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과 빛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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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봉수 목사
소금과 빛
본문/ 마 5:13-6
서양에는 '노블레스-오블리즈(noblesse oblige)'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옮기면 '귀족의 의무'입니다. 귀족이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남다른
정신적인 의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전통을 말합니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습니다. 독일의 귀족 리흐트호헨 남작이 젊은 나이에 자원해서 군에
입대했습니다. 공군 비행사로 참전하게 됐는데 자기 비행기를 눈에 띄도록 새빨갛게 칠을
했습니다. 적군이 한 눈에 지휘관 비행기라는 것을 알아보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전투기
편대의 최선봉에 섰습니다. 그리고 미망인을 남기는 것이 군인 귀족으로서 수치라고 생각해서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80대의 적군 비행기를 격추시키고 끝내 자신도 26살에 자기의 붉은
비행기와 함께 산화하고 맙니다. 지금도 독일 사람들은 이 리흐트호헨 남작을 붉은 남작이라 하여
그 명예를 기립니다.
이 리흐트호헨 남작은 귀족으로서 나라를 위해, 국민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닌 채 살았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이 의무감이 강하게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자원해서
군에 입대했고, 남보다 앞장을 섰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즈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되려고 몸부림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자리에 앉아서 권력을
잡아보고 그 자리가 주는 혜택을 누려보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서 무엇을 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은 보기 어렵습니다.
책임지려하지 않고 의무감을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즈가 살아나야 합니다. 대통령이 되려고만 하지 말고 대통령이 돼서 정말 국가를
위해 봉사하려 해야 합니다. 부자가 되려고만 하지 말고 부자가 돼서 남을 위해 무엇인가 해
보려해야 합니다.
오늘도 이 노블레스 오블리즈라는 전통은 '자기 자신 이상으로 남을 사랑하는 힘과 자기 자신의
이익 이상의 것을 위해 행동하는 힘'이란 뜻으로 다시 살아나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즈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고만
하지 말고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는 것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한 책임과 의무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즈 정신을 일깨워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명확하게 밝혀줍니다.
13절에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했고, 14절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보면 소금이요 빛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말씀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라", "세상의 빛이 되라."
앞으로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되라는 뜻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다시 살펴보니 분명히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빛이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왜 이 말씀을 오해하고 있었을까? 내 자신을 들여다 볼 때
세상의 소금이나 세상의 빛이라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여전히 내 안에
추하고 더러운 것들이 가득 차 있고, 여전히 내 안에 어둠이 가득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직 소금이라고 빛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앞으로 열심히 연마하고 훈련해서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돼야겠다' 그런 생각 때문에 '세상의 소금이 되라',
'세상의 빛이 되라' 오해했던 것입니다.
조금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은 소금이라고 빛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소금이 되라고 빛이 되라고 알고 있었다는
것은 아직은 소금이 아니라고 지금은 빛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바로 사탄에게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랜턴을 들고 어두움 밤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건전지가 다 돼서인지 불빛이 영 희미한 것이
킨 건지 안 킨 건지 구분이 잘 안 갈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랜턴 유리에 먼지가 많이 묻어 그나마도
희미한 불빛을 더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불빛이 희미하다고 해서 그것이 랜턴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랜턴이 아니지만 겉 유리 잘 닦고 건전지를 새 것으로 갈아 끼우면 그 때 랜턴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불빛이 내 기대만큼 밝지 못해도 랜턴은 랜턴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거하십니다. 비록 내 인간적인 모습이 아직 기대만큼
훌륭하지 못해서 주님의 모습을 잘 드러내지는 못해도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내 안에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입니다.
만일 우리가 소금인데 아직 아니고 앞으로 소금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정말 소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빛인데 아직 아니고 앞으로 빛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정말
빛으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소금이 돼야 한다면 언제 소금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앞으로 빛이 돼야 한다면
언제 빛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전혀 죄가 없고, 주님처럼 청결한 양심과 순결한 영혼을
갖게 될 때나 가서야 소금도 되고 빛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요? 그런 날은 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소금이 되라는 말은 결코 소금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탄에게 속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진정 주님의 제자라면, 주님을 신실하게 믿고 따른다면 우리는
이미 소금입니다. 이미 빛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신분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소금
그러면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13절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소금의 기능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주님이 본문에서 강조하시는 것은 바로 맛을 내는
기능입니다.
제가 잘 먹는 음식 가운데 하나가 곰탕입니다. 그런데 이 곰탕은 다른 여러 가지 조미료를 넣으면
제 을 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넣지 않은 것은 더 먹을 수가 없습니다.
적당하게 소금을 넣으면 정말 입에 짝 달라붙는 것이 그만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야 이 세상이 맛이 난다는
말씀입니다.
요즘 한국 음식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특히 김치가 그렇습니다.
사실 서양사람들은 맛을 다섯 가지 밖에는 모릅니다. 단 맛, 쓴 맛, 매운 맛, 짠 맛, 그리고
신맛입니다. 일본 사람들도 대개 그렇고 중국 사람들도 대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국 음식에는
제 6의 맛이 있습니다. 바로 삭은 맛이라고도 하고 감칠맛이라고 하는 발효 식품의 맛입니다.
중국에도 김치 같은 배추 절인 것이 있습니다. 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일본에도 비슷하게
배추 절여 놓은 것이 있습니다. 오신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서양에도 오이를 절여놓은 피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도저히 김치와 그 맛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삭은 맛,
감칠맛이 없기 때문입니다. 푹 익은 김치 안에 이 삭은 맛이 진동합니다. 두부도 썰어 넣고
돼지고기 좀 넣어서 얼큰하게 부글부글 끓이면 기가 막힌 김치 찌개가 됩니다. 외국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 맛을 모릅니다.
비슷합니다. 이 세상에도 여러 가지 인생을 살맛이 있습니다. 돈 버는 맛, 세상 즐기는 맛,
자식 키우는 맛, 출세하고 성공하는 맛... 여러 가지 살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없는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죽었다가 깨어나도 알 수 없는 맛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맛, 주님과 동행하는 맛이 있습니다.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이 보증을 잘못 서 가지고 월급 차압당하고, 집 날리고 단칸
셋방으로 이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심방을 갔습니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이 분이 예수 믿고 이런 풍파가 생긴다고 시험들까 봐 여간 걱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저를 맞는 그분의 표정이 밝았습니다. 대뜸 하는 말이 너무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던 아이들도 이번 기회에 함께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됐고, 막 나가던 아들 녀석도 아빠
엄마 편이 됐다는 것입니다. 돈은 잃었지만 가족의 신앙을 찾았고, 가정의 사랑을 얻었다는
것입니. 그래서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찌 이런 인생의 맛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고난 중에도 감사하고,
환란 중에도 찬양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소금이니 이 세상에서 진정한 인생의 맛을 내라는 것입니다.
아직 인생의 참 맛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 맛을 알려주어야 하고, 그 맛을 보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소금이지만 그 맛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더라구요. 작년인가 어떤 분이 왕새우를 보내주셨습니다. 어떻게 요리를 해 먹을까
궁리하다가 소금구이를 하기로 했습니다. 굵은 소금을 후라이팬 아래에 깔고 코일을 덮고 나서
그 위에 새우를 놓고 구웠습니다. 정말 맛있게 잘 익었습니다.
그런데 새우를 다 굽고 나서 그 소금을 보니까 더 이상 소금이 아니었습니다. 색도 희지가 않았고
맛도 그렇게 짜지가 않았습니다. 정말 아무짝에도 쓰지 못하고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는 없는 우리만의 맛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소금만이 가지고 있는 짠맛처럼
이 세상사람들이 도무지 보여줄 수 없는 삶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애굽에 팔려갔던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믿음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진실되고 정직하고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세상을 맛있게 바꿔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그저 싱거운 맛없는 곰탕 국물과도 같습니다. 소금이 필요합니다.
간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빛
그러면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14절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16절을 보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빛은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어둠 속에 감추어졌던 길을 드러내 줍니다. 어둠 속에
감추어졌던 더럽고 추한 것들도 다 드러내 줍니다. 이렇게 볼 때 빛의 기능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안내하는 기능입니다. 한 밤중에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들은 도저히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 때 저 멀리 등대에서 쏟아내는 한 줄기 불빛은 그 선박이 가야할
길을 안내해 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은 어두운 이 세상 한 복판에서 갈 길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인생의 길을 안내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지적하는 기능입니다. 한 밤중에는 흉한 몰골, 지저분한 몰골 이런 것들이 그대로
다 가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그대로 숨어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낮이 되면 그 흉한
모습, 추한 모습, 더러운 모습들이 드러나서 부끄러움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로 잡지
않으면 안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은 이 어두운 세상에서 추한 것, 흉한 것, 더러운 것 감추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문제를 지적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그것을 바로잡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내해 주고 지적해 주는 일을 말로 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16절을 보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범을 보임으로써 갈 길을 안내해 주고, 잘못된 것을 지적해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바로 살면, 착한 행실이 드러나게 되고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겠구나...' 하면서 가야할 길의
안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저 사람은 저렇게 사는데 나는 이게 뭔가?...'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찾을 수 있데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빛이라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빛이 보일 수 있는 문제 하나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줍니다. 15절을 보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당시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2000년 전이니까 전기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담은 등잔으로 조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2000년 전이니까 성냥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등잔불은 사람이 집안에 있든지 집밖으로 나가든지 늘 켜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집안에 있을 때는 등불로 조명을 하기 위해 높은 곳에 등잔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등경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그 등경 위에 등잔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집에 없을
때는 등잔을 끌 수는 없어서 화재 위험도 있고 해서 말로 덮어둡니다.
여기서 말이라는 것은 타고 다니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말처럼 생긴 토기를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말에 한 말 두 말 할 때 쓰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됫박과 같은 그릇을 뜻합니다.
번역을 오해의 소지가 있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8:16을 보면 "그릇으로 덮어둔다"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등경 위에 올려진 등잔처럼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당당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말 아래 둔 등잔처럼, 그릇으로 덮어둔
등잔처럼 자신이 그리스도임임을 숨기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점을 지적하고
계신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는 등잔을 등경 위에 두었다가 교회 밖으로 나가면 말 아래 내려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빛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길거리에서, 심지어 여행 중에도, 노래방에서도, 게임 중에도,
운동하는 가운데서도 빛이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올 때 성경 찬송을 들고 오는 것이 부끄러워 가방에 감추고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놀러 가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할 때 식사 기도를 슬쩍 생략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점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당당해 지십시오! 담대해 지십시오! 등잔을 말 아래에서
저 등경 위로 올리십시오! 그 뒷일은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여러 가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명령하시니 그대로 순종하십시오!
그 뒷 감당은 주님이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입니다.
이제 이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유럽의 귀족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즈라는 정신으로
살았던 것처럼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 사명감과 책임감 그리고 의무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을 맛있게 만들어야 하는 책임, 이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하는 책임
이 책임을 잘 감당해 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