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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 할 길 (마 20: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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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 할 길 (마 20:17-28)


오늘 말씀의 제목을 ‘아직도 가야 할 길’이라고 정해 보았습니다. 이 말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스캇 팩’이라는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며 상담심리학자인 사람이 지은 책의 제목입니다. 이 책은 뉴욕타임지가 선정한 최 장수 베스트셀러입니다. 미국에는 하루에도 6000권의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 책은 지난 10년 이상 베스트셀러 자리를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아주 경이로운 책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인간 완성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우리는 '아직도 가야할 길' 위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신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이 길은 곧 끝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더 갈 수 있는 여행을 이쯤에서 그만 둘 것인가, 아니면 계속 갈 것 인가하는 선택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기로에 선 사람들에게 아직도 가야할 길을 너무 일찍 그만 두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누구나 예외 없이 찾아오는 고통을 이기며 남은 생을 힘있게 살 것을 강조합니다.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 죽을 때까지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필연 속에 태어난 우리가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힘들다고 주저앉을 수 없고, 어렵다고 피할 수 없는 길이 있습니다. 인생은 바로 그 길을 매일매일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란 삶의 뒤안길을 뒤돌아보며 단지 후회하는 가지 않는 길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 막다른 골목에 서 있을 때에라도,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을 때에라도, 나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힘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우리에게는 우리만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주님이 가신 길이고, 이 땅에 신실하게 살고자 몸부림쳤던 사람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걸어온 길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에게 아직도 가야할 그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 길을 향하여 우리는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합니다. 그 길이 어떤 길입니까? 주님께서 앞서서 걸어가신 그 길은 과연 어떤 길일까요?

우선, 십자가의 길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길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17절 시작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라고 말합니다. 북쪽 갈릴리를 중심으로 주로 사역하시던 예수님께서 종종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를 2번이 지나갔고, 이제는 마지막 여행입니다. 주님은 이번 여행을 끝으로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 마지막 여행길에서 있었던 사건과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본문의 주요내용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죽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18절과 19절에서 이것을 잘 알려줍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지금 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길을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길이 바로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십자가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요, 자기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십자가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영광은 고난이후에 오는 것이고, 부활은 죽음이후에 오는 것입니다. 죽음 없이 부활이 없고, 고난 없이 영광은 없는 것입니다. 수고와 노력 없이 열매는 없는 것이고, 땀과 눈물 없이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길이요,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좁은 길이요, 때론 힘들고 어려운 길이고, 희생하고 투자하며 사는 길입니다.

세상이 편해졌습니다. 전에는 미국을 가려면 수개월이 걸렸습니다. 이제는 몇 시간 안에 도착합니다. 앞으로는 한국에서 뉴욕을 2시간 안에 도착할 날이 온다고 합니다. 이제 머지 않아 뉴욕에서 점심 먹고 저녁에 한국에 와서 잠을 날이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소식 한번 전하려면 함흥차사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키보드 하나만 누르면 전 세계로 소식이 갑니다. 이제는 인터넷세상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세배를 드리는 것도 인터넷에서 화상으로 절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뱃돈도 온라인으로 붙여달라고 한답니다. 정말 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아파트 이름도 ‘이 편한 세상’이라고 지은 것을 봅니다. 이처럼 편해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편안 것이 다 좋은 것입니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낭만이 점점 사라지고 있고, 지극히 사무적이 되어가고, 철저한 이기적인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편하니까 게을러지고, 약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서도 적잖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즘은 신앙생활도 편하게 하려고 합니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 고민하지 않습니다. 경건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위해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일까요? 이것이 주님이 가신 길입니까? 신앙에 있어서도 편안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편안하면 게을러집니다. 긴장이 풀어지고, 틈이 생깁니다. 약하게 되고, 힘이 없습니다. 흔들리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편한 길’이 아니라 ‘바른 길’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영원히 임합니다. 이 길을 걸어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섬김의 길입니다.

28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성경에서 주님이 오신 목적을 이렇게 분명하게 전하는 구절이 별로 없습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주님이 오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하나를 이 말씀에서, 그것도 친히 주님의 입으로 전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왜 오셨습니까?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섬기러 오셨습니다. 주인이 되어 권세를 누리려고 오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종이 되려고 오셨습니다. 자기를 위해 호강하며 살려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도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습니다. 섬김과 봉사를 위해 오셨습니다. 희생과 헌신을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은 그 길을 신실하게, 말없이 걸어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고 봉사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예배의 봉사입니다.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나의 봉사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영어로 예배를 ‘worship services'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사랑을 확인하고, 헌신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있어서 예배만큼 소중한 행위가 없습니다.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하고, 예배가 내 신앙의 가장 한 복판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도 예배는 계속됩니다. 천사가 하나님을 시중들 듯, 모든 성도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곳에서 영원토록 삽니다. 예배를 소홀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를 위해 잘 준비해야 합니다. 딴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고, 피곤과 졸음을 막아야 합니다. 나의 예배를 점검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의 봉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본질 자체가 봉사에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우리 몸에 비유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고, 성도들은 몸의 지체입니다. 지체는 각 부분에서 열심히 일하여 몸의 균형과 건강을 유지합니다. 교회의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봉사를 위해 존재하기에 어떤 경로든지 봉사해야 합니다. 몸으로, 시간으로, 물질로 봉사해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봉사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특히 ‘집사’의 의미는 봉사하는 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봉사하지 않으면 직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봉사할 때 직분에 가치가 있고,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위한 봉사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도 열심히 섬기고 봉사해야 하지만, 교회 밖에서도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봉사는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내가 가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봉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내가 감당할 몫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섬김의 길로 부르십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감당한 일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예배와 교회와 이웃을 위한 신실한 봉사를 통해 나의 존재와 신앙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최선의 길입니다.

본문의 주요내용은 제자들 사이의 자리다툼으로 인 싸움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큰 권세를 잡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왕이 될 때, 누가 주님의 오른팔과 왼팔이 될 것인가에 대한 다툼으로 시끄러웠던 것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은 제자들을 보면서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래도 주님은 책망하지 않으시고 진실된 삶과 주님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주님은 어떻게 으뜸이 되는 것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진정 우리가 으뜸이 되기를 원하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으뜸이 되기 위한 방법만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님이 여기에서 원하는 더 중요한 의도는 으뜸보다 으뜸으로 가는 과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최고’보다 ‘최선’을 말씀하려는 것입니다. 최고는 오직 한 사람밖에 되지 않습니다. 모두 왕이 나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최고면 정말 최고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도는 최선입니다. 최선을 다할 때, 곧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최선의 길을 가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최선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최선을 다할 때 인정을 받고,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고, 하나님의 은혜도 임하는 것입니다. 본문 바로 다음에 나오는 사건은 그것을 대표적으로 알려줍니다.

주님이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 소경 바디매오가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결사적으로 주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그에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앞을 보지 못하는 그 순간에 가장 크게 소리를 지르며, 자기를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여 주님의 시선을 끌려고 노력했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했지만 그는 더욱 소리를 높였습니다. 주님은 그를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다른 성경에서 그때 바디매오는 주님께 뛰어 달려갔다고 말합니다. 소경은 달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달려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은 소경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그의 입을 통해 듣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소경이 보기를 원한다고 했을 때, 비로소 주님은 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여러분, 이 모두는 무엇을 알려줍니까? 바디매오는 그야말로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순간에,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바로 그때 주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요즘 한국 축구계에 ‘박주영’이라는 선수가 큰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박주영 신드롬’이란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지난 금요일 밤에 그야말로 벼랑 끝에 몰렸던 한국 축구를 그가 살려 냈습니다. 20살밖에 안 되는 청년이 온 국민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야 물론 축구를 잘하기 때문이고, 골을 잘 넣기 때문입니다. 가히 축구 천재라고 불릴 만큼 천부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그가 예수를 잘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골을 넣을 때 운동장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대견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힘이 나고, 능력을 받고, 겸손합니다. 그가 축구를 아주 겸손히 하는 것을 느낍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운동에서도 교만하면 끝입니다. 한국 축구가 발전하려면 월드컵 4강을 잊어야 합니다.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뛰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잘하는 이유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축구에서 90분 동안 계속 뛴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축구의 승패는 결국 체력에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기술이 좋고, 조직력이 뛰어나도, 선수들의 체력이 뒤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그야말로 그라운드에서 얼마나 뛰는가에 따라 승패는 결정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주영은 정말 열심히 뜁니다. 바로 거기에서 찬스가 오고, 골을 넣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장소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시간에,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오래오래,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설교를 가르치는 교수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설교자는 강단에 올라갈 때, 어쩌면 이것이 생애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라고 강조합니다. 그런 마음과 자세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설교도, 사역도, 사업도, 직장도, 공부도, 교회 일도, 그 외에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요구하시고,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남은 길이 있습니다.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주님이 우리를 부르는 그 날까지, 최후의 승리를 얻기까지, 십자가의 길, 섬김과 봉사의 길, 그리고 최선의 길을 향해 이번 한 주간도 힘있게 걸어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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