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강해(제8강) 화평케 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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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ksk 작성일15-03-07 10:24 조회3,73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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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강
화평케 하는 자
마 5:1~12
오늘은 산상보훈의 팔복 중에 일곱 번째인 “화평케 하는 자”를 생각하겠습니다.
○화평이란?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을 받는다.’ 이렇게 하면 잘못 읽지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 이렇게 읽으면 잘못 읽는 거지요? 이 성경은 잘못 읽으면 다 자기 유익을 가로채는 도구로 쓰여지고 맙니다. 화평케 하면 복 받고 화평케 하면 하나님을 본다, 이렇게 읽으면 되지 않고 이것이 감탄문이라고 했죠? ‘화평케 하는 복된 자여,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을 수 있죠? ‘화평케 하는 자는 참 복되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읽을 수 있지요?
여기 팔복은 교회를 이루고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성격이라고 했지요? 성도가 이 땅에 살면서 갖는 현상, 반응이 팔복입니다. 처음 네 가지 복은 수동적으로 나타나는 것, 사람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이렇게 네 가지는 다 소극적인 것, 우리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선언한 것입니다. 그다음 다섯 번째는 능동적이고 사회적인 면을 선언한 것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 자신도 물론 하나님 앞에 긍휼이 여김을 받아야 하지만 또 남에게도 긍휼의 여기는 마음이니까 능동적이고 사회적인 면이지요? 그리고 여섯째, 마음이 청결한 것, 이건 단지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두 마음이 아닌 단 마음. 단 마음을 가진 성도가 하나님을 본다고 했는데, 그런 단 마음을 가진 자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두 마음을 가지고 대하지 않지요? 두 가지 마음이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하기 어렵죠? 그러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도 사회적이지요? 그리고 일곱째, 화평케 하는 자, 이것도 능동적이고 사회적인 면을 말하지요? 오늘 배울 내용입니다.
화평이란? 사전적으로는 ‘마음이 평안함’이라 할 수 있죠? ‘화평’ 혹은 ‘평안’, ‘평강’이란 말인데, “화평케 하는 자”라고 했으니까 ‘화목하게 하는 자’를 말하지요? 마음이 평안한 상태 그대로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평안을 옆 사람에게 끼치고 사회에 끼치는 것을 말합니다. 피스메이커(peacemaker)를 말하지요?
○거짓 평화 -평화주의자
그러면 “화평케 하는 자” 즉 평화주의자가 복이 있다는 말인가? 얼마 전에 교황이 다녀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주장하니까 평화케 하는 자로 추앙하니까 교황이 화평케 하는 자인가? 교황이 평화주의자입니까? 화평케 하는 자인가요? 여기서 말하는 건 그런 정도의 말이 아니죠? 산상수훈의 말씀 자체가 타 종교에서나 할 수 있는 또 혹은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새 생명을 가진 신자가 갖는 성격이나 반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갖는 현상이나 성격이 팔복입니다. 일차적으로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지체 지체들의 연합체가 화평주의자란 말입니다. 개체가 무슨 평화주의자 혹은 도덕군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연합한 교회가 평화주의자라는 것입니다. 몇 명이든지 그 연합된 한 사람으로 평화주의자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체로 놓고 보면 실제로 그렇습니까? 우리 자신을 보면, 나 자신을 보면 그렇지 못한 면이 많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평화를 꾀하고 간구하지만 때로는 평화를 깨뜨리는 모습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즉 새 생명을 발휘할 때는 평화를 꾀하나 어떤 경우는 내 안에 육신이 나와서 평화를 확 깨트려 버립니다.
이사야 48:22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합니다. 여기 악인은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불신자들을 말하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안에 있는 불신자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자, 그래서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자, 그 역시 ‘악인’이고 악인이면 평강이 없지요?
이사야 59:8에도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여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하는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성도들입니다. 이 구약 성도들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죄 가운데 처한 관계로 평강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또 예레미야 6:14에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평강이 없으면서 스스로 평강하다, 하는 것은 위장이지요? 죄악 가운데 떨어진 유다 백성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거짓 선지자들이 ‘너희들은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나님이 보호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니 평안하다’ 하고 외치는 겁니다. 또 예레미야 8:11에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똑같은 말인데요, 악을 행하는 성도가 부족할 것이 없다, 하고 평강할 것이라고 헛된 확신만 심어주는 것입니다. 이게 앞장서서 거짓 선지자들이 그랬습니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너희들 잘 될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으니까, 성도니까 잘 될 것이다’ 하면서 그릇된 확신만 자꾸 집어넣어 주는데 이게 거짓된 평화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잘됩니다.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으니까 복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긍정적인 면만 자꾸 심어주면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보고 앞에서도 이렇게 말했는데 에스겔 선지자도 7:25에 “패망이 이르리니 그들이 평강을 구하여도 없을 것이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평안을 구하여도 없을 것이라 합니다. 거짓된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거짓 선지자는 성도를 자꾸 유혹하여 ‘평강하다’ 합니다. 평강이 없는데 평화롭다 합니다. 이렇게 평화를 구해도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평화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런 거짓 선생들에 의해서 유혹에 넘어가는 성도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일은 어느 시대에나 있습니다. 희망을 말하고, 죄가 있는데도 그것을 덮고 놓고 ‘평화가 올 것이다. 우리는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쪽으로 몰고 갑니다. 이런 일이 어느 시대에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구약 성도를 놓고 한 말인데, 오늘 날에도 성도라 할지라도 거짓된 평화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으로 죄를 덮고 가자’ 하면 거짓된 평강에 빠지죠? 우리도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죄를 덮어두고 서로 상처가 안 되는 선에서 사이좋게 지내고 가자, 하기 쉽습니다. 구약 백성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화평케 못하는 근본 원인은 하나님을 가로막고 있는 죄 때문이죠? 죄악의 담이 가로막고 있는 한 성도라도 화평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죄인데, 이 죄를 인간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백방으로 노력해도 사람 스스로는 죄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극단의 조치를 취해주셨죠?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우리가 아무리 슬로건을 내걸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운동을 해도 우리 사이에 서로가 화목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시작을 해야 하죠? 교회 신앙생활의 시작은 나의 힘으로는 못한다는 데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죠?
○평강의 왕 예수
한곳을 찾아보지요. 이사야 9장입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오실 것을 염두에 두고 예고한 말씀인데요, 이사야 9:6부터 보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여기 “평강의 왕”이라고 하지요? 이 말씀이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염두에 두고 예고한 말씀이니까 예수님께서 “평강의 왕”이라는 말이지요? 7절에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평화는 예수님 자신이고 또한 여호와께서 ‘평화를 이루는 분’이라고 하시죠? “여호와의 열심이” 평화를 이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평화 자체이시고 하나님께서 평화를 이루십니다. 사람 스스로, 평화주의로 이룰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으로 가서 “화평케 하는 자”란 첫째, 예수님 자신이란 말이죠? “화평케 하는 자”란 ‘에이레네 포이오스’ 헬라어 단어인데 “화평” ‘에이레네’인데, 이 단어와 똑같은 단어가 골로새서 1장에 나옵니다. 얼른 한번 찾아보지요. 골로새서 1장입니다. 20절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여기 ‘화평’이 똑같은 단어입니다)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내세워서 하늘과 땅의 만물까지도 자신과 화해시켜 주셨죠? 즉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평화를 이루시는 분인데, 예수님을 앞세워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게 하셔서 우리가 주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화평이시지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내세워서 자신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화평이고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화평은 예수님이신데, 그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도록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화평케 하는 자”는 첫째, 예수님 자신입니다.
한곳을 더 찾아보지요. 로마서 3장입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 앞에 말씀하는 바울의 편지인데, 로마서 3:23~26까지 같이 읽죠.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 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5절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하죠? 화목제는 구약의 제사인데요, 양이 희생됨으로써 죄인들이 하나님 앞인 성소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그 화목제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26절 끝에는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를 굳게 믿고 연합이 되면, 교회에 속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회복됩니다.
○화평케 하려면?
이렇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연합한 자들과 교회를 형성하여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신 선언은 우리 성도를 가리켜서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 된 자들이기 때문에 ‘너희는 화평케 하는 자다’ 하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적으로 결합했으니까 우리에게도 ‘너희들은 화평케 하는 자다’ 하고 선언하십니다. 그럼 우리가, 교회의 성도인 우리가 어떻게 화평할 수 있습니까? 화평주의자들처럼 ‘우리 예수 믿으니까 화평하자, 화평하자’ 하고 운동을 하면 안 되죠? 결국은 거짓 평안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가 될 뿐입니다. 참 선지자, 참 평화를 주는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칫하면 우리가 거짓 선지자들처럼 될 텐데 그래서 거짓 평화를 전하는 자가 될 텐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화평케 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적으로 연합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화평케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늘 굳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례 받을 때 한번 굳게 믿고 말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례를 받았으면, 이제 연합했으면 끝임 없이 연합해 실질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한번 찾아보시지요. 갈라디아서 2:20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죽은 거지요?)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의 존재는 십자가에 꽝꽝 못 박아버린 상태, 이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 이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음 안에서 사는 자가 화평케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나의 육신은 없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니까 나의 본성은 없는 거나 다름없죠? 그리스도 안에서 삽니다. 나의 본성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나 그러나 우리가 완전한 육체의 죽음에 이를 때까지는 이 본성이 남아있죠? 아직도 여전히 육신의 본성이 움직이고 주님과 반목하는 데로 끌고 가려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굳게 믿는 믿음이 현재적으로 늘 요구됩니다. ‘나 그리스도를 믿으니까 천당’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뭐냐? 현재적으로 실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핵심은 전부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는 생활 뿐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도식화되어 있는데 그리스도와 신령하게 연합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신령하게 연결되어 있는 현실이 뭡니까? 현실은 참 교회에 속하여 지체로, 분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5:10~11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것이 화평이죠?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언제 여실히 나타납니까?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언제 구현됩니까? 예배 때이죠? 화평케 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현실은 주님 앞에 연합한 지체들의 연합체가 주님 앞에 예배드리는 이 현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거죠?
○평화의 직책
한 곳을 또 찾아보죠. 고린도후서 5장입니다. 고린도교회 앞에 보낸 서신인데,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과 분쟁을 일삼는 고린도 교인들을 바로 잡기 위하여 바울이 평화의 직책을 말하는데, 5:17~20까지 읽겠습니다.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8)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18절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 하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합니다. 여기 바울이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는 핵심이 ‘죄’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것 자체가 죄인데, 그 죄를,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건 그냥 추상적인 것이 아니죠?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로 보면 ‘교회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또한 화목 하는 직책을 받은 우리끼리 화목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에게 주님께서 화목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물건을 주듯이 ‘너는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 있어’ 하고 물건을 주듯이 주면 물건을 딱 받아서 우리가 화목해야지, 화목해야지 화평주의자들처럼, 교황처럼, 화목해야지 이런 얘기가 아니죠?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화평케 하는 자와 연결이 되어 있는 우리이니까 자연스럽게 화평케 하는 수족들입니다. 이것을 놓고 너희는 화평케 하는 자다, 하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쓰라고 주신 직책입니까? 말할 것 없이 우리 이웃과 화목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화목하지 못하는 고린도 교인을 향한 말씀인데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과 화목해야 합니다. 이 말은 여타의 종교에서 말하는 것, 또 인도주의자들이 말하는, 화목해야 한다는 것과 다르죠? 말을 이렇게 골라서 써야합니다. 여기 이웃은 바로 교회 형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 하나님과 화목한 성도들끼리는 생명까지도 함께 하기 때문에 이미 화목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육체의 본성은 끊임없이 나 중심으로 돌아서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현실 속에서도 나 중심적으로 돌아서서 이 말씀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나 중심해서 생각하고 말기 때문에 화평할 수 없습니다. 분열이 됩니다. 그래서 화목 하는 직책을 발휘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끼리도 때때로 화목을 깨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바울이 말하는 첫 당사자, 고린도교회도 성도지만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20절에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데 ‘너희들끼리 화목 하라’는 말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 하라”는 말씀은 ‘너희끼리는 백날 해봐도 화목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입니다. 즉 “하나님과 화목 하라!”는 것은 ‘너희들 힘으로는 절대 화목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 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분열의 해결점은 바로 하나님과 화목 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끼리 화목하려면 먼저 하나님과 결격 사유가 없이 여지를 두지 않고 화목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굳게 믿는 실질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굳게 믿는 믿음이 아니면 상호간에 화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화목의 직책을 발휘할 때 첫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이웃을 살피고 그 믿음의 자양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도는 늘 주님 앞에 나아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에 믿음이 자꾸 회복됩니다. 향상이 됩니다. ‘그래, 주님을 굳게 믿고 가자!’ 하고 회복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상호 회복되고 화평합니다. 그러니까 예배에 나아오면, 주님 앞에 나아오면 우리끼리도 자연히 화목한 관계가 됩니다. 사실은 주님 앞에서 나아와서 예배할 때만큼 일치하고 화목할 때가 어디에 있습니까.
또 하나 그러면 결국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끼리만 화목하고 만다는 말인가? 사실입니다. 불신자는 아예 위로 하나님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할 길이 없잖습니까? 그럼 불신자와는 도무지 화목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화목 하는 직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불신자와도 화목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이 상호 화목하려면 결국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됨으로 불신자와도 화목 하는 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위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화목의 직책을 수행하는 첫째입니다. 화목 하는 직책을 수행하는 일차의 일은 신자들끼리, 교회가 일치하는 것이고 이것은 내면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보다 외면적으로는 불신자에게도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 하는 데서 참 평강이 오기 때문에 불신자에게도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잘 지내야 합니다. 불신자들과도 잘 지내야 하고 평강을 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거짓된 평강에 속아서 살기 때문에 그것을 탈피할 수 있도록 잘 지내면서 기회 있는 대로 화목 하는 진리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 하는 데서 평화할 수 있음을 전하기 위하여 친밀하게 지내야 합니다. 우리의 원수까지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화목의 직책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2에서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중매하여 약혼한 관계이죠?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면 혼인 잔치가 이루어집니다. 이런 비밀을 우리가 널리 전하여서 사람들을 예수님께 중매할 수 있어야 하죠. 처녀 총각만 중매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예수님께 중매하는 직책을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평화와 하늘의 평화는 전혀 다르지요? 이 세상의 평화는 평화주의자들,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고 마는 위장된 평화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그것마저도 없으면, 인도주의 사랑, 평화, 평화주의자들마저 인정을 받지 않고 없으면 이 세상은 존재 자체가 없어지죠?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평화는 평화주의자들이 여타에서 말하는, 여타 종교에서 말하는 평화가 아닙니다. 전혀 다른 거죠? 그런 것들은 사람의 작품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의 평화는 사람 자기는 점점 사그라지고, 자기 육체의 악한 본성은 점차 없어지고 힘을 못 쓰는 현장인데, 거기에서 하나님과 화평하고 이웃과도 평화 하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평화이지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음
그다음 본문에 “(9)화평케 하는 자는....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직책을 수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워진다’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은 유일하게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우리를 포로로 잡아서 자기에게 신령하게 연합하여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덕에 의해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굳게 믿고 교회에 연합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여기서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화평케 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이냐? 그러면 화평케 하는 자이구나!’ 그 말입니다. 당연하니까 당연한 모습을 갖춰가야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과연 ‘너는 하나님의 자녀구나, 하나님을 믿는 신자구나’ 하는 일컬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지만 어떤 경우엔 ‘저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인가?’ 의문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본질상 주님의 자녀로서 변동은 없으나 주님 안에 거하여 살지 않고 불신자 같이 살면 누가 ‘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답다!’ 하겠습니까? 주님을 순종하고 믿음을 굳게 하고 순종하고 가는 사람을 ‘과연 하나님의 자녀다’ 하죠? 그러나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고자 하는 자를 누가 하나님의 아들답다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은 성도인 우리의 ‘삶’을 돌아보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일컬음을 받을 것”이란 말은 수동태인데, 내가 일컫는 게 아니고 남들이 일컬어주는 말입니다. ‘아, 저 사람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구나’ 하는 것입니다. 이 일컬음을 받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는 참된 평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평화가 있습니다. 위로 하나님과 화목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위로 하나님과 화목하면 참된 평화가 찾아오고 그런 사람과 상호 화평케 됩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성장해가야 하죠? 그래서 누가 보아도 ‘저, 사람들 참 평화롭다’ 할 수 있어야 하겠죠? 또 적극적으로는 밖으로 나가서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참된 평화는 위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고 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잘 전하는 자가 평화주의자입니다.
○기 도
자비하신 주님, 저희는 상호간에 단 두 사람도 화평할 수 없는 죄인이옵나이다. 주님 앞에 가로막아 놓은 죄 때문에 주님과도 화목할 수 없고 저희 상호간에도 평화할 수 없는 이런 악한 상황에 빠진 저희를 항상 건지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자녀로 삼으시오니 감사하옵나이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 순종하고 살고자 하는 저희들에게 화목 하는 직책을 주셔서 저희가 참 책임 있게 삶을 살게 하심으로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는 불림을 받게 하시오니 감사하옵나이다. 하오나 때때로 저희는 연약하여 주님 앞에 불복하고 나 중심으로 돌아서서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있사오니 주님, 저희를 긍휼히 여기사 그런 죄에서 돌이키고 회개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주님 앞에서 저희가 항상 막힘이 없고 무엇이든지 주님 앞에서 다 버리고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으로부터 참된 화평을 찾아서 화평하게 하여 주시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화평케 하는 직책을 다 행할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교단 | 대한예수교 장로회 |
* 교회명 | 분당 하나로교회 |
* 담임목사 | 이상주 |
* 교회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120-2 성우빌딩(신한은행)5층 |
* 연락처 | http://www.hanarochu.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