도가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기도 없는 우리의 땀과 노력을 우습게봅니다. 그러나 성도가 기도의 무릎을 꿇으면 사단은 벌벌 떱니다. 그러므로 하루의 첫 시간을 기도로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이 구절에서 “기도를 항상 힘쓰라!”는 말은 꾸준히 기도해서 기도를 생활화시키라는 말입니다.
성공적인 사람들의 공통분모는 꾸준함입니다. 무엇이든 했다 말았다 하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재능이나 실력은 좀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꾸준함 하나만 있어도 상당한 정도까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공부 잘하는 것도 머리 때문이 아니라, 꾸준함이 있느냐 없느냐 때문인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 중의 최고의 기도는 꾸준하고 끈질긴 기도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잘못되는 것 같아도 꾸준하게 기도의 끈을 붙잡고 있으면 마침내 길이 보이고, 길이 열릴 것입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톤은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치 있는 발견을 했다면 내가 다른 어떤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끈질긴 기도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지 꾸준하게 해 보십시오. 좋은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좋은 일을 습관화시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반짝 잘하는 것은 누구나 잘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때로는 힘들 때에도 계속 그 일을 하려는 강한 의지와 꾸준함이 성공하는 사람의 특징이고, 은혜 받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처럼 꾸준하게 기도하고, 끈기 있게 기다려보십시오. 그러면 기도에는 외상이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2. 감사생활
본문 2절 하반부에서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은 감사의 중요성을 잘 말해줍니다. 사실 기도 중에 가장 많이 해야 할 말은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불평거리를 주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감사거리를 주십니다.
우리가 더 축복받고 더 행복하게 살려면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까지 도우셨다!”는 에벤에셀의 감사를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비춰볼 때 우리에게 얼마나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까? 뉴스를 보면 가끔 끔찍한 죄를 지은 사람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 나쁘다고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우리에게도 그런 무서운 죄악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과 행위라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어떤 분은 이혼한 사람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이혼을 해!”라고 하면서 신앙 수준이 한참 낮은 사람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본인이 이혼을 경험하는 경우를 가끔 목격합니다. 이혼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혼한 사람이나 이혼하지 않은 사람이나 사람됨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처럼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다 비슷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문제와 고난이 없는 것은 내가 죄와 잘못이 없고 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게 아무 문제가 없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감사할 것뿐이고, 고난이 있어도 더 큰 고난이 없는 것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을 자주 원망합니다. “이제까지 내가 비교적 착하게 살고, 봉사도 잘하는데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처럼 복을 주시지 않을까?” 그것이 얼마나 지각없는 불평이고 원망인지 모릅니다. 사실 나의 공로가 하나님의 기준에 얼마나 큰 공로가 되겠습니까? 잘하는 것 같을 때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잘못을 얼마나 많이 저지르는지 모릅니다. 그런 잘못에 대해서 즉각 벌을 내리지 않는 것만 해도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감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의 부족한 모습을 참아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 하나님의 참아주신 인내를 감사하면서 우리도 배우자와 자녀와 다른 사람에 대해 참아야 합니다. 사람의 매력은 참아주는 것과 속아주는 것에 있습니다. 자녀를 키울 때도 부모의 매력은 속는 데에 있습니다. 부모들이 사설탐정이 되어 자녀들의 비리를 낱낱이 파헤치려고 하면 자녀들은 은혜를 맛을 모르게 됩니다.
때로는 자녀들이 속이려고 할 때 속아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을 감쪽같이 속인 것으로 알지만 속은 것이 아니라 믿어준 것입니다. 결국 참는 것이 믿어주는 것입니다. 베드로, 바울, 모세와 같은 사람들도 다 잘못이 많았지만 하나님이 참아주셨기 때문에 마침내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가끔 남편이 속 썩인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참아야 합니까?”라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참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피 흘리기까지 참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피 흘리기까지 참아주셨고, 지금까지 우리를 참아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감사할 것뿐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적인 축복이 없는 것을 가지고 불평하지만 사실 평범한 것에 더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대개 언제 건강에 대해 감사합니까? 대개 병들었다가 기적적으로 병이 나을 때 감사하고 그때 감사헌금을 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병에 들어서 기적적으로 나은 사람보다 병에 들지 않는 사람이 더 기적의 주인공이고 더 감사한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불행하게 사는 사람에게 있는 뚜렷한 특징 한 가지는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내가 못사는 것은 누구 때문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이 그들을 더 불행하게 만듭니다.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과 감사로 받는 마음에서 옵니다. 우리는 무엇을 받을 때에도 당연하게 받지 말고 감사하면서 받아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자식들은 당연하게 받지만 사실 감사로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관계가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관계가 됩니다.
어떤 분은 밥을 먹을 때 돌을 씹으면 “아내가 얼마나 미안하게 생각할까? 평생 밥을 해주면서 돌이 한번도 안 들어가면 정상이 아니지!”라고 생각하면서 조용히 처리합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것을 아내는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집에 돌아오는데 아내가 이웃에게 자랑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요. 이제까지 한번도 밥에 돌을 넣어본 적이 없어요.” 남편이 그런 모습을 보고 흐뭇해합니다.
그처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월급을 많이 갖다 주고, 다이아를 선물할 필요가 없습니다. 배우자를 생각해주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합니다. 때로 내 아내와 남편이 싫은 구석도 있었지만 사실 감사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감사는 감사를 증폭시키고 새로운 감사거리를 낳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감사를 실질적으로 표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조금이라도 더 기여하려고 하는 분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것을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40년의 광야생활’이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작년 말까지 다른 교회에 다니면서 우리 사역을 위해 꽤 많은 헌금을 하시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헌금을 받으면 거의 예외 없이 깊은 감사표현을 담아서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작년 말까지만 헌금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공언한 대로 금년 1월부터 더 이상 헌금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재정적인 타격이 생겨 계획했던 한 분야의 선교사역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걱정하는 마음이나 불평하는 마음보다는 그 집사님이 이제까지 헌신한 것에 대해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메일을 보냈습니다. “집사님! 지금까지 헌신한 것에 대해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그 집사님이 금년 4월부터 다시 헌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그때 불평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하나님께서도 외면하시고, 그 집사님도 다시 헌금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리는 단순합니다. 감사하면 더 축복받고, 불평하면 축복이 끊어집니다.
어떤 분이 한 달 동안 특이한 실험을 했습니다. 달동네에 있는 10개의 집을 선택해서 현관에 매일 100불을 놓고 그 결과를 관찰하는 실험이었습니다. 그렇게 돈을 놓으니까 첫째 날에는 사람들이 멈칫하다가 그 돈을 집어갔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나니까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 고맙다!”고 하며 돈을 놓고 가는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20일쯤 지나니까 이제 돈 받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마침내 한 달 기한이 끝나서 그 사람은 더 이상 돈을 놓지 않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뒤에서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 중에 한 사람이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이봐, 오늘은 왜 돈 안줘! 빨리 100불 내놔!”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매일 24시간과 공기를 비롯해서 매일 100개 이상의 기적적인 선물을 주시고 가십니다. 그 매일의 은혜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무수한 은혜를 받고 살면서 때로 어느 한 가지라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금방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축복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은 감사하는 만큼 축복받고, 감사하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오시면 감사의 안경이 씌워지고 모든 것이 감사거리가 됩니다. 반대로 사단이 내 마음을 지배하면 불평의 안경이 씌워지고 모든 것으로 불평거리가 됩니다. 감사는 어떤 자본보다 위대한 자본입니다. 감사는 어떤 마귀 쫓는 도구보다 더 위대한 마귀 쫓는 도구입니다. 감사하면 마귀가 쫓겨 나가고, 불행이 쫓겨 나가고, 어두움이 쫓겨 나갑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다 감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말 축복을 원하면 감사하는 훈련을 통해 감사하는 체질로 만들어야 합니다. 결국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최고의 부자이고, 최고의 신자입니다. 최고의 기도는 감사가 넘치는 기도이고, 최고의 영성은 감사하는 영성이고, 최고의 예언은 내 입에서 나오는 감사하는 말입니다. 그처럼 감사하는 마음을 준비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된 손길은 결코 그 사람을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전도생활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편지였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영혼을 더 많이 살릴 수 있을까?”하고 끊임없이 전도를 생각했습니다. 바로 거기에 사도 바울이 힘든 중에도 행복하게 산 비결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물질과 재능과 힘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들이 자기만을 위해서 쓰인다면 그 인생은 쓸모없는 인생이 되고, 쓸모없는 인생에게는 행복도 없습니다. 행복감은 “내가 이렇게 쓰임 받는구나! 내가 이렇게 쓸모 있구나!”하는 것을 느낄 때 주어지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내 인생이 영혼을 살리는데 쓰임 받으면 얼마나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처럼 행복을 주는 일을 왜 많은 사람들이 외면합니까? 왜냐하면 전도와 선교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엄청난 선교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후방에서 성도들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성도의 기도를 먹으면서 일하는 선교사와 목회자들은 반드시 큰일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제는 기도만 하지 말고 직접 전도에 나서야 합니다. 왜 오늘날 잘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성 안에서만 소리치는 다리 부러진 장수처럼 교회 안에서만 잘 활동하고 전도는 나서지 않음으로 1년에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못합니까? 전도의 은사와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입을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전도해도 잘 안 된다고 합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꿀벌은 1파운드의 꿀을 채취하기 위해 5만 6천 송이의 꽃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전도도 그래야 합니다. 한 번 전도하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5만 6천 번 방문하지는 못해도, 56번 방문하면 사람이 영혼을 얻는 꿈같은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 열정이 없으면 전도할 수 없습니다. 일생 백만 명을 전도했다는 무디는 어디에 가든지 전도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전도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뛰어다니듯이 다녔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미친 무디’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그의 숙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조카 무디는 봄날의 토끼처럼 미쳤다.”
한번은 무디가 섬기는 교회의 수석 성가 가수였던 생키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무디 목사님을 지치게 해 주세요. 아니면 우리들에게 초인적인 힘을 주세요.” 당시 어떤 저술가는 무디 목사님을 “밀물처럼 나타났다 썰물처럼 사라진다!”고 묘사했습니다. 그런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좋은 일을 생각만 하지 말고 좋은 일에 나서야 합니다. 이제는 “전도해야 되는데...”라고 안타까워하지만 말고 전도에 실제로 나서야 합니다.
미국의 폴 마이어라는 성공 연구가에 의하면 미국의 경우 성공한 사람은 13%이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87%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성공한 사람과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좋은 비전을 가지고 좋은 일을 생각만 하고, 성공한 사람은 좋은 비전과 좋은 일을 이루기 위해서 그 일에 나선다는 것입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기다릴 때 땀을 흘리며 기다려야 합니다. 어떤 분은 전도하려면 성령 충만해야 된다고 하면서 전도는 하지 않고 성령 충만만 기다립니다. 그러면 시간만 지나고 성령 충만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가서 땀을 흘리고 씨를 뿌리면 반드시 성령 충만한 은혜가 있게 될 것입니다.
요새 발의 중요성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발만 잘 관리하면 건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건강도 전도하는 발에 달려 있고, 영혼의 건강도 전도하는 발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의 유능함과 아름다움도 전도하는 발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끼리만 예배하고 기도하면 교회는 병들게 됩니다. 은혜 받았으면 그 은혜를 전하는 것까지 해야 진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 말씀대로 순종하십시오 >
오늘 우리는 인생을 행복하게 만드는 3가지 길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은 다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이론적으로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이론만 많아지고 있습니다. 각종 세미나가 홍수처럼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의 위기는 이론이 없어서 생기는 위기가 아니라 이론대로 실천하지 못해서 생기는 위기입니다. 이론은 부족해도 십자가를 지고 말씀대로 실천하면 한국 교회는 다시 부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방법과 많은 이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끝난 후에 성도들로부터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얘기를 들으면 제일 좋습니다. 그런데 더 좋은 것은 그 말씀대로 사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지나가는 식으로 한 말, 사소한 한 마디까지 기억하고 실천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감동이 됩니다. 우리가 작은 부분에서도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실 것입니다.
믿음생활의 클라이맥스는 순종입니다. 성도가 축복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결정적인 순간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는 “새벽에 기도해야지! 사랑하고 용서해야지!”라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세상에 나가는 순간, 몸이 힘들고, 용서하고 말을 먼저 걸면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고, 말씀대로 살면 자기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손해 보는 것 같으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불순종합니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 축복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경험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금 손해 보는 것을 겁내지 말고, 때로는 맘에 들지 않는 말을 해도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까지 순종해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그런 엄청난 순종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작은 것부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작고 사소한 명령이라도 힘써 순종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기도에 항상 힘쓰라! 기도할 때 감사함으로 기도하라! 전도의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기도생활, 감사생활, 전도생활을 함으로 행복을 얻어 누리시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