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오신 부활의 주 (고전 15:1-11)
본문
: 김형준 목사
지혜롭기로 소문난 수도사에게 한 방문객이 찾아와 질문합니다.
“당신은 소문대로 지혜자입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사람들이 당신을 지혜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수도사는 대답했습니다.
“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보는 능력이라니요? 무엇을 본다 말입니까?”
“예, 저는 누에고치 안에 있는 나비와 알 안에 있는 독수리, 이기적인 인간 안에 있는 성자 그리고 죽음 안에 있는 생명, 고난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위의 이야기에 따르면 지혜로운 사람이란 현상너머에 있는 본질을 보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는 슬픔과 탄식이 가득합니다. 어떻게 보면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보이는 현상 이면에 있는 더욱 본질적인 것을 볼 수 있다면,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망하거나 잘못되지는 않았습니다. 절망과 고통 이면에 숨겨진 본질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부활 주일로써 그야말로 지혜자처럼 절망 속에 숨겨져 있는 부활의 능력을 볼 수 있어야 하는 날입니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람인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던 사람이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되었고, 두려움과 불안에 떨던 인생에 평강이 생겼고, 무의미하고 무기력하던 생활이 즐거움과 의미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사회와 가정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민족을 변화시켰고, 인류의 역사를 변화시켰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도 주님의 부활에 담겨있는 의미와 본질을 알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더 기쁜 소식은 우리보다 주님께서 변화를 더욱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부활 직후에 사람들에게 주셨던 놀라운 깨달음 주기를 원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있었던 변화와 같이 우리 삶에도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과 오늘날 부활의 소식을 듣는 사람들이 무엇을 알기 원하셨을까요?
첫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인생이란 목적과 방향이 분명히 있었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즉, 제자들에게 중요한 사명을 위임하셨습니다. 단순히 먹기 위한 삶도 아니요 주어진 상황 따라 대처하며 처리하는 수동적인 삶도 아닌, 어떤 역경과 환경 속에 있다 할지라도 이루어야 할 본질적인 사명이 있는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명이란 다름 아닌 온 세상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땅의 기쁜 소식은 잠시 동안은 기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절망과 불행의 소식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내게는 기쁜 소식이 다른 사람에게는 슬픈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영원토록 기쁨이 될 소식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지고 생활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위탁하신 복음을 믿고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가정을 통해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와 민족, 열방 앞에서 복된 소식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는 사명은 당시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셨고, 삶의 현실 속에서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닌 사명자로서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교수가 재밌는 연구를 했습니다. 개미들이 동료 개미가 죽은 것을 눈으로 봐서 아는 것이 아니라 죽은 지 며칠 지나면 나오는 성분 올레산(oleic acid)의 냄새 때문에 알게 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냄새가 나면 동료 개미들은 죽은 개미를 끌어다가 공동묘지에 가져다 버리는 것입니다. 윌슨 교수는 살아있는 개미에게 올레산을 묻혀서 두었는데, 동료 개미들이 몰려와 단지 올레산이 묻었을 뿐인 살아있는 개미를 공동묘지에 버리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버려진 개미는 공동묘지에서 올레산을 다 없애고야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이 땅에도 죽음의 냄새와 죽음의 향기가 가득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정에는 생명의 향기가 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직장과 여러분이 몸 담고 있는 사회는 어떻습니까? 심지어는 나 자신조차 생명의 향기가 아닌 죽은 희망, 죽은 꿈, 죽은 사랑, 죽은 관계들로 여기저기 냄새를 풍기며 공동묘지로 끌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죽음의 냄새가 나는 그곳에 생명의 냄새를 풍기는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위임받은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놀라운 능력으로 죽음의 냄새가 나는 곳에 생명의 냄새와 부활의 감격을 전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부활하신 주님은 사람들이 주께서 메시야이심을 분명히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약의 약속을 받고도 깨닫지 못하고 언약 가운데 있으면서도 언약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들에게 바로 예수 자신이 언약의 성취자이신 구세주가 되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삶 속에 주님은 나의 ‘왕’, ‘제사장’ 그리고 ‘선지사’이심을 인정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진정 섬길 분으로서 예수님은 우리를 지배하고 명령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또 예수님만이 우리 제사장이십니다. 내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실 마음도 갖고 계시고 그럴 능력도 가지고 계신 주님이십니다. 마지막으로 바로 그 주님이 우리 선지자이십니다.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 속에서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이러한 고백을 드림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세주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자신과 환경을 바꾼 사람이 되었습니다. 역사를 바꾼 사람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을 때 부활하신 메시야를 만나러 갔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찾으러 갔던 것에 불과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구세주로서 알고 찾아간 것이 아니라 굳은 신념대로 살다 죽은 순교자 중의 하나로 알고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로서 새롭게 마리아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절망 속에 있던 여인이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셨고, 절망의 상징이던 무덤에서 소망의 노래를 부르며 증인의 삶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마리아에게 구세주로 나타나셨던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도 동행하셨습니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는 우리 눈과 마음 그리고 생각을 여셔서 말씀을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좌절하여 걷고 있는 두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무기력하게 죽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무기력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말씀처럼 메시야로 오셔서 말씀대로 죽었다가 약속대로 부활하셔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구약의 성경을 해석해 주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 32절 말씀합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말씀에 눈 뜨기 시작하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하나님 말씀이 가슴에 와 닿기 시작하면 그 열정 앞에 견디지 못합니다. 성령의 불앞에 우리는 마음을 내어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말씀이 풀려 깨닫게 되기 시작하면서 막연히 알고 있던 구약의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집에 들어가 떡을 뗄 때에야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며, 떡을 떼어 주고 있는 자신이 바로 부활하신 메시아임을 보게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신령한 눈을 떠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구세주가 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지식의 눈, 경험의 눈, 상식의 눈으로는 주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는 육으로 밖에 주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재 하셔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야 주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눈을 떠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본 두 제자는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고, 예수님께서 닫혔던 자신들의 문을 열어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문이 어떤 문이냐 하면 마음의 문입니다. 마음의 문은 두들겨 부셔도 부서지지 않습니다. 마음을 닫아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열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문은 낮과 밤의 기온 차 때문에 틈이라도 생기는데 마음의 문은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마음의 문에 달려있는 개폐 장치가 고장 난 것입니다. 열려야 할 때는 열리지 않고 닫았다고 생각했던 자존심 상하는 말, 낙심과 근심되는 말에는 열어둡니다. 어느새 그것이 마음속에 들어와 주인 노릇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 앞에는 어떻습니까? 복음 앞에 여러분은 마음의 문을 닫아놓고 얼마나 민감하게 대하고 있습니까? ‘진짜인가?’, ‘저럴 수 있을까?’, ‘저렇게 될 리가 없어.’ 등. 얼마나 꼼꼼하고 섬세하게 분석하고 따집니까? 고장 난 낸 마음의 문을 주께서 여실 때에 보아야 될 것을 보고 담아야 될 것을 담게 되면서 정말 믿어야 될 대상과 구세주의 어떠하심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제자들의 언어는 바뀌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중에 나눴던 대화는 과거의 이야기였고 죽음과 절망에 대한 것이었으나, 주님을 만난 후에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주변인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사명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대화의 주제가 이제는 생명의 이야기, 소망의 이야기, 부활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얼굴빛은 슬픔의 빛에서 희망과 도전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주로 요즘 나누는 대화 주제가 무엇입니까? 정치입니까? 한번 분류해 보십시오. 절망의 이야기, 과거의 이야기는 아닌지 여러분의 대화 주제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 속에 생명이 없고 미래와 희망이 없다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 사람들 얼굴 표정이 굉장히 어둡습니다. 꼭 상황이 어려워서만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정말 상황 탓이라면 상황이 어려운 사람은 얼굴빛이 다 어두워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문제를 아시고 갈 길을 아시며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주님이 바로 구세주임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어려움 중에도 희망을 만들어 갑니다. 많은 사람들을 옳은 대로 인도하는 복 된 인생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이나 곤고나 배신과 좌절 가운데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승리의 걸음을 걸을 수 있는 이유는 주님 때문입니다. 비록 절망과 좌절의 걸음이었지만, 그런 우리와 동행하시며 계속해서 일깨워 주셨음을 믿는 사람 그리고 돌이키시는 주님을 따라 자기 인생의 걸음을 되돌린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는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런 축복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소망을 가르쳐 주기 원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셨고, 죄와 사망과 싸워 승리하심으로 참된 소망을 향해 걸어가는 삶을 보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죽음과 부활을 대조하며 부활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죽음’, 혹은 ‘죽었다’는 단어가 무려 25번이나 사용되고 있고, 비슷한 표현으로 ‘썩기 쉬운’, ‘죽어야 될 운명’, ‘잠’ 등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부활과 관련된 단어는 24번만 언급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철저하게 절망과 죽음을 맛보지 않고는 부활의 감격과 기쁨이 얼마나 귀한 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극복할 수 없었던 사망 권세, 살아있지만 죽음의 권세에 눌려 두려움 아래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이를 이길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바로 55절부터 57절까지 말씀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주님 주신 소망을 가진 사람은 삶의 뿌리부터 흔들어 놓는 일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오히려 극복하며 이겨나가 하나님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죽음은 마지막 분리가 아님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영과 혼이 하나님 전에 들어가는 것이며 하나님 정하신 때에 육체적 부활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절망과 고통이 가득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희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의 부활을 믿는 백성들을 향해서 외칩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치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이후에 우리들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5-18)” 세상의 논리와 말로는 위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한 고난과 낙담이 끝이 아니라, 고난과 낙담 너머에 있는 영원한 소망, 부활의 소망으로 서로 위로할 때 참된 희망이 있습니다.
톰 행크스(Tom Hanks)가 주연하고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를 감독했던 로버트 저메키스(Robert Zemeckis)가 감독한 '캐스트 어웨이(Cast Away)'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톰 행크스는 극중 특급 우편배달 회사 직원으로 나옵니다. 1분, 1초를 아껴가며 정확하고 빠른 배달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태평양 한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면서 일상생활에서 겪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지켜야 할 약속 시간도, 배달 시간도 없습니다. 천연의 시간만이 주어져 있습니다. 절대 고독의 시간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무인도에서 주인공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살아가며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영화에서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입니다. 우선 물질, 무인도에서도 필요한 음식과 의복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다음으로 친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물질이 아무리 풍부해도 마음과 생각을 나눌 친구가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감독이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희망과 사랑입니다. 주인공은 머리맡에 사랑하는 여인의 사진을 놓아두었습니다. 사진 속에 여인은 주인공이 더 이상 자살을 생각하지 않도록 막아 주었고, 날마다 약해져만 가는 주인공에게 무인도를 탈출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주인공은 4년 만에 무인도를 탈출합니다. 탈출 후에 그 동안 자신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던 사진 속 연인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떠나버린 후였습니다. 거기서 주인공은 자신을 살린 것은 여인을 사랑했던 사랑, 그리고 여인을 만나면 하고 싶었던 일들, 즉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희망이 자신을 무인도로부터 건졌고, 희망이 자신을 죽음과 절망으로부터 일어서게 했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오늘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희망 때문입니다. 현실을 넘어 세상이 줄 수 없는 희망, 부활의 능력을 발견한 사람들은 결단코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습니다.
또한 십자가에서 우리 죄와 허물을 짊어지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절대로 낙담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기에 희망을 갖습니다. 나도 포기한 나를 포기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절망을 희망으로, 낙담을 생명으로 바꾸는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중에 어려움을 이겨나가기 위해 꼭 기억해야할 표어 같은 것을 두어 날마다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하곤 합니다. 전쟁 중에도 아픈 기억이지만 과거로부터 명심해야할 교훈들을 정해놓고 마음을 다 잡곤 했습니다. 텍사스 사람들은 멕시코와의 전쟁 중에 ‘알라모를 기억하라.’라는 표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과 미국간의 전쟁이 있었을 때는 1898년에 하바드 항에서 일어난 유에스에스 메이노(USS 메이노) 호의 침몰을 따서 ‘메이노를 기억하라.’, 2차대전 중에는 ‘진주만을 기억하라.’ 라고 만들었습니다.
이런 예들과 마찬가지로 성공하는 인생을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삶의 많은 것을 경험한 비교적 인생 후반부에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서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고난 앞에 좌절하지 않고 풍성 앞에 교만하지 않으며 인생을 아름답고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니, 다름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디모데 후서 2장 8절의 말씀입니다. ‘디모데야, 인생이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란다. 우리를 좌절케 하고 낙담하게 하여 사명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 앞에 주저앉지 않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활하신 주님,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너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부활의 기쁨을 오늘 네게도 주기를 원하신단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너는 반드시 믿음 안에서 승리하리라.’
부활의 주님을 맞이한 여러분, 주님은 죽음의 냄새가 나는 삶의 현장 속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부활은 무덤에서 이뤄진 것처럼, 좌절과 고통이 있는 곳으로부터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바로 그곳에 생명과 소망의 역사 그리고 의와 희락과 화평이 가득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입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축복의 삶이되기 위해 부활하신 주님께서 소망 중에 부르시는 음성을 들으며, 부활을 약속하신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