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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때문에 망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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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부채 때문에 망한 교회 이야기

1) 개요
담임 목사 : 나이 36세
장로 : 없음
교단 : 장로교회
설립 연도 : 1970년대 후반 개척 2년 차
성도 수 : 약 50-70명
교회 건물 : 성전
주차장 : 없음
위치 : 서울 강서구 목동

2) 상황
여기서 말하려는 일들은 내가 36살 되던 해에 일어난 일이고, 목사 안수를 받고 7년째 되던 해에 두 교회를 거처 새로이 교회를 개척한 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우리 교회가 이곳 목동에 개척을 시작한 것은 일년이 조금 넘었다. 우리 부부는 목동 고개 초등학교 근처의 17평 짜리 홀을 얻어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다행이 여기 저기서 성도들이 모이고 옛날 시골에서 함께 살던 이웃들과 친구들이 모여 단란한 교회를 이루게 되었다. 교회는 그런 대로 재미가 있었다. 약간씩 저축도 할 수 있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실 축복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부풀어 있었고 주일에 모이면 지난주간에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축복을 서로 확인해 보는 시간을 가지곤 했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눈에 띄게, 손에 잡히게 뚜렷한 축복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늘 약간 과장된 어조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말하고 함께 즐거운 듯 웃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같은 동네에서 목회를 아주 잘하는 친구 목사가 나를 찾아 왔다. 그는 자기 교회가 성장해서 옆에 큰 성전 공사를 하게 되었는데 우리에게 자기 교회 성전을 매입하라고 권했다. 그는 성전을 건축하는데 자금이 딸려 받을 수 있는 값을 모두 받지 않고 싼값으로 쓰던 성전을 우리 교회에 팔았고 성전 구입 대금도 상당한 기간을 두고 지불하기로 해 주었다. 성전은 대지 80여평에 약 60평 정도의 성전이었으며 조그마한 사택까지 있었고 마당도 좀 있었다.
나는 친구 목사의 제안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큰 축복의 응답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나는 지금의 목동이 앞으로 대 단지 아파트가 들어 설 것이라는 말을 누구에게 듣고 잘 있던 전농동의 교회(참조 : 전농동의 교회에서 성전이 있는 교회로 3년 동안 시무 했었는데 성도가 150명 정도 모인 좋은 교회였다. 나는 이 교회를 억지로 떠난 것을 평생 후회했다.)를 버리고 세계를 마음에 품은 젊은 목사로 이곳에 와서 교회를 개척했기 때문에 교회 개척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그 때 상황을 내가 써 출판한 '목사의 적 목회의 적' 1권의 195 페이지에 있는 '목사의 야망과 믿음 사이에 일어나는 착각'의 글로 대신한다.
[나는 우리 성도들에게 열정적으로 이 문제가 하나님의 축복임을 강조하는 설교를 했다.
"이제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축복하시기 위한 하나의 숙제를 주셨습니다. 성도가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은 더 할 수 없는 영광이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이 일이 결단코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 다 감사합시다.”
새벽에도 이 기도를 하고 낮 예배도, 밤 예배도 이 말을 했다. 말을 할수록 더욱 확신이 생겼다. 교회의 통장에는 그 건물을 매입하는데 필요한 금액의 20분의 1정도의 현금이 예금되어 있었으나 나는 그 금액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일이 어디 돈 가지고 되는 일인가? 산을 옮기는 믿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우리가 응답을 하면 하나님이 다 이루어 주실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했다. 성전을 매입하여 가득 모인 성도들과 은혜롭게 예배를 드리는 꿈을 꾸고 환상을 가졌다. 집에서 잠을 잘 수 없어서 나는 아내와 함께 날마다 상가 건물 이층에 있는 17평 짜리 우리 성전에 가서 잠을 자다가 일어나 기도를 하고 일어나 기도를 하다가 어느새 잠들곤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하고 설교를 했는데도 성도들의 반응은 기대한 것만큼 열정적이 아니고, 생각한 것만큼 적극적이 아니었다. 하루는 기도를 하는 중에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건축 헌금을 작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목사란 모름지기 성도들이 축복을 받을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잃지 않고 축복을 받도록 성도들을 인도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자 내 머리 속에는 순식간에 몇 사람되지 않는 성도들의 형편을 따라 헌금 액수가 정해졌다. 그 금액들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를 기초로 한 것이었다. 나는 그 금액들을 정성스럽게 목회 일지에 기록했다. 역사적인 기록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리고 그 금액들 옆에 그들이 드린 헌금으로 인해 받을 하나님의 축복의 액수도 기록하였다. 그 액수는 대개 하나님께 드린 것의 100배가 계산된 금액이었다. 나는 이 금액을 기록한 후에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는 하나님께 이 금액대로 드리고 축복을 받을 것을 확신하는 기도였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 이런 내 생각을 비웃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청년 목사인 나는 절대 웃지 아니했을 뿐 아니라, 일생에 가장 큰 믿음으로 이 일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나는 오늘에 와서 이런 생각과 행동이 믿음이 아니라 목사의 탐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요, 하나님의 응답이 아닌 내 생각이요, 기대요 상상이요 욕심이었던 것을 그렇게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큰 믿음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그렇게 며칠 동안 기도를 하는데 조급증이 나서 더 이상 기도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성도들은 개별적으로 면담을 했다.
“김집사님, 내가 집사님을 위해 기도를 하다 보니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
“집사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300만원입니다. 어때요. 할만하지요?”
목사가 개인적으로 불러 이렇게 말하는데 어떤 집사가 아니라고 말할 것인가? 김집사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해야지요.”
이런 식으로 몇 안 되는 모든 성도들에게 작정을 시키니 60평 짜리 성전을 매입하는데 넉넉한 금액이 작정되었다. 나는 다음 주일 설교에 이 일을 이렇게 말했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흡족하게 건축 헌금을 작정하셨고 우리 믿음에 대해 하나님은 만족하도록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 축복은 쏟아 부어 주시는 축복을 우리 모두에게 가져 올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되는 저금을 털어 친구의 성전을 계약했다. 성도들이 약속한 작정 헌금을 틀림없이 봉헌하리라는 철석같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금액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내 요구에 응답을 하지 못했다. 하고 싶어도 사는 것이 힘들어 그 요구를 수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과는 뻔했다. 성도들은 크게 시험이 들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을 터무니없이 매도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순수하고 진실한 내 충성심을 헤아려 따라오지 못하는 성도들의 믿음 없음을 개탄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중단할 수는 없었다. 사채와 상호신용 금고에서 많은 빚을 얻어 중도금만 지불한 채 잔금을 약속하고 성전을 인수했다. 그리고 낡은 성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내 목회의 사활을 걸었다. 이제 아름다운 성전만 있으면 성도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까짓 부채쯤이야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성전을 수리하는데 인부를 살 형편이 되지 못해 나와 아내는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일했다. 그렇게 우리가 죽을 고생을 하며 불철주야 일하고 있는데도 성도들은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간식 한 가지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교회가 미어 터질 것이라는 확신 속에 열심히 일하고 일했다. 그렇게 한 달이 넘게 성전 수리를 하고 이제 주변을 다니며 열심히 전도를 하면서 몰려오는 성도들의 환상에 젖었다. 그러나 그 환상은 허상이었으며 공상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오지 않을 뿐 아니라 있던 성도들도 계속 교회를 떠날 궁리만 하고 있어서 내게 대한 불평과 불만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았다. 나는 점점 힘을 잃어 갔다. 스스로에 실망하고 우리들의 믿음과 정성을 몰라주시는 하나님께 실망했다.
이자를 제 때에 주지 못하자 돈을 빌려 준 사람들이 일어났다. 상호 신용 금고에서는 계속 빨간 편지가 와 우리를 압박했다. 이렇게 있다가는 애써 마련한 성전이 누군가에게 넘어 갈 것 같았다. 1년 반을 견디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어 근처에 있는 다른 교회에 성전을 넘겨주게 되었다. 나는 우리 성전을 매도하겠다는 교회와 계약을 하고 나머지 모든 일들을 불쌍한 아내에게 맡기고 친구와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왜 하나님의 일이 이렇게 망가져야 하는지를 한달 넘게 묻고 또 물었다. 한 달만에 주님의 응답이 있었다.
“네 욕심 때문에 성도를 희생시키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아름다운 색깔의 포장지에 곱게 포장된 나의 야망이요 허욕이었다. 그 탐욕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착각되어 과도한 요구를 성도들에게 강요했고, 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에 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난 약 10년 후에서야 그때 그 아픔과 고통의 원인들이 다른 사람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을 더욱 더 절실히 알게 되었다. 그 진상을 알고 고치기까지는 무려 10년이 더 걸렸으니 그 동안 목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은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얼마나 부끄러운 짓을 했는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장담을 하고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는지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도들은 목사의 기대와 상상과 허망한 탐욕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상처를 입고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하며 헌신하고 정들었던 교회를 떠나고, 그동안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모든 일에 대하여 감사하지 못하고, 목사의 요구에 응락하지 못한 자책감 속에서 스스로 죄인이 되어 고통을 당한다. 그때 상처받은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만나면 반드시 그때 그 일을 사과하고 용서를 받고 싶다. 하나님의 뜻과 목사의 착각된 믿음과 야망 사이에 고통스러워하는 성도들은 없는지 살피자. 아무리 목사가 하나님을 위해 큰 꿈을 가졌다고 해도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인격과 그 이상을 현실화 할 수 있는 자기 스스로 ‘죽음의 참된 헌신’이 없으면 그 모든 꿈들은 하나의 허영이요 야망이 될 뿐이다. 그리고 목사의 야망은 바로 성도들과 목사 자신과 가족들의 시련과 연단으로 이어지는 죄악인 것이다. 젊은 목사들은 목사의 야망을 버려야 할 것이다. 야망도 욕심이라는 죄다.]

이렇게 해서 36살에 개척하고 일년 만에 성전을 마련한 나는 세상 말로 하자면 망하고 말았다. 모든 것을 잃었다. 목사에게 생명 보다 더 귀한 성도들을 잃었고, 그렇게 고생 고생해서 수리한 성전도 잃었다. 친구도 잃었다. 돈을 빌려 준 고향 후배인 집사는 꾼 돈의 이자를 주지 못하자 아내에게 지독한 욕을 하고 우리를 영원히 떠나 버렸다. 당시 우리 교회 집사였던 동생 내외도 우리 식구들을 멀리했다. 그 때는 없었지만 지금 말로하면 나는 신용 불량자가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나에게 교회를 팔아먹고 산으로 도망친 못 쓸 하나님의 거짓 종으로 몰아 붙였다. 그렇게 나는 목사로서, 인간으로서, 가장으로서 최악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꼭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자살이라고 했으면 좋으련만 그러지도 못했다. 지옥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더 비겁하고 무책임한 놈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사력을 다해 교회를 섬겼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누구에게 사정도 열심히 하고, 심방도 열심히 하고, 설교 준비도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하고 가르쳤다. 무엇보다도 나는 정말 하나님을 확실히 잘 믿었다. 성전을 매입할 때도, 성도들에게 헌금을 작정시킬 때도, 성도들이 나를 떠날 때도 나는 하나님을 더 잘 믿었다. 이런 어려운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어떻게 숨을 쉴 수 있을까. 그래서 더욱 더 하나님께 매달리고, 소리소리 지르며 기도하고, 금식하고, 울면서 기도했다. 집에서 따뜻한 구들을 지고 잠을 잔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디찬 예배당 바닥에 무릎을 끓고 밤 세워 기도했다. 기도하다 잠이 들면 엄청나게 큰 뱀 꿈을 꾸었다. 많은 뱀들이 우리 교회 성전을 온통 차지하고 꿈틀대는 꿈을 자주 꾸었다. 누가 말해 주었다. 뱀은 돈을 말한다고---- 그런 꿈에 시달리다가 깜짝 놀래 꿈을 깨고 다시 소리 지르며 울며 기도를 했다. 아내도 나와 같이 고통을 당하며 기도했다. 오히려 아내의 괴로움은 나의 그것과 비교되지 않는 다른 괴로움이 더 있었다. 연약한 여자인데다 목사에게 못하는 성도들의 갖가지 못된 말들을 다 들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살림을 모두 꾸려 가야했고 정신 못 차리고 욕심만 많은 내 짜증과 신경질을 다 받아야만 했다.

드디어 나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모든 뒷일들을 불쌍한 아내에게 다 맡기고 친구 목사와 함께 지리산으로 도망을 쳤다. 산에 올라 간 우리는 땅이 꺼지고 하늘이 말려 가도록 소리 소리를 지르며 친구는 늘 이렇게 기도를 했다. "하나님,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능력과 권능과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옵소서. 말씀의 은혜로 총만 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만 위해 일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되어 버린 것입니까?" 나는 무엇이 잘못되어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고 거짓 없는 일편 단심의 충성심이 이렇게 비참하게 허물어져 버린 것인지, 하나님께 따지듯, 항의하듯 소리소리 지르며 기도를 했다. 끝없이 같은 질문을 하고 감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하나님의 어떤 손짓을 보려 신경을 곤두세우고, 한마디의 말씀이라도 들어 보려고 온 신경을 귀에 집중시키며 한 사간도 두시간도 세 시간도, 어떤 때는 다섯 시간이 넘게 같은 기도를 했다. 울며 기도하고, 땅을 치며 기도하고, 마루 바닥에 이마를 쾅쾅 찌어가며 기도를 했다.
소리 소리를 지르다 보면 혈압이 올라 눈앞이 깜깜해 지고 머리가 멍해졌다. 차라리 소리 질러 기도를 하다가 머리통이 터져 죽어 버려 죽어 버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우리들의 기도는 기도라기 보다는 차라리 발악이었다. 교회 일 때문에 기도를 하다 보면 어렸을 때 가난한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여 나 형제들에게 치어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번씩이나 퇴학을 맡고 방황했던 고통스러운 그 시절의 일들도 하나님께 따져 묻곤 했다. 흩어져 버린 성도들에 대한 생각도, 홀로 남아 그 어려운 일을 다 떠맡은 아내의 일도, 어린 자식들의 일도 큰 일이 아니였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살고 교회를 잘 해 보려고 날 밤을 세며 아내와 함께 성전을 떠나지 않고, 가난한 개척 교회 목사가 되어 길거리에서 주어다가 아이들의 옷을 입히고, 고기를 먹고 싶어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시장에서 명태 대가리와 닭대가리를 주어다가 끓여 먹이면서 오로지 교회 하나만을 위하여 온 가족이 생명을 바쳤는데, 이제 와서 이렇게 낭패와 실패를 당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하나님께 따지고 또 따져 물었다. 그리고 이제 지치고 힘이 없어 그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으니 나를 데려가 달라고 통곡하며 기도했다. 내게 있어서는 능력을 달라던지, 더 큰 은혜를 달라는 기도는 사치스러운 기도였다.
목이 찢어졌다. 피가 나왔다.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차라리 그렇게 되어 말을 할 수 없게 되여 버리면 목사를 그만 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아무런 일을 한들 처자식을 거지꼴로 먹을 것을 주어다 먹이는 짓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죽으라고 소리를 지르며 기도를 했다. 아니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병신이 되고 죽기를 위한 몸부림을 췄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소리 지름이다' 싶을 때 내게 놀라운 일이 생겼다. 그렇게 부어 오르고 통증이 심한 목이 갑자기 시원스럽게 뚫리면서 전혀 소리를 지른 데 지장이 없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어리석은 고집으로 하나님께 같은 기도를 하곤 했다. 그렇게 기도하고 목이 뚫리는 일이 세 번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안정이 찾아오고 기도가 정상 괘도를 찾기 시작을 했다. 산에 올라 가 한달 동안 기도를 한 후에 일이다.
그렇게 한 달을 기도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아 갈 무렵, 아침 기도에 나는 정말 내 영혼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남겨 두고 온 교회 처리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셨다는 확신이었다. 그 확신은 밝고 밝은 한줄기 가늘고 강력한 빛이 내 머리부터 발치까지 번개처럼 관통하면서 그렇게 답답하고 갑갑하던 내 심령이 한 순간 감기로 막힌 코가 시원스럽게 뚫리듯 뚫려지면서 오는 확신이었다.
나는 내가 받은 그 확신을 확인하기 위해 친구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나서 마음이 더욱 편안해 지고 한 달 동안 소리 지르며 항의의 기도 제목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기도가 되기 시작을 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달라는 기도를 하기 시작을 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교회를 하겠다는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그 확답을 얻은 일주일 후에 우리를 안내했던 목사님이 몇 가지 반찬과 먹을 것을 준비해 산에 올라 왔다. 그의 손에는 아내가 보낸 편지가 들려 있었다. 아내의 편지는 어쩐 일인지 무척 낯설어 보였다. 늘 함께 살며 자식을 낳고, 함께 고민하고 근심하며, 짜증을 내던 우리 사이가 아니라, 처음 친구의 소개로 만나 마냥 보고 싶고, 그립던 그 모습을 떠올리는 편지였다. 나는 아내의 훈기가 가득 배인 그 편지를 뜯어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정말 견딜 수 없는 감동과 감사를 했다. 그 감동과 감사는 아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것이었다. 내가 아침 기도 중에 우리들의 그 심각하고 많은 고민과 고통이 해결되었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 바로 그 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집을 이사했다는 내용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그 순간에 나에게 미리 그 소식을 알려 주시므로 내게 평안한 마음을 주신 것이다. 나는 한 달동안 목이 터지게 기도를 하며 하나님을 찾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우리 가족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한 달만에 좋은 소식으로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들을 견딜 수 없는 감동으로 벅차게 하신다. 1969년 가을에 내가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의 감동과 감격이 내 심령에 물밀 듯이 밀려 와 급히 기도원에 올라가 한없이 울고 울면서 회개를 하고 감사를 했다. 더욱이 아내의 편지에는 여름 방학이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와 함께 기도하겠다는 내용도 들어 있어서 더욱 더 고맙고 감사했다. 그렇게 해서 나와 친구는 6월에 산에 올라가 9월 중순에 산을 내려 왔다. 우리가 산을 내려 올 때 우리 숙소 마당에 자두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무겁도록 많이 열린 자두 열매가 탄저병에 걸려 썩어 가고 있었다.

3) 교회 개척과 성장을 실패한 원인
(1) 내 욕심 때문이다.
목사의 이상과 꿈은 흔히 믿음이라는 포장지에 포장된 허상일 수가 있다. 그것을 나는 거룩한 욕심, 또는 탐욕이라고 말한다. 욕심은 바라지 말아야할 것을 원하는 것, 자격도 없는 사람이 하고자 하는 큰 이상과 꿈들을 말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자격이라는 것은 세상 적인 자격을 말하지 않고 인격 즉 사람의 됨됨이인 그릇을 말한다. 그릇이 작은 사람,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지나치게 큰 거룩한 이상과 꿈은 욕심이다. 바울의 그릇 론의 핵심적인 교훈은 깨끗함이다. (딤후 2:20-21) 그러나 주님의 그릇에 대한 교훈은 작은 그릇과 큰그릇이다. 작은 일에 충성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진 종에게 많은 일을 맡기신다는 주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일을 맡을 수 있는 작고 큰 종의 차이점이며 그것은 인격의 성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마 25:21, 23; 눅 16:10) 그래서 지금은 주님의 일을 작게 하지만 장차 하나님의 평가에 따라 큰 일을 할 수도 있다는 아주 고무적이며 희망적인 말씀을 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큰 일을 바라고 기도하지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작은 일에 대한 충성과 자기 그릇, 즉 인격을 다듬고 키워야 한다.
어떻든 36살 때의 나는 60평 짜리 성전을 감당할만한 인격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그릇이 깨끗지 못했던, 아니면 너무 부족했던 간에 내 조그마한 인격으로 너무 크게 일을 벌렸고 결국 그것은 거룩한 욕심이 되어 실패를 하고 만 것이다. 욕심은 죄를 잉태하고 죄는 사망을 낳는다고 하셨다.(약 1:15) 그리고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하셨다. (골 3:5)
(2) 과도한 부채 때문이다.
감당할 수 없이 많은 부채를 얻었다. 그 때 우리 교회 성도는 모두 60여명이었는데 사는 것이 그렇게 넉넉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강제로 헌금을 작정시켰어도 작정한 헌금을 드릴 만한 여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오직 믿음으로 그것을 작정하게 했고 작정한 헌금을 바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줄 또 믿었다. 여기서 잠깐 믿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있고 자기 믿음이 있다. 전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믿는 믿음이고 후자는 자기 신념이나 희망 사항이다. 그런데 나는 내 희망 사항을 믿음으로 착각해서 큰 실수를 범한 것이다. 오늘도 많은 하나님의 종들과 자녀들이 자기의 희망을 믿음이라는 것으로 페인트칠을 하고 하나님께서 들어 주셔야한다고 강요하는 기도를 한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망 말이며 불경이다.
성전을 건축하는데 부채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돈을 빌리는데 반듯이 지켜야할 원칙이 있다. 성전 건축을 하고자 하는 목사들이 꼭 명심했으면 한다.
① 성도들이 드리는 헌금으로 교회 운영비를 쓰고 나머지 제정으로 이자를 감당할 만큼만 빚을 내야 한다. 그런데 이 점에서 목사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있다. 성전을 건축하면 성도들이 갑자기 늘어난다는 기대다. 옛날 그러니까 60년대나 70년대는 그런 현상이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을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기 보호 정신이 강하고 영리한 지금의 성도들은 새로 건축된 성전에 가면 헌금을 해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경계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므로 이런 기대를 하지말고 오히려 성도들이 줄어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돈을 빌려야 한다.  
② 가급적 성도들의 재산을 저당 잡혀 금융 기관의 융자를 받지 말라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 목사가 교회를 사임하든지 아니면 큰 시험에 빠질 우려가 있다. 돈을 빌리지 않았어도 재산을 담보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성도는 늘 걱정과 불안에 싸이거나 교회 내에서 자기의 발언권을 내 세우게 된다. 그래서 결국 목사를 걸고넘어지는 일이 생긴다. 성도의 재산을 담보했거든 이자를 정확한 날짜에 지불하고 가급적 빨리 풀어 주어야 한다. 이 일이 지연되면 될수록 불안 요소가 커진다.
③ 성전 건축을 위한 돈 빌리기를 목사가 먼저 발설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간절한 소원이 된다고 해도 목사가 앞장을 서서 성전 건축하자 하고 돈을 빌리자 하면 안 된다. 성도들 스스로 이 일을 하게 해야 한다. 이 일에 목사가 앞장을 서면 성도들은 관망하는 경우가 흔하고 즐거움으로 안하고 억지로 하면 성전 건축 후 목사를 쫓아낸다. 아무리 아름다운성전 건축을 해 놓았다고 해도 목사가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게 된다면 그 성전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목사 개인과 가족에게 무슨 유익이 될까?
④ 성전이 완공된 후 모자란 건축비에 대한 광고를 해서는 안 된다. 분당에 700억을 들여 지었다는 교회를 가 보았다. 정말 아름답게 유용하게 잘 지어 놓았다. 담임 목사는 말하면 모든 목사들이 다 아는 유명한 목사를 아버지로 둔 사람이다. 그런데 주보에 보니 모자란 건축 헌금을 3년 동안 작정해서 하라는 광고가 있다. 지금 우리 시대에 3년 동안 건축하려 하는 새로 등록한 성도가 몇 명이나 될까? 오히려 건축 헌금에 부담이 되어 등록을 망설이는 것은 아닐까?
다음 기회에 말하겠지만 우리 동네에 성남에서 이사 온 쾌 큰 교회가 있다. 이곳에 있었던 기도원 자리를 매입해서 큰 성전과 교육관과 편의 시설들을 잘 지었다. 그런데 그 교회도 건축에 무리를 해서 부채가 좀 많은 모양이었다. 주보에 은행 이자를 못내 어려우니 이자 헌금을 작정해야 한다는 광고가 있었다. 도심에서 좀 떨어지고, 원래 있었던 자리에서는 30분 이상 차를 타고 와야 하고, 주변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산 속에 있는 큰 교회가 은행 이자 헌금을 작정한다. 아무래도 성장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 보인다.
(3) 강요된 헌금 때문이다.
강요된 헌금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나에게 질려 버렸을 것이다. 개별적으로 불려 와 헌금을 강요 받은 즉시 그들은 교회를 떠날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성도의 헌신과 섬김은 그 나름대로의 달란트와 믿음의 분량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어린 아이에게나 어른에게 격에 맡는 일을 시키는 것과 같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무리한 건축 헌금 요구는 교회를 떠날 빌미를 제공해 주는 것과 같다.
(4) 성도들을 잘 몰랐다.
실제로 이렇게 헌금을 강요받고 우리 성도들은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거의 모두 교회를 떠나 버렸다. 고향이 같다는 것, 혈육을 나눈 형제라는 것, 나에게 전도 받고 은혜 받았다는 것, 우리가 중매해서 주례하고 가정을 이루도록 했다는 것, 나에게 세례 받았다는 것, 나와 특별한 어떤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는 모든 인간적인 조건들이 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런 인간 관계를 지나치게 의존했고 저들의 믿음을 너무 크게 생각했었다. 그것은 내가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 그들을 한 사람 한사람 만나 왜 교회를 개척해야 하는지를 잘 설명했고 그들은 우리가 함께 개척할 교회의 이상과 꿈에 동조하고 찬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도 하나님과 교회 사랑하는 마음이 나와 같을 것이라고 쉽게 믿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 후에도 이런 착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내가 쓴 "목사의 적"에 '목사의 교회 사랑과 성도의 교회 사랑은 다르다'는 글을 썼다. 목사는 교회가 영광이요 생명이며 세상사는 수단이요 삶의 터전이다. 그래서 교회를 위해서 무엇이던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삶의 수단은 세상에 있고 생활의 방편도 세상에 있다. 그것도 모르고 목사들은 목사와 같이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이런 강요을 성도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목사는 성도들에게 교회를 위한 헌신을 말하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점을 전혀 알지 못했다. 즉 성도들을 잘 모르고 목회를 하고 성전 건축 헌금을 강요한 것이다.
나는 지금 그들이 하나님과 나에게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시험들에게 한 내 탐욕을 자책하고 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난 것은 오로지 나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4) 성장 방안
(1) 이미 실패의 원인 분석에서 말했듯이 교회 성장이 성전 건축이라는 단순 계산이 잘못이었다. 그러므로 그렇게 터부니 없는 짓을 하지말고 17평 짜리 상가 건물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면서 때가 될 때까지 설교와 기도와 가르치기를 전심 전력해야 했다.
(2) 나의 목회 비젼이라고 이름지어진 거룩한 욕심의 진실을 깨닫고 작은 일에 충성하는 종이 되도록 내 인격과 믿음을 바로 세워야 했다. 그리고 설교하게 해 주신 하나님과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 감격하면서 엉뚱한 꿈을 꾸지 말아야 했다.
(3) 성전 건축을 할 수 있는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선전 건축에 대한 열망을 가지도록 믿음을 키워야 했다.
(4) 목사의 제일 주의를 경계하고 벗어야 했다. 우리 주변에 제일 교회가 많고 중앙 교회가 많다. 모두 그 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아주 오래되 교회들 가운데 이런 이름들이 있다. 그런데 이런 이름들은 모두 다른 주변 교회들과 상대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지고 중앙에 있는 교회라는 의미의 교회 이름이 지금도 목사들의 머리에 있다. 개척한 후 가장 먼저 성전을 건축하고 크게 부흥된 기적의 교회,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급성장한 교회를 목사들은 아주 선호한다. 과연 하나님께서도 그러실까? 30년 동안 목회를 한 후 내린 결론은 하나님께서는 제일교회나 중앙교회나 기적의 교회가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이 섬기는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 교회가 개척한 후 일년도 못되어 성전을 마련했다는 사실에 엄청난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었다. 그것이 나에게 고생의 떡이요 쓴 나물이라는 것을 그 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5) 성도들에게 즐거운 교회, 행복한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 쉼이 있고, 위로가 있는 교회, 떠나면 다시 오고 싶어지는 교회, 교회 뿐 아니라 우선 자기 개개인에게 희망과 소망을 주는 교회, 새 성도들에게 세상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펑안이 있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엉뚱하게 사업을 처음 시작한 집사의 개업 예배에 가서 모든 이익금을 교회 건축 헌금으로 바쳐야 한다고 설교하고 기도를 했으니 그들의 바라는 것과 나의 기대가 너무 먼 것이다.

결론
교회 성장과 실패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는 성도들에게 전혀 있지 않다. 백번 천번을 생각해도 목사에게 있다. 그러므로 교회 성장의 유무에 대하여 가장 기본적으로 목사인 자신을 깊이 생각해 보라. 아무리 기도하고 반성하고 후회해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거든 나처럼 지리산에 가던지 아니면 목회에 연륜이 깊은 선배 목사에게 물어 보라. 아니면 목회 진단 프로그램을 이용해 보라. 한번 두 번 실패하고 세 번 네 번 실패하면 목회를 성공하고 실패할 시간도 없어지고 만다. 이미 나이가 50줄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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