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있어야 할 것들 (5/13)
본문
본 문
설교자 박봉수 목사
항상 있어야 할 것들
본문/ 고전 13:13
어느 날인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가 제법 많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따라 할 일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아서 단단히 준비를 하고는 집을 나섰습니다. 물론 우산도 챙겼습니다. 그것도 빗줄기가 굵어서 작고 간편한 접는 우산 말고 크고 폭이 넓은 우산을 썼습니다.
그런데 점심때쯤 되니까 언제 그랬더냐 싶게 날이 활짝 갰습니다. 아직도 할 일이 많고 이곳 저곳 다녀야 할 때도 많은데 긴 우산이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신경도 쓰이고,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우산은 꼭 필요할 때가 따로 있습니다. 필요할 때가 아니고는 오히려 있어서 불편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다 필요할 때가 있고 또한 필요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필요할 때 그것이 있으면 요긴하게 사용되지만 필요치 않을 때 그것이 있으면 오히려 불편하고 거추장스럽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 모두는 항상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있어서 좋을 때도 있지만 오히려 있어서 불편할 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 그렇지만 돈은 예외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은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몰라도 돈은 언제나 필요하고 돈은 언제나 요긴할 것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돈이 있어도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영화 타이타닉호를 보니까 마지막 장면에 배가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몇 안 되는 구명보트를 타려고 아우성들이었습니다. 그 때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누가 양보하겠습니까? 수백억을 준다고 구명정 자리를 살 수 있겠습니까? 그 많은 보석, 그 많은 증권, 그 많은 돈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헤엄치는데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리고 돈으로도 구할 수 없는 것도 세상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가 음식은 돈으로 살 수 있어도 입맛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돈으로 의사의 도움은 얻을 수 있지만 건강을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고대광실 호화로운 집은 살 수 있어도 가정의 행복은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돈으로 사람은 얻을 수 있어도 그 사람의 마음은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돈도 우리에게 언제나 필요한 것만은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돈은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언제나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이것들은 언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평안을 얻게 해주고, 삶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먼저 믿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는 작년 연말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5중 추돌 사고 한 가운데 휘말려들었습니다. 100킬로 이상으로 달리는 도중에 앞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저도 급정거를 했습니다. 겨우 앞차를 추돌하는 것을 면했습니다. 안도의 숨을 몰아 쉬는데 제 뒤에 오는 차가 저를 들이박았고, 또 이어서 그 뒤에 오던 차가 또 들이박았습니다.
저는 이 사고 이후에 나 혼자 운전을 잘한다고 사고를 면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고 직후에는 운전하기가 겁이 났습니다. 또 뒤에서 날 들이박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이 생겼습니다. 그 이후 운전하면서 늘 백미러로 뒤를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뒤에 오는 차 운전자를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디 운전뿐이겠습니까? 다리를 건널 때도 성수대교가 무너진 기억 때문에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행기를 탈 때도 각종 비행기 사고에 대한 기억 때문에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장에서 무엇을 사려고 해도 농약을 넣었는지, 외국산을 속였는지, 유통기간 넘은 것을 감추고 있는지 도대체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와 사업을 동업하려해도 사기를 당한 기억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어디 투자를 하려해도 불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앞 뒤 좌우를 둘러봐도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 믿을 수 있는 것들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그래서 걱정입니다.
요 14:1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확인시켜줍니다. 우리가 믿을 대상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니고, 이 세상도 믿을 대상이 아니고 우리가 믿을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거짓말 하나 돈이 거짓말하지.' 맞는 말입니다. 사람이 약속을 지키려고 해도 돈이 없으면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약속 해 놓고도 그 약속을 끝까지 변치 않고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믿음의 대상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한번 하신 약속은 끝까지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킬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어떤 상황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어떤 분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다, 어떻게 그렇게 굴뚝같이 약속하고는 날 속일 수 있는가?' 맞는 말입니다. 때론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일부러 약속을 어길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 마음이 깨끗하고 그 양심이 청결치가 못합니다. 상황에 따라 자기의 이익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가 누구라 해도 믿음의 대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결코 속이거나 결코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마가복음 4장에는 믿음과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기사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광풍이 일어나며 풍랑이 쳐서 물이 배 안으로 들어와 가득 차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제자들은 물을 퍼내고 풍랑과 싸우느라 땀을 흘리며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뱃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 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풍랑이 일어도 배에 물이 들이차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편히 잘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고, 내 배에 타고 계시고, 내 인생의 문제에 관여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의 인생은 평안합니다. 행복합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소망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스위팅이라는 사람은 마음에 새겨둠직한 말을 남겼습니다."사람은 40일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고, 3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며, 8분간 숨을 쉬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희망 없이는 단 2초도 살 수 없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를 존재케 하는 힘은 바로 희망입니다. 희망이 우리를 고난 속에서도 도저히 헤쳐나갈 수 없어 보이는 어려움 속에서도 버티게 해주는 버팀목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둘러봐도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사막은 불같이 뜨거웠습니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우리에게 남은 것은 죽음 뿐입니다. 더 이상 걸을 필요가 없어요. 그냥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죽는 편이 낫겠어요" 아버지가 아들을 타일렀습니다. "얘야 조금만 더 가면 틀림없이 맑은 물과 마을이 나타날 거야 힘을 내렴"
그 때 두 사람 앞에 커다란 무덤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아들은 더욱 절망하면서 울부짖었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이 죽은 것처럼 우리도 죽게 될거예요 정말 완전히 절망이예요!" 그 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이 무덤은 희망의 징조이다. 왜냐하면 무덤은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란다"
과연 두 사람은 곧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길은 때로 사막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한 복판에는 사막의 무덤과 같은 절망의 늪이 여기 저기 널려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 안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니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희망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희망을 갖고 싶어도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희망은 돈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땀 흘려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거울 앞에 서서 하루에 수 만번씩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외친다고 희망이 내 마음 속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5:13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의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확인시켜 줍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창세기 마지막 부분은 요셉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의 특별한 총애를 받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형들이 시기하고 미워해서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부자 집 아들이 하루아침에 멀리 타향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종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종으로 팔려간 집 여주인의 모함으로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요셉의 인생은 본격적으로 사막으로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오셉의 인생은 철저한 절망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셉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 수 있었을까요? 바로 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꿈을 꾸게 했습니다. 꿈을 해몽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장차 자기 가족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 자기가 큰 위치에서 나라를 구하는 꿈 그런 꿈을 꿀 수 있게 했습니다.
절망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꿈으로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는 그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기근 속의 자기 가족들을 모두 구원해 내게 되었습니다.
요셉에게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에게 소망이 넘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견딜 수 없는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니 돈으로 살 수 없는 너무도 귀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소망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사랑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퍽 오래 전에 미국의 유명한 잡지 가운데 하나인 라이프지는 "아름다운 참 사랑의 모습"이라는 기사와 더불어 한 노 부부의 사진을 실은 일이 있습니다.
기사 내용은 이렇습니다. 영국의 한 지하철 대합실 식당에서 노 부부가 서로 부축하면서 마치 소굽동무 어린이처럼 정답게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비스켓을 주문했고 아내는 차 한잔을 주문했습니다. 무척 가난해 보였는데 두 사람은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 채 두 손을 꼭 잡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주문한 음식이 나왔습니다. 남편이 먼저 비스켓 한 입을 먹었고, 아내는 뜨거운 차 한잔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남편이 비스케 반쯤을 먹고 나서 갑자기 틀니를 뽑아서 깨끗이 닦았습니다. 그리고 그 틀니를 아내에게 주자 아내는 자연스럽게 그 틀니를 끼고는 남은 비스켓 반을 먹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먹다 남은 차 반잔을 마시면서 아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기자의 눈에는 이 광경처럼 아름다운 부부 사랑의 모습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광경을 사진에 담았고, 제목을 "아름다운 참 사랑의 모습"이라고 썼습니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그 누구와 이처럼 아름다운 사랑을 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이 이처럼 귀하고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랑을 만들어가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사랑을 받는 사람도 있는 것인데 모두가 사랑하기보다는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에 이 땅에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을 받고자만 하는 자신을 보면서 부끄러워해 보셨습니까? 마땅해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할 생각을 하지 않는 자신을 보면서 괴로워해 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이 아름답고 복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요일 4:1-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결코 사랑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에 감복한 사람들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고전 13을 보면 사랑은 하나님의 은사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남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한다면 정말 그런 가정은 천국이 될 것입니다. 그런 세상은 천국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고, 돈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 귀한 것들, 정말 가치 있는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그 가치를 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 생명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그 생명이 풍성하려면, 진정한 행복을 누리려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항상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이 세상에서는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살 수가 없습니다.
이 세 가지는 바로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비가 저 하늘로부터 내리는 것처럼 이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은 다 하늘로부터 옵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고 저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 그들만이 받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너무도 소중한 축복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 풍성해서 진실로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