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본문
한국교회에 엘리야 외에 깨어있는 7,000명과 같은 목회자들이 있다니 다행이다
지난날 세기에 자타가 공인하는 위대한 설교자 마틴 로이드 죤즈 목사는 젊은 사람들이 설교에 대하여 말하려고 할 때마다 아연실색할 따름이라고 그의 '목사와 설교'라는 책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일은 한국교회를 위하여 필요한 일이다.
1. 목회자의 자질 문제
결국 소명받지 못한 사람이 목회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 원초적인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사람이 필요한데 사람이 없다. 설교자는 많지만 설교가 없다. 강단에서 본문을 빌미삼아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나 자기가 읽은 책 이야기 실컷 하고 어떻게 살아라, 무엇을 해라 하는 식으로 결론 맺는다. 실상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참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한 언급은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교회에 맹종하는 사람을 만들 것인가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다.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애초에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설교자가 되기에, 참된 복음의 기갈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2. 청중의 수준 문제
한국 평신도들의 수준은 딱 기독교를 기복신앙으로 만들기 좋은 상태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존재한다. 그리고 목회계에도 성공이나 지성주의나 간판의식이 그대로 스며들어 소위 대형교회의 성공한 목회자에 대하여 거의 신앙적인 과신을 하고 있다. 뵈레아 사람들처럼 정말로 그러한가 하여 상고하는 태도가 아쉽다. 교회사 속에서 검증되고 입증된 칼빈이나 스펄젼, 로이드 죤즈 목사나 청교도들에 대한 깊은 독서를 통한 메시지의 분별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다.
3. 해석이 없는 설교
설교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본문에 대한 해석에서 출발한다. 바른 해석을 통하여 바른 적용이 가능하다. 단적으로 말하여 깊은 성경 해석이 없다. 듣기 좋은 소리, 누구나 그렇다고 생각하는 소리, 성경적인 구호의 나열, 읏싸 읏싸 운동권의 선동, 매우 피상적이고도 애매모호한 성경 해석의 결과로 말미암아 사실상 성경의 진리나 기준 자체를 철저히 인본주의적으로 낮추는 결과가 연출되고 말았다. 그리고 마치 교회의 강단이나 설교자는 성역의 대상인 양, 언급하는 것 자체를 불경스러운 일로 간주해 버린다. 한 설교자는 달란트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이나 삶, 사상, 메시지의 균형과 조화에 있어서도 철저히 검증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
4. 누가 그리스도인인가?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가 실종되었다. 예수 믿고 천국 가면 그만이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든, 무엇을 믿든 중요치 않다.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가 믿고 천국 가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그것은 구원의 결과이다) 우리의 악한 성품, 죄악된 본성, 더러운 습관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성결한 삶, 구별된 언어 생활, 사랑의 실천, 자기 부인, 자아에 대한 바른 인식, 참된 겸손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화 없이는 칭의는 없는 것이다. 교회 출석만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이는 풍토나, 믿는 것만으로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는 신앙지상주의가 개선되지 않는 한 강단 개혁의 길은 요원하다.
5. 누가 샘플링이 될 것인가?
아쉽게도 지금까지 한국교회 강단의 현실은 이렇다 할 설교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불행히도 부득이하게 우리는 다른 나라의 설교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더 이상 은혜, 덕을 세우는 일 운운하며 목회자나 설교나 강단을 문제시 삼지 않는 풍토는 시급히 개선되어야 한다. 그러한 면에서 의 전병욱 목사 비판은 시대의 요청이요, 용감한 결단이다. 전병욱 목사의 설교는 복음에 대한 것만 있지, 복음 자체는 없다.
6. 시간을 주어야 한다.
목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설교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그리고 많은 번잡한 일들로부터 목회자가 스스로 자신을 격리시키고, 교회도 이를 배려해야 한다. 연구와 독서와 기도가 없는 강단이 메마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교인 탓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계의 현실만 비판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는 설교자를 키워야 한다.
7. 신학교가 바뀌어야 한다.
현 신학교의 커리큘럼으로는 바른 설교를 할 수 없는 사람을 배출하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다. 고전이나 입증된 설교자에 대한 연구 없이는 바른 진리에 대한 인식이나 분별력을 기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학교의 무능함은 강단의 척박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8.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교계 내에도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나와 생각이 다를 수가 있어도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틀리다고 하는 의식이 바뀌어져야 한다. 또 교권이라는 무자비한 권력으로 바른 언론이나 개혁의 소리를 무참하게 짓밟는 일이 중지되어야 한다.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인데, 거기에 쌍심지를 켜고 죽이기라도 할 듯이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는 저급한 교인들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
9. 목회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왜 개척교회가 생겨나는가? 무분별한 신학생의 수용과 배출, 철저히 인맥적이고 지역적인 교회 분할, 뿌리깊은 교회와 총회와 신학교의 불합리와 부정의 관행, 능력있고 실력있는 목회자가 마음놓고 일할 수 있는 풍토, 사치하지 않으면서도 생계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의 조성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10. 모두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목회자는 근본적으로 설교자여야 한다. 또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어야 한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진리를 누가 전하지 못하는가? 해석 없이 요청만 할 것이 아니라, 본문이 의도하는 바에 대한 철저한 씨름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을 위해 목회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항상 듣는 말을 보다 세련되고 호소력있게 한다 한들 무엇이 더한 것인가? 본문 자체가 말하는 것에 대한 모두의 관심이 필요하며, 설교 자체에 대한 높은 기준과 기대가 있어야 한다. 또 전도의 미련한 것(이것은 분명히 설교를 두고 한 말씀이다)을 통하여 지금도 자신의 백성들을 빼내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확신하고, 모든 목회자는 설교에 승부를 걸어야만 한다. 가장 대중적인 설교자가 가장 해로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모든 교인들은 새겨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단의 시장 전략에 있어서 사단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곳은 다름아닌 교회의 강단이기 때문이다. 사단은 자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회심하지 않은 설교자를 통하여 자신의 씨앗을 뿌리고, 그것에 호응하는 무지몽매한 수만의 청중들을 키워 자신의 뜻을 성취하고 있다. 설교야말로 한국교회가 직면한 최대의 위기요 문제이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와 평신도들은 이러한 현실의식과 위기의식조차도 갖지 못하고, 참으로 어리석게도 지금 이 시대에 설교를 못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러한 어리석은 질문은 칼빈이나 스펄젼이나 마틴 로이드 죤즈의 설교집을 드는 순간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 전체가 시급히 요청하고 있는 것은 참된 설교요, 기름부은 받은 설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