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집과 강도의 소굴 (눅 19:45-48)
본문
성전은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아니 우리는 성전을 어떤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까? 물론 성전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세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벗어나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동식 성전을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입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까지 성막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에서 벗어나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이후부터는 한 곳에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땅 전체에 흩어져 살게 됩니다. 그래서 저들이 때를 따라 함께 모여 예배드릴 필요성이 생기게 되고 이에 솔로몬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적어도 일년에 세 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이야말로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성전은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집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머물고 계신 내 몸을 바울 사도는 성전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동시에 오늘날의 교회를 우리는 또한 성전이라고 폭 넓게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오신 이후 제일 먼저 하신 일은 바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입니다. 흔히 성전 정결 사건이라고 부르는 이 일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제물을 준비하여 성전으로 올라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멀리서부터 오는 까닭에 제물을 집에서부터 준비해 오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까지 와서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 등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전 근처에서 제물로 드릴 짐승들을 파는 장사꾼들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제사장의 허락을 받고 이방인의 뜰로 불리는 성전의 뜰에서 제물을 사고 팔게 됩니다. 장사꾼들은 여기서 남긴 이익금 중 일부를 제사장에게 바칩니다. 그러자 제사장들이 이번에는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오는 제물은 부정해서 안 된다고 하며 성전 뜰에서 파는 것만을 제물로 인정을 하게까지 됐던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성전 뜰에서 파는 제물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는데 문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흠 없는 것이라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흠 있는 것까지도 가져다가 팔았고 이를 제사장들이 눈감아 주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성전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성전세를 내도록 되어 있는데 시중에서 사용되는 돈은 부정하다고 하여 성전에서만 사용되는 돈을 따로 만들어서 이것으로 바꾸어 드리도록 하면서 여기서도 이문을 남겼던 것입니다. 결국 장사꾼들은 큰 이익에 눈이 멀었고 제사장들은 뇌물에 눈이 멀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보게된 예수님이 정말 속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장사꾼들의 상을 둘러엎으시며 모든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내어쫓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사꾼이 강도란 말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는 행동이 강도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칼만 안 들었지 그들의 하는 것이 짓이 강도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강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거기다가 하나님께 드려서는 안 되는 제물 즉 흠 있는 것으로 드리도록 만들고 있으니 이것 또한 사기꾼이나 강도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도록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뇌물을 받은 제사장들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또한 아프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기 위해 성전으로 나오는데 그러나 그런 우리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강도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예배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강도입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될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있고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지 않고 있다면 이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강도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마음을 쏟기보다는 내 문제의 해결만 바라고 복 받기만 바라고 있다면 이 역시 강도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여러분들을 바로 잡아주지 못하고 있는 목사 자신도 강도짓을 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흠없는 제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어떠한 흠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시비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역시 강도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될 것을 드리지 못하고 있다면 이 역시 강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종이 먼저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혹시 종으로 인해 여러분의 마음이 상한 것이 있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종이 여러분들을 잘못 가르치고 잘못 인도하고 있는 강도는 아니었습니까? 아니 주님의 주셨던 다른 말씀으로 본다면 종이 바로 삯군 목자는 아니었던가요?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우리가 온전히 사랑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역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내가 주님께 드려야 될 시간을 주님께 바로 드리지 못하고 주님께 드려야 될 영광을 주님께 온전히 돌리지 못하고 내가 칭찬 받으려고만 했고 인정받으려고만 했고 누가 나를 알아주기만을 바랐던 모든 것들이 바로 나 역시 강도 중의 한 사람인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마땅히 주님께 드릴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못하고 마땅히 연약한 자를 돌아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도 형편이 어렵다고 하며 외면했던 모든 것들이 바로 강도짓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께 먼저 드리기보다는 받으려고만 했던 것들이 다 강도와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강도의 소굴을 만들지 말라고요.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 마음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고 정말 주님이 기뻐하실 수 있도록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전은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땅히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이란 곧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자는 마땅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나름대로 다 기도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 마음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단순히 입술로 드리는 기도가 아닌 마음을 바치는 기도가 되어야 하고 우리 심령으로부터 드려지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곳에 모이든지 그것이 기도하는 곳이 되도록 만들 책임이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말씀하시며 동시에 두 사람이 무엇이든지 땅에서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루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함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시기도 했고 골방에서의 기도를 말씀하시기도 했지만 그러나 성전의 기도는 단순한 골방의 기도나 한적한 곳의 기도의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함께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전에 모일 때마다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함께 기도하는 자리를 만들어야 하고 그 기도의 자리가 은혜로 넘쳐나도록 만들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 기도하면 기도에도 더 힘이 나게 마련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러 갔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임했던 성령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120명의 성도들이 함께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때 성령이 놀랍도록 그들 가운데 임했던 것입니다. 이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우리들 가운데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이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우리가 전혀 기도에 힘서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밤새도록 기도하던 일을 기억합니다. 그때 주의 천사가 나타나 감옥문을 열고 베드로를 감옥에서 끄집어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처럼 함께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는 것은 큰 역사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함께 모여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함께 모여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까요? 먼저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추한 모습을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먼저 자복함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하고 단순히 내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어떤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든지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면서 기도하고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하여 주시기를 위해서 중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솔직하게 열어드려야 합니다. 마음을 열되 욕심을 따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덕을 세우는데 필요한 것들을 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데 부족하지 않도록 필요한 것을 구해야 합니다.
아울러 주의 종이 담대히 말씀을 증거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고 좋은 일꾼들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세워주시기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사단에게 묶여있는 영혼들이 풀려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시험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승리할 수 있기를 위해서 또한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향남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해 왔습니다. 모일 적마다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 교회가 더욱 기도에 힘써야 할 것이요 지금까지 함께 하지 못했던 분들까지도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 동참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 생각해야 할 것은 사탄의 역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위해서도 그렇고 더 나아가서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기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무리들을 내어쫓는 것을 보며 가장 불편했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을 통해서 이득을 챙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래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잡아죽이려고 꾀했습니다. 하지만 어찌해야 할지 방도를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백성이 모두 그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강도의 소굴이 아닌 기도하는 집으로 만드는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목사는 깊이 있는 영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가르쳐야 할 것이요 성도 여러분은 열심히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이야말로 사단이 가장 두려워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성령의 검이라고 바울 사도가 가르쳐 줍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의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듯이 우리 역시 오직 말씀으로만 사단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단이 강하게 우리를 시험하려고 해도 말씀 앞에서는 그만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밝게 비쳐지는 불빛 아래서는 어둠이 물러가듯 말씀이 바로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의 모든 어둠이 물러갑니다. 그리고 어둠이 물러간 그곳에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넘쳐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든지 말씀을 듣는 일에 온 마음을 다 쏟아야 하고 그 어떤 것으로도 말씀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어야 힘을 내듯이 말씀은 또한 우리 영혼의 힘이 되는 양식이기도 합니다. 왜 수요 통독 기도회가 그렇게 은혜가 넘치고 많은 역사가 나타납니까? 바로 그 자리에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힘을 다해 말씀을 읽고 듣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곧 우리의 능력이요 힘이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있는 곳에 우리의 모든 것을 도적질하려고 하는 어두움의 역사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는 교회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 우리 안에 어떤 어두움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다시 그 어두움에 매이지 않도록 말씀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과 기도의 능력은 곧 순종하는 삶과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도록 하십시오. 말과 혀로만의 사랑이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마지막 때가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오신 주님이 기뻐하며 귀한 은혜와 상급을 더하실 수 있도록 말씀의 사람, 기도의 사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