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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한탄(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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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한탄(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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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봉수 목사



하나님의 한탄

본문/ 창 6:1-8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상식적으로 쉽게 납득하기 힘든 표현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땅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7절에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한탄하셨다!, 하나님께서 근심하셨다! 따지고 들자면 문제가 있는 표현들입니다.
글자 그대로 생각해 보면 몇 가지 모순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실수를 하셨다는 모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타락의 길로 빠질
수밖에 없는 부족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만드신 것이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실수하셨다!
이것이 모순 아닙니까?

다음으로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모르는 것이 있다는 모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나중에 이렇게 타락할 지 모르셨다는 것이 됩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도 몰랐던 것이 있었다!
이것도 모순이 아닙니까?

그리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는 모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나서
나중에 괜히 만드셨다는 후회를 하셨다는 것이 됩니다. 모든 것을 뜻대로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 이것 역시 모순이 아닙니까?

물론 본문의 이런 표현들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관해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사용한 설명 방법일 분입니다.
사실 성경 여러 곳에 하나님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님을 인간처럼 의인화해서 설명하고 있는 곳들이있습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신인동형론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존재로 표현해서 우리
인간이 이해하기 쉽게 돕는 설명 방법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표현을 여러 곳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땀을 흘려서 무엇인가 얻고자 애쓰는 행동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뜻만 세우시고
말씀만 하시면 모든 것이 그대로 되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은
사실 어폐가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인간의 모습으로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발등상, 하나님의 등... 하나님께서 영이신데 어찌 얼굴이 있으시며,
발등상이 있으시며, 등이 있으시겠습니까? 따지자면 어폐가 있는 말들입니다.
이런 신인동형론적 설명들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따지거나 논리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그 표현이 설명해 주려는 의미와 메시지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표현들을
통해서 무엇을 설명하려고 하는지 그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표현들이 설명해 주려는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6절을 보면 "한탄하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한탄하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인나헴'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이 말은 신음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에 대한 기대가
무너져서 그 실망감 그 비통함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 마음이 아프다는
뜻입니다.
정말 사람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아프면 신음소리가 나옵니다.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로,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것 없이 자기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끙끙 앓는 소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 정도로 아프셨다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역시 6절을 보면 "마음에 근심하시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근심하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아차브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말은 '마음이 찢어지다'라는 뜻입니다.

미국의 한 심리학 연구실에서 실험을 했답니다. 사람의 심리적 고통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서 사람과 가장 가까운 침팬지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답니다.
침팬지 새끼를 어미가 보는 앞에서 학대를 했답니다. 때리고 고문하고 새끼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게 했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어미의 반응을 보려고 한 것이죠. 처음에는 어미도 같이
비명을 지르고 정신이 다 나가더랍니다. 이 일을 반복하다 보니 3일만에 어미가 죽었답니다.
죽은 어미를 해부했는데 글쎄 작은 창자가 피투성이고 여기 저기 상처가 났고 일부는 칼로 짜른
것처럼 짤렸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애간장이 다 녹는다, 애가 끊어진다 라는 말이 맞는
것입니다.

바로 근심하다는 말은 애간장이 끊어지도록 그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토록 마음이 아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한탄하셨고, 그 마음에 근심하셨을까요?
본문 3절을 보면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본래 창조 당시의 인간의
모습이 변질되어서 육체가 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본래 창조 당시의 인간의 모습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 2:7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을 가리켜 생령이라 했습니다.

이 말이 히브리어로는 '네페쉬 하야'인데 영어 성경에는 living soul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말 뜻 그대로 말하자면 살아있는 영이라는 말입니다. 조금 의미를 붙여보자면 인간은 흙으로부터
온 육체적인 요소와 생기로부터 온 영적 요소로 되어있는데 여기 생령이라 함은 영적 요소가
중심이 되고 주도되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흡족하셨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생령이 육체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육체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바사르라는
말인데 이 말은 육체적인 욕망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흙의 요소가
생기의 요소를 지배하고 좌우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기의 욕망을 따르고 하나님 중심의 삶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이면 안성의 이모님댁엘 늘 가곤했습니다. 이모님댁에는 큰 과수원이
있었는데 그 과수원은 대부분 복숭아 나무였습니다. 얼마나 크고 빛깔도 좋고 맛도 좋은지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입에 침이 돕니다. 그 복숭아 맛 생각에 말입니다.
런데 복숭아 나무 밑에 가보면 나무에서 떨어진 복숭아들이 여기 저기 널려있습니다.
맛을 보려고 한 입 물어보면 벌써 썩어서 먹기가 힘이 듭니다. 같은 복숭아인데 나무에서 복숭아가
나무에서 떨어지고 나면 하루가 지나기 무섭게 여기 저기가 썩고 변질이 돼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나무에서 떨어져 썩어 가는 복숭아를 볼 때 어린 제 마음에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무에 붙어있었으면 저렇게 썩지는 않을텐데...

하나님의 마음이 그랬습니다. 원래 생령이었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면서 육체가
되버렸습니다. 썩어가고 있는 것이고, 변질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은
무척이나 아프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이 식어갑니다. 그렇게 단단히 다짐하고
결단했지만 그 다짐 가 각오가 희미해져 갑니다. 그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 그렇게 믿음이 좋던 사람이 어느새 세상에 묻혀 가서는 안될 곳을
헤매고 다니고, 해서는 안될 일을 하면서 망가져 가고, 품어서는 안될 악한 마음을 품 고...
탕자처럼 세상 한 복판에서 그 영혼이 신음하고... 이런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한탄하시고,
그 마음에 근심하십니다. 그 마음이 찢어집니다.

우리의 믿음이 변질돼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육체가 되면 안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마음에 한탄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본문 7절을 보면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소위 홍수 심판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이 창세기 내용 전개 상의 문맥적 위치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전체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오늘 본문의 위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창세기 1-2장은 창조 기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부족함이 없게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었습니다.

3장은 이런 창조 세계가 타락하고 죄가 그 안에 들어오는 과정에 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자유의지를 주셔서 그 삶을 책임껏 누리도록 만드신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4-5장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인간들이 어떻게 되었는가에 관한 설명입니다. 가인의 살인에서
보듯이 인간 세상에는 죄가 넘쳐나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가지 참으실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6장에 오면 하나님께서 드디어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오던 하나님의 사람들마져
죄에 물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창 4장을 보면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의 계보가 생겨났습니다. 하나는 가인의 후예들이고,
다른 하나는 셋의 후예들입니다. 가인의 후예를 사람의 아들, 사람의 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의 뜻대로 사람의 욕망대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셋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6:1-2을 보면 사람의 아들딸들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저 가인의 후예들이
이 세상에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저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들이 주인인
줄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고 그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세상 한 복판에서 미의 기준이 흔들린 것입니다. 경건하게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사는 모습이
궁상맞아 보이고 답답해 보이고 시대에 뒤쳐져 보입니다. 반대로 세상 한 복판에서 자기들 멋대로
살고, 향락과 쾌락에 춤을 추며 살고,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못된 짓하며 돈도 많이 벌고 성공도
하는 것이 멋있어 보입니다. 가치관이 흔들리고 미의 기준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들이 가던 길을 버리고 사람의 아들딸들이 가던 길을 따라나서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결심을 하십니다. 이 세상을 쓸어버리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람들의 타락이 하나님의 심판을 부른다는 사실입니다.
죄가 이미 이 세상 속에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5절을 보면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심판하실 생각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사람들이 건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소망을 두셨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며 위안을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너지자 하나님께서 더 이상 참으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심판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무너지면 안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너지면 이 나라가 망합니다.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타락하고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리는 자리로 나가면 이 민족 역사가 무너집니다. 여러분이 무너지면 여러분 가정과
가문이 망합니다. 우리가 이 땅의 파수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땅의 마지막 보루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아직 지켜보고 계신 것은, 이 나라 이 민족을 지켜보고 계신 것은
우리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소망을 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를 기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잠 6:6을 보면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말씀하셨습니다.
개미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지혜를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이솝 우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가 바로 그 지혜입니다. 개미는 여름 내내 땀흘려 수고합니다.
왜 개미라고 베짱이처럼 놀고 싶지 않겠습니까? 개미는 찬바람 부는 겨울이 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 9:27을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고 나면 겨울이 오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베짱이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개미의 길을 갈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선택의 기로입니다.
개미처럼 겨울이 올 것을 미리 깨닫고 그 겨울을 준비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삶을 신학에서는
종말론적 삶이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반드시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고 그날의
심판을 미리 준비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 시험은 날치기로도 어느 정도 대비가 되지만
인생 심판은 날치기로 안됩니다. 미리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심판을 피할 길이 정녕 없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8절을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말씀했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홍수 심판이 있고, 불 심판이 있어도 벗어날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노아와 같은 사람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께' 라고
번역한 말은 히브리어로 베에네 야웨라는 말로 '여호와의 눈에'라는 말입니다.
즉 여호와의 눈에 구별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남다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사람의 아들 딸들을 보셨습니다. 모두가 타락했고 죄에
물들어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 하나님의 아들들을 보셨습니다. 어느새 저들도 죄에
물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만은 하나님 보시기에 달랐습니다. 아직도 노아만큼은 죄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눈에 노아만 돋보였습니다.
마치 까마귀 무리에 백로 한 마리가 날고 있는 것처럼 노아만 눈에 확 띠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만은 그 심판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죄로 가득 차도 그 안에 여호와 보시기에 남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여호와 보시기에 남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실 때 그 마음이 어떠실까요?
행여라도 한탄하시고 그 마음에 근심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잠 25:13 말씀처럼 얼음
냉수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노아처럼 여호와께 은혜를 입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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