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본문
본문말씀: 창세기 44장 30-45장 11절, 요한일서 4장 7-11절
민남기목사 설교
해리 오처드(Harry Orchard)의 이야기는 20세기 초 미국의 톱 뉴스였습니다. 오처드는 미국과 카나다에 사이에 있는 오대호 가운데 하나인 온타리오 호수(Lake Ontario)에서 태어났습니다. 오처드는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어려서부터 주일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오처드는 20세에 집에서 나가 방탕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선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다가 22세에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신부를 버리고 서부로 도망가서 그가 정착한 곳은 로키 산맥의 탄광 지대였습니다. 그 당시는 기업주와 노조가 대결하여 혈투를 자주 벌였던 시대였습니다. 돈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던 오처드는 노조의 테러 단원으로 채용되어 수많은 폭행과 암살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는 콜로라도 주 그리플 크리크(Gripple Creek) 정거장을 폭파하여 사망자 14명, 부상자 1백 명을 낸 테러의 주범이었습니다. 또한 뉴스거리가 된 아이다호 주지사 파른크 스투넨버그(Farnk Steunenberg)씨 살해 사건의 주범이었습니다. 1905년 12월 30일, 퇴근한 스투넨버그 주지사가 자기 집 문을 여는 순간 미리 장치되어 있던 폭약이 터져 주지사의 몸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노조측의 지시를 받은 오처드의 소행이었습니다. 이 일로 오처드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오처드는 진기한 면회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살해한 스투넨버그 주지사의 부인과 아들이 교대로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당신의 죄를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방문할 때마다 작은 전도 책자를 주고 갔습니다. 그러자 오처드의 영혼에는 놀라운 일이 생겨났습니다. 그는 재판부가 모르던 그리플 크리크 정거장 폭파 사건을 위시한 모든 범죄를 자백하였으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인다는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감옥에서 그는 '선한 마리아인'이라는 별명을 받을 만큼 자기 일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남들을 도와주고 동료 죄수들에게 말씀을 읽어 주면서 전도하였습니다. 실제적으로 변화된 그의 수감생활태도와 죽은 주지사 미망인의 요청으로 형량은 사형에서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었고 평생을 감옥에서 전도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형제들에 의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서 애굽의 총리가 되어 흉년이 찾아왔을 때 자신의 부모 형제들과 애굽 나라와 그 주변의 많은 사람을 구원하여 낸 구원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민족에게 팔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였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대로 물려받아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고, 야곱은 성화된 성도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예배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요셉은 모태신앙으로 조상들의 믿음을 본받아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놀라운 신앙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요셉은 창세기에 나오는 믿음의 족장들 중에 최고의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자신의 형님들을 용서하고 위로하는 내용입니다. 요셉의 용서 속에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형제를 무조건 용서하는 형제 사랑이 동시에 담겨져 있습니다. 요셉의 용서 속에 담겨진 이 두 가지 사랑에 대해서 몇 가지로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합니다 (44:30-45:4)
자기 부모 형제들을 7년 흉년에서 구원한 요셉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요셉은 흉년에 애굽에 곡식을 사러온 자신의 형님들에 대하여 처음에 형님들을 정탐군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동생 베냐민을 애굽에 데려와야 누명을 벗을 수 있다고 하면서 시므온을 애굽에 인질로 잡아 두었습니다. 형님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두 번째 왔을 때 베냐민을 다시 인질로 잡아 두려고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어 두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형님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형님들이 진정으로 회개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하며 시험했습니다. 요셉의 넷째 형님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여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요셉의 아버지 야곱의 형편을 말할 때 요셉은 감동하여 울었습니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의 생명이 베냐민의 생명과 연관되어 있어 베냐민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죽게 될 것임을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야곱은 일찍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어버렸고 시므온을 애굽에 인질로 잡혀두고 베냐민마져 인질로 잡히게 되면 그만 돌아가시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을 보내지 않으려고 해서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잡혀두고 베냐민을 데리고 왔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베냐민을 데리고 아버지께로 가지 못하면 아버지께 영원히 죄를 짓는 것이라고 감동적으로 말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다가 44장 16절에서 요셉을 자신들의 “주”라고 말하면서 요셉이 자신들의 “죄악을 적발하셨다”고 하면서 과거에 죄악을 자백하는 모습입니다.
요셉은 유다를 통하여 형님들이 진정으로 동생 베냐민을 사랑하고 아버지 야곱을 사랑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자신들의 죄악을 자백하고 책임을 지는 형님들의 진실한 모습을 확인하고 자신이 요셉임을 밝히고 용서하고 위로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되 반드시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고 돌아오는 사람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인들과 함께 하실 수 없으시고 죄인이 회개하고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나올 때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인간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를 든다면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나는 선하게 살았다.” “나는 바르게 살았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면 죄를 용서받을 수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아무도 의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탕자처럼 “스스로 돌이켜서 나는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품꾼의 하나로 써주소서”(눅 15:18-19)라고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아버지는 달려 나와 끌어안고 입마 추며 용서해주시고 잃었던 아들을 찾았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청하여 잔치해 주시면 영접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살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았고, 예수를 믿지 못하고 살았던 죄인임을 고백하고,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믿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베냐민 대신에 종이 되겠다고 책임을 지는 형님들을 용서해 주셨던 것을 기억하십시다.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가 아직도 살아 계시니이까?(45:3)” 요셉은 자기 동생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울었고 자기 형님들을 끌어안고 입 맞추며 울면서 용서했습니다(45:14-15). 요셉의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날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보고 우리의 죄악을 자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날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랑은 형제를 용서합니다(4:7-11)
미국 독립전쟁 당시 펜실베이니아에 피터 밀러라고 하는 목사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밀러 목사님은 그 지역의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을 미워하고 모욕하는 한 사람이 교회 옆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교회를 적대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반역자로 밝혀져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재판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는데, 밀러 목사님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걸어서 필라델피아의 워싱턴 장군에게까지 가서 그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탄원했습니다. 그러나 워싱턴 장군은 "죄송합니다만 나는 목사님의 친구를 위한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친구라고요?" 하고 밀러 목사님이 소리쳤습니다.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악한 원수입니다." "뭐라고요?" 워싱턴 장군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원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2백 5십리를 걸어왔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나로 하여금 이 문제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하는군요. 저는 목사님 때문에 그를 용서합니다." 그 사면은 워싱턴 장군에 의해 승인되었고 밀러 목사님은 그 날 사형 집행 장소로 다시 6십리를 걸어갔습니다. 그가 도착하는 순간에 그 사람은 교수대로 옮겨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형수가 밀러 목사님을 보자 “저기 늙은 피터 밀러 목사가 온다.” "내가 교수형 당하는 것을 보고 복수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에브라다에서 여기까지 줄곧 걸어왔느냐?"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밀러 목사님은 이 죄수에게로 다가와서 그의 생명을 구할 사면장을 건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형제를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일로 우리가 만났던 김성주판사님에게 들었던 얘기입니다. “가족들 사이에 일어나는 송사, 문중 사이에 일어나는 송사, 종교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송사는 화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미워해서 원수 사이가 되면 참으로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이미 듣고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사도요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용서하며 사랑하는 기쁨과 축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안에 일어난 다툼으로 수많은 소송을 당하고 맞소송을 하고 다퉜지만 다 용서하고 사랑하며 서로 만나서 함께 교제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소리치시면서 개인들을 무조건적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개인적인 원한이 없이 다 무조건 용서해 주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예수님의 말씀을 본받아 살면서 돌에 맞아 죽으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59-60)”라고 소리치면서 순교하셨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자신에게 돌로 던져 죽이는 무리들을 개인적으로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제뿐만 아니라 원수라도 개인적인 원한은 뛰어 넘어서 용서하며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고 성경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스데반이 원수를 용서할 때 무조건적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사과를 받는다든지 조건이 있다든지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할 때 자신들의 잘못을 돌아보게 하는 것을 보고서 용서한 것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론의 반역으로 감람산을 넘어서 요단강쪽으로 피난갈 때 사울의 집안에 속하는 시므이라는 자가 다윗을 저주하는 말은 할 때 다윗으로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피를 흘린 자여 가거라.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론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 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삼하 16:7-8)” 다윗의 충실한 신하 아비새가 이 죽은 개를 가서 목을 베오겠다고 했을 때 다윗왕은 만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10-11)”고하면서 자신을 계속하여 저주하는 시므이를 용서하며 비탈길로 다윗왕은 피난을 갔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왕의 원통함을 아셨고 압살론의 반역에서 건져주셨고 돌아오는 길에 시므이가 나와서 용서를 구할 때 아비새가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다윗은 자신이 가장 어려울 때 자신을 저주했던 시므이를 용서했습니다.
요셉도 사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자신의 형님을 다 용서하고 위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은 형님들을 섬기며 그들의 자녀들까지도 다 돌아보며 섬기면서 진정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위로하고 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용서하기 어려운 형제들도 용서하고 더 나아가 원수들도 용서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받은 우리들이 마땅히 할 일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용서하는 사람에게 기쁨이 있고 그들과 다시 형제가 될 수 있어서 기쁘고 사람들에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복음도 전할 수 있습니다. 이번 추석에 용서하기 어려운 형제들을 무조건 용서하고 위로하는 우리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이 용서합니다 (45:5-9)
요셉이 형님들을 용서하고 위로하는 말 속에 담겨진 요셉의 신앙은 참으로 깊습니다. 창세기 45장 4b-8a절 사이에 나와 있는 말씀을 한 번 보십시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다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 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른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세기 50장 19-21절 말씀에서도 아버지 야곱의 죽은 다음 두려워하는 형님들에게 한 말은 더 아름답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간곡한 말로 위로 하였더라.”요셉은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구원을 보면서 형님들을 완전히 용서했습니다.
요셉은 평소에 아버지 야곱에게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야곱을 택하셔서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애굽에 가서 객이 되어 400년간 살아가 출애굽하여 가나안땅을 차지하여 살게 될 것을 듣고 믿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과 가나안땅을 약속으로 그들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고 그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루어가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꾼 꿈과 관원들의 꿈 해석과 바로왕의 꿈 해석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사용하여 자신의 가족을 구원하시는 것을 내어다 보았습니다. 애굽에 팔려서 보디발 집안에서 종살이 할 때도,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살 때에도, 애굽의 총리가 되어 7년 풍년의 곡식을 준비하고 2년 흉년이 들어서 곡식을 나누어 주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자신의 가족들과 애굽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믿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주된 관심은 자신의 가족들의 구원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과 주권을 믿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개인적인 원한도 미움도 하나님의 약속 뒤에 두고 다 용서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용서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조건 없이 먼저 형제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싸우고 다투어서 미워하는 원수까지라도 용서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우리의 형제를 용서하고 우리의 원수까지라도 용서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