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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선입견이 깨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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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희목사 설교
우리의 선입견이 깨어져야 합니다

사도행전 10:9-16
본문의 내용은 이방인 고넬료가 구원받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며, 큰 전환이 되는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의 이방인이 예수를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 역사를 열어 가시는 신기원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고넬료의 회심을 통해서 "우리의 선입견이 깨어져야 합니다"는 제목으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두 가지를 생각하며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숨은 인재를 찾아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지 않은 곳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습니다.
당시에 로마 군대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은 유대인 가운데만 있을 것이라는 편협한 상상 속에 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의 좁은 판단과 선입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저런 사람은 믿을 수 없을 거야" "저 사람은 믿을 사람이야" 이렇게 단정을 짓습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도 관상을 보고 전도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을 만한 사람만 골라가면서 전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나중에 열매를 보면 자기가 믿을 만 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보다는 상상도 못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분석이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고 안에서만 살펴보는 선입견을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분석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역사를 도외시하고 지나치게 분석만 하다보면 사람들이 오히려 못보는 부분이 굉장히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한계에 묶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 가운데 많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종종 "한국교회는 썩었어"라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너무 가볍게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한국교회를 다 보셨습니까?
다 보지도 못한 사람이 어떻게 썩었다고 얘기합니까?
그러므로 "다 부패해서 소망이 없어"라고 쉽게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 이젠 나 밖에 없습니다"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왜 너 밖에 없니?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7000명을 남겨두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게 되면 나타나게 되는 특징들이 있는데 우리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깨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뛰어넘어서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곳을 향해 나가게 만드십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전쟁을 분석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를 분석할 때도 임진왜란 이전과 임진왜란 이후를 나누는데,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의 사회상, 사고, 정치, 경제, 모든 판단기준이 완전히 다 바뀌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선입견을 깨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 이후에 사회가 오히려 발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 가운데 어려움이 올 때 예수 믿는 사람들, 특별히 성령의 역사가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기회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13년 전에 고현교회에 처음 부임할 때에 주위 분들은 저에게 "난제가 되는 얘기들을 죽 나열하면서 어려울 것이다"라는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이런 얘기를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완벽한 교회라면 저 같은 사람을 청빙하겠습니까?"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때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미비한 점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지 못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저에게 주어진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쉽게 생각합시다. 어려움은 어려움이 아닙니다.
길바닥에 금덩이가 있으면 눈 빠른 사람, 눈 큰 사람, 눈 좋은 사람, 허리 유연한 사람이 먼저 다 집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귀중한 것은 절벽 사이에 꽂아놓습니다.
그러므로 절벽을 오르는데 소질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다 어려울 것이라고 얘기한 것이 오히려 자기에게만 보장된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 삶 속에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난관에 처해 있을 때마다, 침체의 한계에 처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도전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100주년을 맞는 고현교회의 4대 비전을 위해 나아갈 때마다 한계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도자들이 밤낮 보는 그 사람들만 붙들고 씨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새로운 얼굴을 찾아보십시오.
새로운 얼굴 한 명 두 명만 들어오면 완전히 분위기 바뀝니다.
물론 기득권자들은 이렇게 살다가 내가 짤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렇게 되면 내 입지도 문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얼굴이 들어와서 그들이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는 부분도 있지만 묵은 사람들도 정신이 확 들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여러분, 고넬료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받았던 충격과 새로운 바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멸시하던 이방인이 저렇게 신실하구나, 기도하는구나, 헌신하는구나" 아마 고넬료 한 사람이 주는 예루살렘 교회의 새바람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왕과 이세벨에게 고난을 당했습니다.
물론 갈멜산에서 대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하고 "나밖에 없습니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7000명이 더 있다고 말씀하신 후에 열왕기상 19장 이후에서부터 갑자기 엘리야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열왕기하로 넘어가면 엘리야가 갑자기 다시 등장하는데, 엘리야가 길갈에 갈 때, 벧엘에 갈 때, 여리고에 갈 때 엘리사는 그를 쫓아다니며 능력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때 성경에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 생도가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전에는 나밖에 없다고 한탄하던 엘리야가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길갈에도 선지 생도가 있었고, 벧엘에도 선지 생도가 있었고, 여리고에도 선지 생도가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엘리야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그 동안에 사람을 키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갈멜산에서 거둔 대승리도 중요하였지만, 그후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 못지 않은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람을 찾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새로운 인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될 때 삶의 침체와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의 종들이 될 줄로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놀라운 도전을 향해서 발걸음을 내딛는 고현의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우리의 선입견을 깨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3:22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구원에는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들을 다 품기를 원하신다"는 이것이 지금은 당연하게 보이지만 2000년 전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선입견을 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에서 먹지 말라고 하는 온갖 더러운 동물들이 들어있는 것을 내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먹으라" 그랬더니 베드로가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거절합니다.

13절과 14절을 보십시오.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여러분, 하나님이 정통 같습니까, 베드로가 정통 같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이 이단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여기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대답은 오늘날의 말로 하면 "하나님 맞아?" 하는 뉘앙스가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정통인 척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들도 이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면 순종하는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정통인 것처럼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의 음성보다 자기가 익히고 배운 전통과 유전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분석해 보면 그 전통과 유전이라고 말하는 것이 사실은 전통과 유전도 아닙니다.
대부분 자기 취향,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기의 선호도를 진리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도 그렇지만 어른들 중에 그런 예가 더 많습니다.
음악을 예로 들어보면 키타나 드럼으로 찬양을 한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저항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게 뭐냐, 왜 유행을 쫒아가느냐, 거룩한 교회에서……"
물론 일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405장의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 찬송이 스코틀랜드 술집에서 부르던 노래라는 것을 아십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거룩한 음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거룩한 가사가 있을 뿐입니다.
음악의 뿌리를 찾고 찾고 계속 찾아 들어가다 보면 음악적인 뿌리는 세속적인 음악이 더 많았습니다.
거기에서 음악이 출발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신앙간증이 있는 가사를 붙였을 뿐입니다.

여러분,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 찬송을 들으면서 눈물이 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문화에 충돌하지 말고 수용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변화를 자꾸만 가로막지만 말고, 적극적으로 다 수용해서 마귀로 하여금 기가 막히게 마귀가 쓰려고 하는 무기를 우리가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골리앗을 어떻게 이겼습니까?
골리앗의 칼을 뽑아서 골리앗의 목을 쳤습니다.
우리도 그런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다리를 놓는 사역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평한 평야에서도 담을 쌓으면 감옥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담을 쌓으면 거기에 자신이 갇힙니다.
그러나 보통 때에는 가기 힘든 섬이라도 다리를 놓으면 육지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막힌 담은 헐어버리고, 고립된 섬은 다리를 놓아 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을 통하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지금 목마른 영혼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실제적인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통하게 해야 거듭남이 있고, 성령이 임하셔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증거하게 되고, 성령이 임하셔야 삶의 진정한 위로와 기쁨을 누리게 되고, 성령이 임하셔야 비로소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담쌓는 사람이 아니라 다리를 놓아서 우리의 모든 선입견들을 뛰어넘는, 더 많은 영혼들을 주께로 이끄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생각지도 않은 사람들을 찾아 세우는 영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은 선입견을 깨게 만드시는 영이십니다.
우리 몸에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건강해지듯이 삶의 모든 부분도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을 향해 도전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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