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강해(제3강) 애통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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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ksk 작성일15-08-20 23:20 조회3,49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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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강
애통하는 자
마 5:1~12
오늘은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을 생각하겠습니다.
○“애통하는 자”란?
원어를 다시 번역하면 ‘복이 있도다! 애통하는 자여!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입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사람”이라고 한 것은 어떤 사람인가? 말 그대로 ‘몹시 슬픈 사람’ 혹은 슬픔 때문에 아주 ‘비통해 하는 사람’, ‘통곡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몹시 슬픈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하고 설교하십니다. 사람들은 보통 ‘웃으면 복이 온다’, ‘웃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역설적이기 때문에 당시 예수님께서 청중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시고, 무리의 관심을 집중시켰을 것입니다. ‘몹시 슬픈 사람이 복이 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관심을 집중했을 것입니다.
‘몹시 슬픈 사람’이 무슨 뜻일까요? ‘몹시 슬픈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당시에 이 설교를 듣던 청중들 중에 몹시 슬픈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일까요? 오늘날에도 몹시 슬픈 사람이 많지요?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 이상은 몹시 슬픈 일을 당합니다. 죄악 세상이기 때문에 이 땅을 사는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무슨 고통 때문에 슬퍼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서 슬퍼할 수도 있지요? 이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지 않습니까? 누구나 다 ‘생로병사’라는 것을 당하고 삽니다. 누구에게나 ‘인생고’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럼 그런 ‘인간고’에 시달려서 애통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인가? 인간고를 많이 받아서 큰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인가? 그런 공식이이라면 아마 이 세상에서 지지리도 고생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이론이 생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은 천국 백성이 당하는 고통입니다. 천국 백성이 아닌 사람이 당하는 애통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다 쓰는 용어를 빌려서 쓰신 것인데, 여기 ‘애통’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백성답게 사는 데서 오는 애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 때문에 몹시 슬픈 사람’을 뜻합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고 살면 행복하고, 복된 것만 있지 무슨 애통이 있느냐?’ 하겠지만 우리가 ‘천국’하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실지 예수님께서 참된 성도에게는 애통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시니까 있는 거죠? 사실을 말씀하는 겁니다. 믿음을 지키고 살기 때문에 환란이나 고난이 있고, 그것 때문에 몹시 슬픈 사람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구절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시편에 ‘주님의 가난한 자’에 대하여 자주 말씀하시는데, 하나님 때문에 가난하게 된 자를 가리키지요?
한곳을 찾아보지요.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데, 열왕기상 21장입니다. 열왕기상 21:2부터 좀 보겠습니다. “아합이 나봇에게 일러 가로되 네 포도원이 내 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물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이 탐이 나서 강제로 빼앗을 수 없으니까 ‘다른 밭하고 바꾸자’ 하고 제안합니다. 물론 가치로 보면 나봇이 손해될 것이 없는데, 그러나 그 포도원은 ‘조상의 기업’입니다. 3절에 말하는데,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 조상들이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올 때 하나님께서 골고루 분배해 주신 하나님의 땅이지요? 하나님의 땅이니까 하나님께서 ‘토지를 팔지 말라!’ 하고 금지해 놓으셨습니다(레 25:23). 그런 금지의 율법의 말씀이 있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 유익을 좇아서 왕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나봇은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왕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절을 당한 아합 왕은 밥도 먹지 않고 침상에 드러누워 애통했습니다. 4절을 보지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업을 왕께 줄 수 없다 함을 인하여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궁으로 돌아와서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이키고 식사를 아니하니.” 왕이 참으로 애통했지요? 아합의 애통한 모습을 본 아내 이세벨은 왕을 위하여 아주 간사한 꾀를 냈습니다. 쭉 내려가서 13절을 보지요. “때에 비류 두 사람이 들어와서 그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거를 지어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저를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고.” ‘비류 두 사람을 세워서’, 여기 “비류’란 ‘건달’을 말하는데, 그런 옳지 못한 건달 둘을 세워서 거짓 증거를 하게 했습니다. 합당한 증거를 확보하려면 증인 둘이 필요하니까 거짓 증인 둘을 세운 것입니다. 거짓 증거의 내용이 무엇이죠?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거죠? 하나님과 왕을 저주한 사람은 죽어 마땅합니다. 그래서 나봇은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이 사람이 주님의 가난한 사람이고 애통한 사람입니다.
애통한 경우로만 보면 아합 왕도 만만치 않았지요? 나봇의 밭을 얻지 못하니까 근심하고 침상에 드러누워서 식음을 전폐하면서 애통했습니다. 나봇도 애통한 사람이고 아합 왕도 애통한 사람입니다. 누가 진짜 애통한 사람이죠? 나봇이죠?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다가 죽음을 당한 나봇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의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 기대와 어긋나는 결과가 생길 때에 애통하죠?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크지 않습니까? 이것은 자기 욕망을 채우지 못할 때 나타나는 애통입니다. 아합 왕이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애통하면서 식음을 전폐한 것은 거짓 애통이죠? 이와 비슷하게 사무엘하 13:2에 보면 암논이 다말을 육체적으로 사랑했으나 어찌할 수 없어서 애통했습니다. 이런 애통이 다 거짓 애통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애통인가? 이것을 잘 분별해야 하지요? 같은 성도라도, 아합도 성도지요? 그런데 아합 왕 같이 거짓 애통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답시고 얼마든지 거짓 애통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말할 것도 없지요? 사람을 버젓이 옆에 앉혀놓고 거짓 애통을 하고 위로 받고자 하죠? 연기를 하지요? 연예인 같은 사람이 있어요.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슬픔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하는 사람’이란?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 성도는 이렇다!’ 하는 선언이죠. ‘진짜 성도는 이렇다! 애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은 예수를 안 믿으면 없는 것입니다. 혹은 가짜 신자로 살면 당하지 않을 슬픔입니다. 나봇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으면 애통하지 않아도 될 사람입니다. 안 죽을 사람이지요? 오히려 왕의 칭찬을 받고 더 값있는 밭을 받아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행보를 참 백성답게 당당히 걸어갔기 때문에 슬픔을 당했습니다. 그런 슬픔이 바로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하나님 나라를 적극적으로 행보해 나아가는 성도에게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걸음을 중단 없이 걷는 성도에게서 나오는 애통입니다. 느슨하거나 게으르거나 잔꾀를 부리거나 침체해 있는 성도에게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힘차게 주님의 거룩한 나라를 중단 없이 걷는 자에게 주님이 말씀하신 애통이 나옵니다.
물론 성도가 하나님 나라를 적극적으로 살지 못하고 죄를 지었을 경우도 괴로워하고 애통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도 물론 참 애통이죠? 또 같은 죄라도 주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욱 그 죄가 크게 느껴져서 심히 괴로워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입니다. 바울이 그랬죠? 교회를 아주 심하게 박해했는데, 줄기차게 박해를 하다가, 다메섹 도상까지 가서 박해를 하다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지요? 그래서 철저하게 회개를 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교회를 핍박한 그 죄를 회개하고 사함을 받아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 증거의 일을 하면서 더욱 큰 은혜와 깨달음 가운데 들어가니까 교회를 핍박했던 그 죄가 더 크게 느껴져서 나중에 죄인들 중에 최고의 죄인이라고 했지 않습니까?(딤전 1:15) 그런 경우도 주님께서 위로해 주실 참 애통이죠? 복된 자이지요?
○예수님의 슬픔
그러나 이런 죄와 상관없이도 하나님 나라의 그 영광의 나라를 정점으로 하고 쉬지 않고 걸어가는 데서 오는 어려움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대표적으로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천국 사역을 하실 때 죄가 없으신 분인데도 아주 슬퍼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한 곳을 찾아보지요? 누가복음 19장입니다. 누가복음 19:41부터 보시지요.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누가 울었다고 하지요? 그것은 나와 있지는 않지만 누가 울었을까요? 앞에서 예수님이 슬퍼하신 곳이 있다고 하고 찾아보자고 했죠?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이 한두 곳에 나오는데, 이곳이 처음입니다. 여기 “성을 보시고” 우셨다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애통하신 것’입니다. 몹시 비통하여 우셨는데, 특히 이 말씀을 하시기 바로 앞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송을 받으신 후에 우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송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셨는가? 찬송을 받으셨으니까 기뻐하셔야 할 텐데 비통해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다음 42절에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예루살렘 성을 보고 “너도” 하시면서 의인화 했는데, 예루살렘 성안에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성안에 사는 사람들은 평화의 길이 있는데도 눈이 가리어져 보지 못합니다. 참으로 암매했습니다.
43~44절을 다 같이 읽죠.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여기 무서운 말을 합니다. 심판을 말하는데요, 하나님 나라의 왕이요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이들은 암매하여 영접치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죽게 했지요? 그런 큰 죄악 때문에 그들을 멸망할 것입니다. 그 멸망의 일을 예수님께서 미리 예견하시고 앞으로 곧 올 예루살렘의 멸망, 하나님의 진노를 보시고 그 성을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원수들이 곧 닥치는 그날에는 사면에서 공격하여 너와 네 자녀들을 짓밟고,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메시아를 보내셨는데, 눈이 어두워서 알지 못했습니다. ‘암매하여 그 주님을 영접하여 참 평안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그 메시아를 결박해 죽게’했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돌 하나도 돌 위에 겹쳐 놓이지 않게 다 망하겠구나!’ 하시면서 우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읍의 장래를 보시고 애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있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애통하십니다(눅 13:24). 이것이 예수님의 애통입니다.
또 요한복음 11:35을 보면 나사로가 죽었는데, 그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이 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나사로가 비록 죽었지만 살리시면 되잖아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면 될 텐데 왜 그 죽음 앞에서 애통하셨을까요? 이유는 나사로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 자신을 따르던 마르다와 마리아 또 당시 유대인들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편견을 고집하고 앉아서 예수님을 냉혹히 논단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나 보자’하고 그것이 예수님의 가슴에 송곳을 꽂는 것 같은 아픔이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앙 앞에서 큰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철면피와 같은 그들을 생각하시면서 애통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 자신이 죽음을 앞두고 애통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5:7에 예수님의 죽음을 놓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은 통곡와 눈물로 주님께 간구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 앞에서 심히 애통했습니다.
그밖에 성령 하나님께서도 에베소서 4:30에서 ‘우리 때문에 근심한다’고 합니다. 성령도 근심하시고 또 성부 하나님께서도 근심하시고 애통하십니다. 시편 78:40에 보면, “저희가 광야에서 (즉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그를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고.”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매번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늘어놓았는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고 애통하셨습니다. 이사야 1:24에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렇게 예수님, 또 성령 하나님, 성부 하나님, 이 삼위 하나님께서 근심하시고 애통하십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
삼위 하나님께서 애통하시듯이 그분을 믿고 그분 안으로 연합된 성도 역시 하나님을 닮아서 애통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성도는 ‘애통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놓고 살아갈 때 그때마다 애통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힘차게 살아가기 때문에 애통이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합니다. 옳게 살고자 하기 때문에 이 세상 방식으로 사는 세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고 그 때문에 애통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교회를 지지하면서 사명을 수행하고 갈 때 애통이 뒤따릅니다. 참 신자에게는 반드시 애통이 있습니다. 이런 슬픔, 괴로움, 애통은 성숙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표시합니다.
한곳을 찾아보지요. 고린도후서 7장입니다. 고린도후서 7:8 다같이.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여기 바울이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합니다. 이때 쓴 편지는 바울이 주후 55년경에 고린도교회에 가슴 아픈 방문을 한 이후, 그 이듬해 봄쯤 디도 편으로 보낸 편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고린도전서가 아닌 분실된 편지인데,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지적하여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들추어서 쓴 편지이기 때문에 일명 ‘준엄한 편지’라고 합니다. 앞으로 쭉 가서 2:4에 보면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하고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과 죄악을 회개하지 못하는 암매를 보고 애통과 근심과 눈물로써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점들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면서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쓸 때 사도 역시 애통과 눈물로써 썼습니다. 이 준엄한 편지를 받은 교인들이 ‘아!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고 밝히 깨닫고 괴로움을 느끼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여기 9절에 말합니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보낸 ‘준엄한 편지’는 교인들에게 잠시 동안 근심을 안겨주었습니다. 애통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바울의 준엄한 편지를 받은 그들이 낙담하거나 좌절치 않고 절실히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 밑에 10절 다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바울의 그 애통하며 쓴 편지를 받고 괴로워하고 근심하게 되었으나 결국 회개의 열매를 얻었으니 하나님의 뜻대로 된 거죠?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근심을 통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룰 뿐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그릇된 데로 자꾸 가고 헛된 것을 좇아가는 것을 볼 때 애통하며 눈물로 편지를 썼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애통입니다. 바울의 ‘준엄한 편지’를 받은 고린도 교인들도 애통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참된 성도는 바울과 같은, 고린도 교인들과 같은 애통이 있습니다. 자기 죄를 발견하고 애통하는 데서부터 더 나아가면 사도와 같이 교회의 배교의 사실을 보고 애통해 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그릇된 길로 접어들 뿐 아니라 그것을 보고 돌이킬 줄 모르고 점점 더 어두운 골짜기로 들어가면 애통하는 것이 참 성도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또 주변의 교회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우리가 오전에 사사사기를 쭉 배우면서 생각 하실 만할 텐데요. 사사기의 내용을 잠깐 떠올려 볼까요? 사사기에서 크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도 그것을 살피지 않고 자기 의지대로 산 것입니다. 사사기에서 가르쳐주는 것이 그것이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있지만 그것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대신에 주변의 있는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원주민들로부터 지혜를 구함으로 그들의 神을 가까이 하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을 그들이 신을 섬기는 방식으로 섬김으로 혼합종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암매 가운데 처한 교회를 주님께서 심판하셨습니다. 그럴 때 나오미와 룻 같은 자들, 심판 중에 있는 그 상황에서도 참 성도는 있었죠? 나오미와 룻 같은 자, 보아스와 같은 참 성도는 그 교회의 시대상을 똑바로 보고 애통하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고 회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신국의 발자취를 뚜렷이 기록으로 남겼죠?
오늘 우리가 처한 교회의 현실을 보고 애통합니까? 우리나라 교회의 어두움과 배교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현실을 여러분 심판으로 생각합니까? 사사기를 보면서 오늘 우리 시대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교회적 현실은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성도라면 회개하면서 교회를 이룰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서 주님의 뜻을 묻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을 깨닫는 대로 교회를 이룰 것입니다. 이런 심정을 가지는 성도라면 애통이 있습니다. 그런 자가 복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위로
애통하는 사람이 왜 복된가요? 뒤에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 주님께서, 예수님께서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여기 위로는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고 위로 ‘하나님’에게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비록 위로해 주지 않을지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애통을 아시고 우리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십니다. 사람은 우리의 애통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나라 전진을 향해 힘써 살면서 오는 애통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애통을 다 아시고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이 주님의 위로가 바로 우리가 고백하는 요리문답의 ‘유일한 위로’입니다. 이 땅에서도 위로가 되고 죽어서까지 위로가 되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장차 우리는 이 땅의 사명을 다 수행하고 주님 앞에 이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위로는 이 땅에서부터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이 땅과 저 너머의 세상과 연결, 걸쳐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생에 걸쳐서 위로하실 자입니다. 죽음 저 너머에까지 영원히 우리를 위로할 분입니다. 물론 우리가 가만히 숨죽이고 살면 애통할 일도 없고 위로를 받을 일도 없습니다. 자기 욕심을 추구하면서 살고자 하면 주님의 애통은 더더욱 없을 것이고 주님의 위로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거슬러 말씀대로 살고자 하면 애통이 있습니다. 이런 자에게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나라의 행보에 발맞추어서 힘써 걸어가는 데서 오는 애통이 있으면 주님이 위로하십니다. 주님의 위로가 우리가 생각하는 위로와 다르지요?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고 싶으면 믿음으로 모든 삶을 추구하고 애통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적당하게 살고 내 편리한대로 사는데 무슨 위로가 있습니까? 모든 삶을 추구하고 애통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면 반드시 애통하게 됩니다. 그러나 좌절치 않는 것은 주님께서 위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한곳만 찾아볼까요?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데요. 고린도후서 1장입니다. 고린도후서 1:3~5 같이 읽지요.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바울의 고백이죠? 바울은 자기가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부를 때 “자비의 아버지시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합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듯이 나는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이다’ 합니다. ‘나는 다른 사도보다 일을 많이 했고 계시를 많이 받아서 일도 더 많이 하고 복음 전하는 일을 엄청나게 많이 했다!’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나는 아버지의 자비와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다, 진정 하나님께서 죄와 싸우면서 복음 전파 사역을 하는 이 어려움 가운데 있는 나에게 모든 위로를 내려 주셔야만 내가 맡겨 주신 일을 감당할 수 있다’ 하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자비의 아버지다” 합니다. ‘자비의 아버지시다’ 하는 데서 모든 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위로, 자비의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자가 주님의 위로 가운데 있을 것이고, 주님의 위로를 받고 살아가는 참 성도가 이웃을 참되게 위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주님의 위로를 받을 자입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아서 우리 형제를 위로하면서 교회를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기 도
자비하신 주님, 주님께서 저희가 이 땅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애통이 있고 참 애통하는 자가 복된 자라고 하시옵나이다. 주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이옵나이다. 주님께서는 자비하셔서 저희를 위로하시옵나이다. 잠시 있다가 없어질 세상의 위로가 아니라 영원한 위로를 주시는 주님이시옵나이다. 이 위로 가운데서 저희는 주님의 복음 사역을 감당하고, 중단 없이 주의 사명을 행할 수 있사옵나이다. 또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살고 힘쓸 때 애통하게 되고 이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주어질 것이옵나이다.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또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애통하는 자를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또한 저희가 그 위로 가운데서 서로에게도 위로하는 참된 성도가 되게 해 주실 것이옵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교단 | 대한예수교 장로회 |
* 교회명 | 분당 하나로교회 |
* 담임목사 | 이상주 |
* 교회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120-2 성우빌딩(신한은행)5층 |
* 연락처 | http://www.hanarochu.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