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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에서의 의복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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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에서의 의복에 대한 고찰


왕인성 교수(부산장신대학교 신약학)

고대 근동 지역의 대표적 의복들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대 근동에 있어서 의복은 일반적으로 외투와 속옷, 허리띠, 머리를 감싸는 터번(turban)이나 천(veil) 그리고 신발을 포함한다. 구약성경에서 제시되는 제사장의 상세 복장 규정과 달리, 초대 기독교인들의 의복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용한 언급을 신약성경 내에서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초대 기독교인들이 입었던 복장을 구약성경에 묘사된 복식과 초기 기독교의 문화적 토양이었던 헬라-로마 시대의 복장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의 의복과 헬라-로마인들의 의복이 외관상으론 다른 스타일을 갖고 있지만 기능상으로는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있어 베게드(beged)라는 어휘는 왕들의 의복(삿 8:26; 삼하 13:31; 왕상 22:10)이나 제사장의 의복(출 28:2), 전쟁 포로의 의복(왕하 25:29; 렘 52:33) 혹은 단순한 법궤용 덮개 천(민 4:6-9)을 나타내는 등 일반적인 모든 종류의 옷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하지만 유대인이나 헬라-로마인의 대부분의 의상은 크게 겉옷과 속옷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먼저 유대인들은 시믈라(simla)라는 겉옷을 입었다. 처음에는 단지 몸을 두르는 커다란 천 또는 옷감이었을 이 겉옷은 생활필수품으로(욥 31:19), 밤에는 추위를 이기게 해주는 담요의 역할을 했고(출 22:27; 신 24:12-13), 물건을 옮기는 운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출 12:34; 룻 3:15; 학 2:12). 노아의 아들들은 노아의 벗은 몸을 덮었고(창 9:23),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을 위한 에봇을 만들기 위해 이 옷에다 헌물을 던져 넣었다(삿 8:25).
한편 그리이스와 로마의 겉옷은 각각 히마티온(himation) 또는 토가(toga)라 불리웠는데, 몸을 감싸는 외투로서의 이 겉옷은 공식적인 행사나 추운 날씨에 보온의 목적으로 입었다. 세부적인 장식보다 전체적인 균형과 비례, 조화를 중시하는 헬라인들의 히마티온은 신약성경에서도 여러 차례 나타나는 바, 대제사장이 입었던 겉옷을 지칭하기도 하였고(마 26:65; 계 19:13,16), 예수께서 입으셨던 자색 옷에 대해서도 사용된 어휘이다(요 19:2,5). 그리하여 이 겉옷은 왕실이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또는 대제사장 등이 입어서 성직자의 고귀함이나 사회적인 신분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시믈라의 일종으로 유대인들 중 유력한 자들이 입었던 보다 화려한 겉옷을 메일(meil)이라고 칭하였다.
겉옷은 주로 양모로 직조되기도 했지만 호화스러워지고 부피가 커지면서 얇은 울이나 리넨, 실크 등도 그 재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부피가 상당히 나가는 겉옷은 활동 면에서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스데반을 돌로 치려는 자들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둔 것은 바로 이 겉옷(히마티온)이었고 활동상의 불편함이 옷을 벗게 한 이유였다(행 7:58). 만드는 수공의 어려움으로 이 겉옷은 재산목록이 될 만큼 매우 값이 나가서 목욕탕이나 공식 행사가 이루어지는 공공장소에서는 도둑맞지 않도록 옷을 잘 간수해야 했다. 옷이 분실되었다는 신고가 다반사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로마의 토가 역시도 남녀노소 모두 입던 겉옷이었으나, 제정시대부터는 주름잡아 늘어뜨린 드레이프(drape) 양식을 통해 로마의 웅장한 힘을 나타내는 공식복장으로 주로 지배 계급이 입게 되었다. 색과 장식선, 입는 방법 등을 통해 착용자의 신분을 나타내다 보니 외양을 호화롭게 꾸미게 되었고 부피가 너무 커져 길이가 6m를 넘는 토가도 생겨났다고 한다. 이 거대해진 토가는 착용이 너무 불편하여져서 공식 행사나 종교 의식 때 주로 입게 되었고 제정 말기부터는 토가 아래 입었던 튜닉 또는 튜니카(tunica)가 평상복이 되었다. 이 옷은 두 장의 직사각형의 천을 어깨와 양쪽 옆 솔기를 바느질하여 목둘레선을 일자로 트고 소매를 만들어 머리 위에서부터 뒤집어써서 입는 옷이었다. 튜닉과 유사한 양식은 유대의 전통 복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케토넷(ketonet)이라 불렸으며,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소매 또는 반소매의 채색 옷이 있었다(창 37:3,23). 헬라인들은 키톤(chiton), 로마인은 튜닉이라고 불렀던 이 속옷은 예수께서 “어떤 사람이 너를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갖길 원한다면 겉옷까지 주어라”(마 5:40) 말씀하실 때 염두에 두신 옷이었다. 또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길 때 드러난, 잇지 아니하고 통으로 짠 예수의 속옷도 여기에 해당된다. 신약성경에서 속옷으로 자주 나타나는 이 옷은(눅 6:29; 마 10:10; 막 6:9; 눅 9:3), 형식은 비슷했으나 남자의 옷에 비해 여인들의 옷이 좀더 길고 색상이 화려했으며 서민들의 옷보다 귀족들의 옷이 장식이 포함되는 화려함이 있었다. 추운 날씨에는 여벌의 튜닉을 입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 자발적인 선행의 표시로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을 권면하시던(눅 3:11) 옷도 바로 이 속옷이었다.
성경은 때때로 여러 곳에서 벌거벗음이 언급되는데, 이는 전혀 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겉옷을 벗어던졌을 때 속옷과 띠만 남은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사울의 벌거벗음(삼상 19:24)과 예수께서 붙잡히실 때 도망한 벌거벗은 젊은이(막 14:51-52)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전 벌거벗은 몸으로 고기잡이를 하던 베드로(요 21:7)도 이 속옷만큼은 입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벌거벗음을 표현하는 헬라어 gumno,j는 외투를 걸치지 않은 튜닉이나 속옷 차림만의 가벼운 옷차림을 나타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힘든 노동을 하는 남자들은 튜닉을 접어올린 상태로 몸의 일부가 드러난 채 일을 하였던 것이다(눅 12:35; 엡 6:14).
한편 허리띠는 체온을 유지하고 또한 민첩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펄럭이는 옷이나 큰 부피의 옷을 감싸는 역할을 했다. 즉, 옷의 길이를 조절할 목적으로 튜닉 위에 허리띠를 둘러서 옷매무새를 바로 잡고 육체 노동에 필요한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또한 허리띠는 돈이나 다른 귀중품을 엮어 보호하여 다니기 위해 필요했고, 특히 이 허리띠는 군인들에게 유용했는데, 그들은 군복위에 허리띠 위에도 칼이나 여러 무기들을 가지고 다니는데 사용하였다(삼하 20:8).

신약성경의 옷과 관련한 비유와 권면들
1. 예복과 그리스도로 옷 입음
마태복음 22:1-14에 보면 천국을 혼인 잔치로 비유하고 있다. 성대한 연회를 베푼 군주가 그 종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잔치에 참여토록 초청한다. 그러나 청함을 받은 자들이 그 청을 거절하고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 버리자 왕은 진노하여 자신의 초청을 거부한 자들을 징계하고 종들에게 사거리로 나가서 누구든지 만나는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데려오라 명을 내린다. 이에 종들은 만나는 자들을 닥치는 대로 초청하여 잔치 자리에 앉게 한다. 이 비유는 잔치를 베푼 주인이 잔치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 초대된 모든 손님들이 각각 자기 자리를 잡고 앉아 있어야 했던 당시의 풍속을 반영한다. 그런데 본문 속의 왕은 청함을 받은 자들 중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보고 놀라게 된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잔치에 참여한 자는 예복을 갖추어 입고 오는 것이 예의였고, 미처 형편상 예복이 준비되지 않는 자는 잔치를 연 왕이나 주인이 예복을 빌려주어 입게 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허름한 옷차림도 예복을 입는 순간 다 감추어지고 외양상으로는 전혀 위축됨 없이 주인의 친지요 벗이 되어 고귀한 자와 같이 잔치를 만끽할 수 있는 영예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예복은 공식 행사 때 입는 외투로서 보다 화려하게 꾸며진 유대의 시믈라나 헬라의 히마티온 그리고 로마의 토가에 준하는 형태를 가진 옷이었을 것이다. 예복을 입지 않음은 이 주인의 호의를 거부하는 무례한 행위였기에 왕의 진노를 산 것이었다.
마태복음 22:11이 주인이 자신의 연회에 참여할 손님들을 위하여 예복을 준비해두는 관습을 반영하고 있는 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옷을 선사하거나 손님을 위해 예복을 준비하는 일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관심의 표명이었다. 또한 고대 근동에서는 값지고 아름다운 옷을 선물하는 것은 상대를 존귀히 여김을 나타내는 예의범절에 속한 일이었다. 나아만은 엘리사를 방문할 때 여러 선물들과 함께 의복 열을 준비하였고(왕하 5:5), 다니엘은 왕의 꿈을 해몽해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자주 옷을 하사받았다(단 5:29). 또한 요나단은 자신이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입혀주었다(삼상 18:4). 특히 군주가 입었던 옷을 벗어주는 행위는 신하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사랑과 존중의 행위로 간주되었다.
샤르댕(John Chardin)은 그의 책 Travels in Persia에서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솔리만 3세(Solyman III)가 자신의 대관식 축하를 위해 모인 고관대작들에게 왕의 겉옷을 선물해주었다고 한다. 이는 왕이 자신의 선물을 받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며 왕과 교제할 수 있는 자유로운 권리를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했다.
옷을 선물로 주는 것은 아니다 해도 고대 근동에서 잔치에 참여할 손님을 위해 예복을 준비해놓는 커다란 의상실을 갖고 있는 것은 부의 상징이자(욥 27:16) 집주인의 관대함과 배려의 표현이었다. 로마의 역사가였던 호레이스(Horace)에 의하면 루쿨루스 왕은 5만 벌 이상의 궁중 의복을 갖고 있으면서 자신의 손님들에게 합당한 의복을 제공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Epistle, I. vi).
마태복음 22장의 혼인 잔치 비유에서 왕의 주도적인 초청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를 나타낸다. 그러나 먼저 청함을 받았던 자들(유대인을 지칭)은 왕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결국 거리에서 자격에 구애받지 않고 나중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잔치에 참여하게 되고 그들 중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주인이 마련해준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자신과의 교제를 허락한다는 주인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예표적으로는 주인이 제공하는 예복을 입음은 천국 잔치에 참여함에 있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호의와 구원의 방법에 순복함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그 복음에의 수용과 순종이 천국 잔치에서 입을 예복이라 할 수 있다. 이 예복을 입음으로 성도는 천국 잔치에 참여 자격을 부여받으며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2:11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내용은 아니다하더라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하여 유사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 갈 3:26-27에 보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라고 선언하고 있다. 고대 종교에서 발견되는 천상의 옷을 갈아입음으로 신과 동일시됨을 지향하는 옷 입음의 메타포는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익숙하였지만, 신(神) 자체를 입는다는 개념은 헬라 문헌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렵기에 초기 기독교인의 독특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천상의 옷을 입혀주신다’가 아닌 하나님 자신이라 할 수 있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입도록 내어주셨음을 강조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여겨진다는 이신칭의의 논쟁이 주 관심사인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은 구원을 위해 율법 준수와 같은 인간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수용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로 옷 입음은 세례 의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여 주안에서 함께 죽고 살아나는 성도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로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할 자녀로서의 지위와 신분을 획득하는 변화를 경험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는 자신이 갖고 있는 옷 중 제일 좋은 옷, 즉 길고 물결치는 모양의 옷인 스톨레(stole-로마시대에는 주로 여성용의 튜닉을 지칭하기도 하였다)를 입혀줌으로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줌과 동시에 아들의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환을 축하하는 잔치를 배설한다. 이 ‘스톨레’라는 옷은 서기관과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막 12:38; 눅 20:46), 빈 무덤의 머리맡에 앉아있던 청년(막 16:5), 그리고 순교자들(계 1:11)과 구원받은 사람들(계 7:9)이 입는 옷을 나타내기도 한다. 성도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장 좋은 의복인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음으로 자신의 이전의 허물과 죄악 된 모습이 사라지기에 자신을 억죄는 과거적 삶을 잊어버리고 새 사람이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고후 5:17) 하나님이 베푸시는 천국 잔치에 왕과 같은 모습(벧전 2:9)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 새 사람을 입으라
의상 철학의 저자 T. 칼라일은 “의복의 처음 목적은 보온도 예의도 아니고 장식이었다”고 단정한다. 결국 옷 입음의 주된 목적이나 이유 중 하나로 자기 과시의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야기인데, 앞에서 언급되었던 보온이 주 목적이었을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의 시믈라, 히마티온, 그리고 토가와 같은 겉옷들은 입는 자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점차 화려해지고 부피가 커지는 경향성을 지녔었다. 또한 그 안에 입었던 케토넷, 튜닉, 그리고 키톤과 같은 속옷들 역시도 색상이 다양해지고 부유함을 나타내기 위해 겹쳐 입는 경우도 생겨났다. 한 헬라 문헌에서 마르티알리스라는 사람은 땀이 난다는 핑계로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열한 번이나 옷을 갈아입으며 자신의 부를 자랑하길 좋아하는 자를 비난한다.
민수기 15:38이하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옷단에 청색끈이 달린 장식품을 뜻하는 어근에서 비롯된 지이지트(tciyc)라 이름하는 옷술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신다. 그 이유는 그 술을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밝히신다(민 15:39-40).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 바리새인들은 그 겉옷 귀의 옷술을 크게 하여 자신의 경건을 외양을 통해 자랑하려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듣게 된다(마 23:5).
시인 푸쉬킨은 “옷은 새 옷일 때부터 명예는 젊어서부터 소중히 하라”고 강권했고, 톨스토이는 “몸에 꼭 맞는 옷보다 양심에 꼭 맞는 옷이 좋다”고 했다. 외적인 치장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말이다. 신약성경도 장신구나 아름다운 옷(벧전 3:3)으로 외모를 꾸밀 것이 아니라 속사람의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으로 말미암은 정결한 행위(벧전 3:4)와 염치와 선행(딤전 2:9-10)으로 자기를 단장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속사람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옷 입음의 메타포로 설명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4:22-24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명령한다. 이는 신분의 변화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 옛 삶의 방식 그리고 이 악한 세대의 지배를 받는 생활을 벗어버리고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속성을 따라 사람을 향하여는 도덕적 성품이 드러나는 의의 생활과 하나님을 향하여는 거룩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시하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로마서 13:12-14에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권면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 빛의 갑옷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을 도모하지 않는 곧 방탕과 술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시기와 쟁투를 멀리하는 단정한 생활 태도이며 이것이 또한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이다. 여기서의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거룩한 도덕적 성품을 반영하는 삶으로 구체화 또는 실체화하라는 권면이다.

3. 하나님의 전신갑주
바울은 그리스도의 옷 입음을 영적 싸움의 차원에서 전투복장과 관련한 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즉,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하늘에 있는 악의 마귀와 정사와 권세와의 영적 싸움을 싸우는 성도에게 영적인 완전무장인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한다(엡 6:10-13).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 허리띠는 입고 있는 옷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붙들어주어 신속한 움직임을 가능케 하고 사용할 무기를 휴대케 해준다. 바울은 진리와 허리띠를 연결시키는데, 진리는 성도의 신앙의 중심을 지켜줄 올바른 신학의 정립으로 해석된다(딤후 3:14- 16). 이 진리는 범사의 옳고 그름을 신속히 구별해주는 역할을 한다. 의의 흉배에서의 의(義)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도에게 부여된 칭의(稱義)에 기초하여, 마귀의 폐부를 찌르는 책망으로부터 양심적으로 자유케 하는 그리스도인의 행실로서의 의를 말한다. 믿음의 방패 측면에서 보면 당시의 로마의 방패는 나무판에 짐승의 가죽을 덧입혀서 만들었는데, 전투 전에는 물어 적셔놓았다. 전열을 흩트리는 적의 불화살의 공격을 막기 위함이었다. 지적인 동의보다는 지속적인 신실함과 순종의 의미를 담고 있는 믿음은 교회 공동체를 흩으러놓는 사단의 공격을 막아내는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이상(以上)의 무장은 인간편의 노력과 연관이 있다면,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복장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도로 일어나는 것이며 복음의 말씀인 검 역시 성령께서 그 효력을 더하실 때 더욱 심령과 골수를 쪼개는 날카로움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맺는 말
성경상의 옷의 기원은 수치를 가림인데 인간이 만든 어설픈 무화과 나뭇잎 옷을 벗겨 버리시고 하나님은 한 동물의 희생을 암시하는 가죽옷으로 범죄한 인간에게 새로이 옷을 입혀주신다(창 3:7,22). 본회퍼(Bonhoeffer)는 이 사건의 상징성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그(하나님)는 타락한 자들로서의 인간들을 그대로 받아주신다. 그는 그들을 상호간에 알몸으로 드러나게 하시지 않고 친히 그들을 가리워 주신다.” 하나님의 이 행위는 죄악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본질적 수치를 가려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혀주심에 대한 예표이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의 보혈과 죽음과 희생에 기초한 그리스도는 구원의 옷을 기꺼이 믿음으로 받아 입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고 왕이신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주권적인 은혜로서의 ‘그리스도로 옷 입혀 주시는 사건’은 인간 측의 공로나 자랑을 미리 봉쇄하기 때문에, 자기 자랑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그리스도를 닮는 윤리, 곧 성결과 단정함과 희생적 삶으로 속사람을 풍성케 하며 계속되는 사단의 공격에 대항키 위한 영적 무장이 성도에게 요청한다. 그리스도로 옷 입음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고백과 그 신앙을 내 삶 안에 내면화 그리고 승화시켜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품위를 지켜나가는 생활 신앙에 다름 아니다. Longe- necker가 지적한대로 그리스도로 옷 입음은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의 성품, 도덕성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의 생애의 의도를 덧입는 것이며 곧,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you took on yourselves Christ's characteristic, virtues, and intentions, and so became like him)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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